지난 6~10일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유럽 최대 가전전시회 IFA의 화두 역시 인공지능(AI)이었다. 기업들이 앞다퉈 AI 기능을 접목한 가전제품을 선보이면서 ‘AI 대전’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삼성전자와 LG전자 역시 ‘AI 홈’을 보여주는 업계 최대 규모 전시장을 꾸렸다. 생성형 AI가 모습을 드러냈을 때의 놀라움을 넘어 이제 AI로 ‘무엇’을 제공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가전 업체들은 AI로 ‘이런 것’도 할 수 있다는 저마다의 답을 하나둘 내놓기 시작했다.
지난 7일 LG전자 이향은 H&A CX담당 상무와 강대종 H&A 인공지능가전 PMO 실장이 IFA 전시를 둘러본 뒤 설명한 내용을 참고해 최근 AI 홈·가전 트렌드를 정리했다.
AI 가전이 할 수 있는 일
독일 프리미엄 가전 업체 밀레는 세계 최초로 드럼 리브(rib)가 없는 ‘W2 노바 에디션’ 세탁기를 선보여 관심을 받았다. 리브는 세탁조 내부에 튀어나와 있는 바 형태의 부품이다. 리브에 옷이 부딪히면 섬유 수명을 단축시킬 수 있음에도, 세탁물과 세제를 혼합하는 데 필요해 없애기 어려웠다. 밀레는 AI를 활용해 리브를 없앴다. AI가 드럼통을 자유자재로 제어해 세제가 잘 섞이게 만드는 기술을 구현한 것이다.
밀레는 오븐에 음식을 넣으면 내부 카메라가 사진을 찍은 후 AI가 레시피를 찾아서 자동으로 요리를 해주는 ‘스마트 푸드 ID’ 기능도 선보였다. 밀레 가전으로 요리한 음식을 대접한 덕분인지 밀레 부스는 방문객으로 북적였다. ‘겉바속촉’으로 구워진 오리 스테이크가 맛있었다.
AI 기반으로 에너지를 절약해주는 기술도 눈에 띄었다. 삼성전자는 전력 피크 시간대에 에너지 절감을 돕는 ‘플렉스 커넥트’를 새롭게 선보였다. ‘옵티멀 스케줄링’은 에너지 수요가 높을 때를 피해 가전이 작동하게 하는 기술인데, 내일 아침까지 세탁을 끝내도록 설정해두면 세탁기가 에너지 요금이 낮은 한밤중에 돌아가는 식이다. AI가 생활비를 아끼는 데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셈이다.
개별 가전을 넘어 AI 홈으로
하지만 AI와 같은 신기술이 들어갈수록 기기는 비싸진다. 새로운 제품을 살 필요 없이 가전을 ‘업그레이드’할 수 있다면 어떨까.
LG전자가 2022년 처음 도입한 ‘업(Up)가전’은 필요에 따라 새로운 기능을 추가할 수 있는 가전제품이다. LG 씽큐 애플리케이션(앱)을 통해 새로운 기능을 다운로드 받아 사용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올해 IFA에선 ‘싱큐 온’이라는 홈 허브를 새롭게 내놨다. AI 기능이 없는 기존 가전도 싱큐 온과 연결되는 센서만 구입하면 AI 기능을 사용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가전을 운영체제(OS)를 통해 업그레이드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이미 주요 트렌드다. 삼성전자 역시 사물인터넷(IoT) 플랫폼 ‘스마트싱스’ 기반의 ‘스마트 포워드’ 서비스를 통해 지속적인 소프트웨어 업그레이드를 제공한다. 밀레와 하이센스 역시 OS 기반 가전을 출시했다.
이향은 상무는 “일방적으로 콘텐츠를 업그레이드하는 것이 아니라 고객과 소통을 통해 맞춤형 콘텐츠를 제공하는 형태로 발전하고 있다”며 “앞으로 싱큐 온에 앱 스토어가 생기면 AI 기능을 다운받아 가전 제품이 더욱 AI화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소비자들이 다양한 기기에 접근하는 문턱을 낮추는 ‘가전 구독’도 최근 주요한 흐름으로 볼 수 있다.
