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반기 국내 증시에서 ‘역대급’ 순매수에 나서며 상승세를 견인했던 외국인이 하반기 빠르게 주식을 팔아치우고 있다.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주요 원인으로 지목되는 기업 지배구조 개선에는 소극적이고, 공매도 금지 등 자본시장 선진화에 역행하는 정책들이 추진되면서 ‘단타용’ 외국인만 남았다는 비판이 나온다. 다음달 결정되는 한국 국채의 세계국채지수(WGBI) 편입이 실패할 경우 채권시장에서도 자금이 빠질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13일 금융감독원이 발표한 8월 외국인 증권투자 동향을 보면 지난달 외국인은 국내 증시에서 2조5090억원 순매도, 채권시장에선 5조4970억원을 순투자했다. 외국인이 증시에서 순매도로 전환한 것은 지난해 10월 이후 10개월만이다. 채권은 3개월 만에 순투자로 전환했다.
세부적으로 보면 외국인은 유가증권시장에선 2조1810억원을, 코스닥시장에선 3280억원을 순매도했다. 외국인이 국내 증시 시가총액에서 차지하는 비중(29.2%)은 3개월 만에 30%선 아래로 내려왔다.
외국인이 순매도로 전환한 것은 지난달부터지만, 이미 7월부터 외국인 자금 이탈 조짐이 있었다. 올 상반기 미국계 자금은 지난 1월을 제외하고 매월 국내 증시에서 2조원 넘게 순매수하며 시장의 하방을 저지했지만, 7월엔 순매수액이 1540억으로 쪼그라들었고 8월엔 3150억원을 순매도했다. 7월엔 그나마 영국 등 유럽계 자금이 버팀목이 됐지만, 8월엔 유럽계 자금도 2조원 가까이 이탈했다.
외국인 이탈의 이유는 경기 침체에 따른 위험회피 심리와 인공지능(AI) 거품 우려다. 이머징 마켓(신흥시장)인 국내 증시 특성상 위기 상황에선 자금이 빠르게 이탈한다. 상반기 외국인의 순매수도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 등 반도체에 집중됐던 만큼, 흔들리는 AI의 전망은 이들의 투심을 악화시키기 충분하다. 최근엔 메모리반도체 업황이 기대만큼 살아나지 못하자 삼성전자의 3분기 어닝 쇼크 가능성도 거론되며 이탈세는 더욱 가팔라지고 있다.
실제로 외국인은 지난 3일부터 13일까지 9거래일 연속 삼성전자를 순매도했다. 이달 초부터 13일까지 순매도액만 약 4조원에 달한다. 삼성전자의 주가는 이달 13.32% 급락하며 52주신저가(6만4200원)를 경신, 시가총액이 60조 가까이 증발했다. 시총 1위 대장주 삼성전자의 급락에 13일 코스피는 2575.41에 장을 마감, 밸류업 프로그램이 시작되기 전인 연초(2645.47)보다 낮은 수준으로 돌아갔다.
경기침체 우려와 기술주의 불안심리가 계기가 되긴 했지만, 정부가 공매도 금지를 단행하며 자본시장 선진화에 역행하고 주요 기업들에서 주주권 침해가 반복되는 것도 외인 자금 이탈에 영향을 주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외국인도 국내 증시에 대한 신뢰가 부족하니 장기간 투자하기 보단 ‘단타’에 나선다는 것이다.
지난 12일 열린 ‘자본시장 선진화를 위한 열린 토론’에 참석한 박철우 신한금융지주 IR파트장은 “한국을 아끼는 글로벌 기관투자자들은 실질적으로 한국에서 국민연금을 제외하면 장기간 투자하는 자금들이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고 평가했다.
아마르 길 아시아기업지배구조협회(ACGA) 사무총장은 “한국의 밸류업 프로그램은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으로 보이지만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근본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라며 “기본적인 지배구조 정책에 있어 상당한 격차가 존재한다”고 지적했다. 당국은 기관투자자의 적극적 시장 참여를 강조하고 있지만, 증시에 대한 신뢰 회복 없인 기관투자가의 참여도 장담하기 어려운 셈이다.
앞으로의 미래도 밝지 않다. 다음달 결정될 WGBI 편입에 실패할 경우 채권시장의 순투자 기조도 유지되기 어렵다. 최상목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최근 기자간담회에서 “우리나라가 충분히 WGBI 편입될만한 여러 여건과 제도를 갖추고 있다”고 밝혔지만, 골드만삭스가 올해 편입이 어려울 것이라고 전망하면서 내년에야 편입이 가능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명목 국내총생산(GDP) 상위 10개국 중 WGBI에 편입되지 않은 국가는 한국과 인도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