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강현실(AR) 글래스가 글로벌 정보기술(IT) 기업들의 새로운 먹거리로 부상하고 있다. 포화상태에 이른 스마트폰 시장을 대체할 수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4일 업계에 따르면 애플과 구글을 비롯해 LG전자와 SK텔레콤 등 국내외 IT기업들이 AR 글래스 개발을 진행 중이다. AR 글래스는 투명 디스플레이에서 현실세계와 가상세계를 함께 볼 수 있도록 한 스마트 안경을 뜻한다.
■애플 ‘iGlasses’ 나올까
로이터통신은 지난달 30일(현지시간) 애플이 AR 글래스용 렌즈 제작에 특화된 미국의 스타트업 아코니아 홀로그래픽스를 인수했다고 보도했다. 이 회사는 200개 이상의 관련 특허를 보유하고 있다.
블룸버그 통신은 지난해 말 애플이 아이폰을 이를 차세대 기기로 AR 글래스를 개발해 이르면 2020년 초 출시할 것이라고 보도한 바 있는데 아코니아 인수로 더 신빙성이 높아졌다.
팀 쿡 애플 최고경영자도 애플이 지난해 9월 아이폰과 아이패드용 증강현실 애플리케이션 개발도구인 ‘ARKit’을 공개한 이후 AR 기술에 강한 확신을 드러낸 바 있다. 그는 한 언론 인터뷰에서 “AR은 일하고, 놀고, 연결하고, 배우는 방식을 바꿀 것”이라며 “간단히 말해 AR은 우리가 기술을 사용하는 방식을 영원히 변화시킬 것이라고 믿는다”고 말했다. AR이 스마트폰과 같은 혁명적 기술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블룸버그 보도에 따르면 애플은 3년 전부터 AR 프로젝트 팀을 꾸려 ‘T288’이라는 암호명으로 수백 명의 인력이 AR 관련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 개발을 진행 중이다. 그래픽 처리장치와 AI 칩, CPU 등을 통합한 자체 칩과 운영시스템 ‘rOS’를 개발하고 시리를 통한 음성명령과 머리 동작을 일치시키는 작업 등을 진행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애플이 인수한 기업의 기술은 종종 수년 후 애플 제품에 등장한다. 대표적 예로 애플이 2013년 인수한 이스라엘 스타트업 ‘프라임센스’의 3차원 센서 기술은 지난해 애플이 출시한 아이폰X의 얼굴인식 기능에 적용됐다.
아코니아 인수로 애플이 만들려는 AR 글래스의 지향점도 파악할 수 있다. 아코니아 홈페이지 소개글에는 “넓은 시야의 생동감 있는 총 천연색 영상을 보여주는 얇고 투명한 스마트 글래스 렌즈”와 “고출력의 가볍고 낮은 가격대의 머리 착용형 AR 디스플레이” 제작에 특화됐다고 나와있다. 빛이 많은 실외 사용시에도 밝은 이미지를 보장하고 일상의 안경테에도 잘 어울릴 정도의 얇고 가벼운 투명 디스플레이를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으로 만들겠다는 것이다.
마이크로소프트의 홀로렌즈와 매직리프의 리프원 등 현재 출시된 증강현실 헤드셋은 대부분 어두운 렌즈를 사용해 실내용으로만 사용된다. 실외에서 착용하기에는 걸어다니기 위험하고 충분히 밝지 않기 때문이다. 가격도 홀로렌즈의 경우 300만원대 이상으로 일반 소비자들이 사용하기에는 부담스럽다. 수년전 공개됐지만 소비자 시장에 안착하지 못하고 기업용으로만 판매된 구글 글래스도 200만원에 가까운 가격이었다.
ARKit는 외부개발자들이 카메라와 프로세서를 활용해 온라인 쇼핑과 교육, 게임용 3차원 인터페이스를 만드는 도구다. ARKit이 스마트폰 화면에서 증강현실을 구현하는 것이라면 AR 글래스는 3차원 영상을 스트리밍 할 수 있는 내장형 디스플레이가 있는 헤드셋이라는 점에서 훨씬 더 복잡하다.
증강 현실은 실제 세계를 조사해 이해한 다음 가상의 객체를 그 위에 놓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AR 글래스는 이를 위해 얼굴을 인식하는 3차원 센서의 방향을 돌려 외부 세계를 인식하고, 눈동자의 움직임을 추적해 그에 맞는 영상을 보여줘야 한다. 외부 활동에 적합할 정도로 가볍고, 낮 시간대 실외에서도 밝고 선명한 이미지를 표현해야 한다. 이에 적합한 디스플레이와 배터리, 소비전력이 낮은 고성능 프로세서와 소프트웨어 개발 기술이 필수적이다.
■AR에 주목하는 이유
AR 글래스는 현재도 시중에 60여종의 제품들이 나와있지만 대중적으로 성공한 제품은 없다. 대부분의 제품들이 배터리 지속 시간이 한시간 내외로 짧은데다 디스플레이의 성능이 낮고 AR 글래스에서 즐길만한 콘텐츠도 아직은 부족하다. 그러나 애플 외에도 페이스북과 구글 등 글로벌 IT 기업들이 스마트폰 이후를 겨냥한 경쟁에 나서면서 상황은 바뀔 것으로 예상된다.