기업들은 개별 기기를 넘어 집안 전체를 AI로 연결하는 ‘공간 솔루션’도 선보였다. 밀레나 하이얼이 ‘스마트 키친’을 제시한 데서 더 나아가 삼성전자와 LG전자는 ‘집’ 전체로 공간을 더욱 확장했다.
‘스마트싱스’나 ‘싱큐 온’ 같은 플랫폼으로 집안 전체 기기를 연결해 통합적인 제어와 관리를 가능토록 한 것이다. 대표적으로 삼성전자의 ‘맵 뷰’ 기능은 한눈에 집안 가전을 조망하고 공간 전체를 관리할 수 있게 한다.
LG전자의 ‘싱큐 온’은 공간 솔루션이라는 방향성을 잘 보여준다는 평가를 받았다. 싱큐 온이라는 홈 허브를 중심으로 가전 기기를 연결해 공간 전체를 관장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허브가 훨씬 똑똑해야 하기 때문에 두뇌 역할을 하는 AI 에이전트 ‘퓨론’에 생성형 AI인 GPT-4o를 탑재했다고 한다.
AI도 따뜻할 수 있다
가장 흔한 형태의 AI 서비스는 대화를 통해 정보를 얻는 것이다. 가전 역시 대화를 통해 제어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삼성전자 빅스비 등으로 익숙한 기능이다.
여기에 더해 한층 진화된 제품으로 이동형 홈 로봇이 주목받았다. 노란색 공처럼 생긴 삼성전자의 ‘볼리’, 눈웃음이 귀여운 LG전자의 ‘Q9’(코드명)이 대표적이다. 하이센스도 Q9과 비슷한 ‘할리’라는 제품을 선보였다.
전시장에서 볼리와 Q9 앞에 가장 많은 관람객이 몰렸다. 귀여운 외관 때문이기도 하지만, 기능이 흥미로웠기 때문이다. 사람을 따라다니며 각종 잡일을 해주는 과학(SF)영화 속 로봇을 떠올리게 했다. 볼리는 스케줄을 물으면 벽면에 화면을 띄워 일정 체크를 돕고, 날씨와 길 찾기까지 알려줬다. 돌아다니며 켜져있는 전등을 꺼주기도 했다. Q9의 경우 화면에 그린 그림을 인식하고, 그림을 토대로 이야기를 만들어 들려주기도 했다. 생성형 AI가 탑재되어있다 보니 계속 새로운 이야기를 지어낸다. 이야기가 바뀌는지 확인하려고 두 번 세 번씩 듣는 사람들 때문에 Q9 앞에서 ‘교통 혼잡’이 빚어졌다고 한다.
AI 기술을 사람들의 마음에 ‘와닿게’ 만드는 시도들도 눈여겨볼 지점이었다. 삼성전자의 시니어 돌봄 기술이 한 예다. 부모의 안부를 걱정하는 자식들을 위해 집안에서 어떤 충격이 발생하면 주변 기기가 이를 감지해 알람을 보내준다. 낙상 사고를 염두에 둔 기능이다. 냉장고 문 열기 등 어떤 활동이 감지되면 부모의 하루 시작 알람을 보내주기도 한다.
LG전자의 ‘에어로 캣’은 고양이를 위한 가전이라고도 할 수 있다. 고양이가 높고 안락한 곳을 좋아하는데 착안해 반려동물 가정의 ‘필수템’인 공기청정기 위에 원형 돔을 뒀다. 올라가면 스트레스를 받지 않게 소음을 줄이고, 돔을 따뜻하게 만들어 고양이가 머물 수 있게 했다. 고양이가 쉬고 있으면 체중 모니터링을 해서 변화가 있으면 동물병원 가도록 알려준다.
강대종 실장은 “모든 회사들이 펫, 시니어, 학생 등 다양한 대상에 맞춰 가치를 주기 위해 고민하고 있다”며 “(공간 안에서) 연결된 경험도 중요하지만, 제품 자체가 줄 수 있는 감성에도 (차별화를 위한) 고민을 담아낼 수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이어 “앞으로 홈 허브를 통해 디바이스가 연결되면 거기에 다양한 외부 서비스를 연동시켜 고객들이 필요한 부분을 채우기 위한 고민을 하고 있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