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SK하이닉스 등 메모리 회사들의 올해 실적을 이끌어온 D램의 가격이 주춤하고 있다. 인공지능(AI) 열풍에 힘입어 고대역폭메모리(HBM) 같은 최첨단 칩의 인기는 아직 탄탄하지만, 개인용 PC 같은 소비자용 D램 수요는 지지부진하면서 메모리 업황이 양극화하는 모습이다. 모처럼 살아난 반도체 경기가 다시금 ‘다운사이클(침체기)’로 접어드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온다.
8일 시장조사업체 D램익스체인지에 따르면 PC용 D램 레거시(범용) 제품(DDR4 8Gb 1Gx8)의 지난달 평균 고정거래가격은 전월(2.10달러) 대비 2.38% 내린 2.05달러로 집계됐다. 지난해 10월 이후 줄곧 상승 흐름을 보여온 이 제품의 가격이 하락한 것은 올해 들어 처음이다.
D램 현물 가격도 상승세가 꺾였다. 범용 D램 ‘DDR4 8Gb 2666’의 현물가격은 지난 6일 기준 1.971달러로 연고점인 지난 7월24일의 2달러 대비 1.5% 내렸다. D램 현물가격은 시장의 즉각적인 매매 심리를 반영하는 특징이 있다.
이는 PC를 비롯한 개인 소비자용 제품의 수요가 부진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대만 시장조사기관 트렌드포스는 “PC 제조업체들이 2분기에 공격적으로 재고 확보에 나서면서 재고 압박이 가중됐다”며 “전반적인 수요 침체와 맞물려 판매 실적이 부진해 PC D램 조달이 줄었다”고 설명했다.
올해 상반기 글로벌 PC 제조사들은 인공지능(AI) 기능을 탑재한 노트북·PC 신제품을 내놓기 위해 경쟁적으로 D램 재고를 늘렸다. D램은 중앙처리장치(CPU)가 필요로 하는 데이터를 저장·공급하면서 컴퓨터의 연산 성능을 좌우하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PC 판매량이 시들하면서 재고 부담을 느낀 제조사들이 D램 주문량을 줄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트렌드포스는 “지난달 하순 D램 공급사들이 낮은 계약 가격에 칩을 제공하기 시작하면서 지난해 4분기 시작된 가격 상승세가 뒤집혔고, 월간 거래량도 상당히 감소했다”고 밝혔다.
부동산 위기가 촉발한 내수 침체로 중국 정보기술(IT) 시장 회복이 더딘 것도 범용 메모리 수요 확대를 가로막고 있다. 시장조사기관 IDC는 “올해 2분기 전 세계 개인용 컴퓨터 출하량은 3% 증가했다”면서도 “중국에서의 부진한 실적이 전체적인 시장의 성장을 계속 방해하고 있다”고 전했다.
반대로 HBM과 DDR5 등 AI 데이터센터용 첨단 메모리 수요는 여전히 견고한 모습이다. 김광진 한화투자증권 연구원은 “일부 범용 제품들에서 확인되는 소폭 가격 하락은 우려할 단계가 아니다. (구글·아마존 등)빅테크들의 AI 투자 확대 의지는 매우 확고하다”며 “(반도체)다운사이클로 판단할 근거가 부족하다”고 밝혔다.
그러나 빅테크들의 막대한 AI 투자가 수익성을 담보하고 있지 않다는 지적이 차츰 제기되고 있으며, 이 같은 회의론은 최근 엔비디아 주가 급락 등으로 서서히 표면화되고 있다. 글로벌 투자은행 모건스탠리는 지난달 20일 내놓은 ‘고점을 준비하다’라는 제목의 반도체 산업 보고서에서 “현재로서는 AI 컴퓨팅 칩이 부족하지만 이 상태가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반도체 산업은 상승 사이클의 끝에 있다”고 진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