한 업계 관계자는 “AR 글래스의 초창기 제품이라할 구글 글래스는 굉장히 가볍지만 화질은 기대에 못 미쳤다”며 “애플이 2020년 내놓을 제품은 훨씬 더 나은 수준일 것이라고 판단한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현재는 사실 소량 생산이고 개발 단계 수준이라 비싸지만 대량생산이 이뤄지면 현재의 스마트폰 수준 이내로 충분히 들어올 수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AR기술은 가상현실(VR) 기술보다 시장 성장 가능성이 높다는 게 업계의 평가다. VR은 현실을 차단시키고 가상세계에 빠지도록 하는 것이라 현실 세계와의 공존이 불가능하다. 실내에서 제한된 시간만 사용할 수 있다는 단점도 있다. 반면 AR 기기의 경우 안경처럼 몸에 착용하는 형태가 되면 스마트폰처럼 잠잘 때 빼고 24시간 들고 다닐수 있는 기기가 될 수 있다.
AR 글래스는 사용자에게 해당 시점에 필요한 최적의 정보를 보여주기 때문에 교육용·산업용·레저용으로 주목받고 있다. 예를 들어 정비사들은 바라보는 시점에 따라 그에 맞는 작업 안내가 글라스에 뜨기 때문에 설명서를 보지 않아도 정확히 작업할 수 있다. 의료용으로 쓰일 경우 진료 정보가 눈 앞에 바로 뜨기 때문에 의사가 컴퓨터나 차트를 볼 필요가 없어 환자와 상담할 때 더 집중할 수 있다. 운동할 때 운동량 정보가 눈 앞에 보이게 만들 수 있어 스포츠용으로도 각광받고 있다.
업계는 스마트폰과 AR 글래스가 공존할 것이라고 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AR 글래스의 시장 파이는 스마트폰보다 커질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한 업계 관계자는 “AR 글래스가 스마트폰이 할 수 있는 일을 어느정도 대체할 수 있고 특히 손이 자유로운 장점은 무한하기 때문이다”고 설명했다. 스마트폰이 카메라를 대체하듯 AR글래스는 집안의 TV와 컴퓨터 모니터를 대체하면서 성장할 가능성도 제기된다.
국내에서도 AR 기술 개발에 적극적이다. SK텔레콤은 AR 기술의 최종단계라 할 홀로그램을 이용한 AI스피커를 준비하고 있다. 이 회사는 올해 2월 열린 ‘모바일 월드 콩그레스(MWC)’에서 AI 스피커 안에서 홀로그램을 보여주는 ‘홀로박스’를 선보였다. 홀로그램으로 만든 가상의 AI 아바타와 얼굴을 마주하고 대화할 수 있다. SK텔레콤 관계자는 “AI 스피커는 얼굴이 없는 디바이스’였다”며 “홀로그램을 선택해 거기에 영혼을 불어넣으려고 했다”고 말했다. 투명하지만 입체적이고, 친근하면서도 몽환적인 홀로그램 특유의 느낌이 이를 시각적으로 표현하기 좋았다고 설명했다. SK텔레콤은 홀로그램 시장 상황과 기술 발전 상황에 따라 상용화 시기를 조율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홀로그램은 빛의 세기와 방향을 조절해 3차원 영상을 만든다. 두 눈의 시각차를 이용한 착시효과로 입체감을 구현하는 방식이 아니라 어지러움이나 피로감을 느끼게 하지 않는다. 홀로그램은 원래 디스플레이 없이도 허공 위에 영상을 보여주는 기술이지만 기술적인 어려움 때문에 중간 단계로 홀로박스나 AR 글래스처럼 디스플레이 위에서 홀로그램을 보여주는 방식이 거론된다. SK텔레콤 관계자는 “홀로그램에 광학기술이 들어가고 있어서 AR 글래스도 같이 고민하고 있다”며 “다만 초기 시장이고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도 지원되어야 해서 몇년은 더 있어야 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홀로그램을 비롯한 AR 영상을 실시간으로 보여주기 위해서는 대용량 데이터 전송 기술이 필요하다. KT가 지니뮤직에서 홀로그램 콘텐츠를 제공하겠다고 밝히는 등 통신사들도 5세대(G) 이동통신 시대의 주요 콘텐츠로 AR 기술에 주목하고 있다. 디스플레이와 배터리 기술을 보유한 전자업체들로서도 AR 글래스는 도전해볼만한 상품이다. 업계에서는 삼성전자와 LG전자 역시 AR 기기 개발에 나선 것으로 보고 있다. 전자업계에 따르면 LG전자는 미래 기술을 연구하는 최고개발책임자(CTO) 산하 조직에서 AR 글라스를 개발하고 있다. 전자업계 관계자는 “실제 개발이 진행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며 “구글 이후 다양한 기업들이 진출하고 있는데 앞으로 시장이 열릴 것으로 기대하고 있기 때문이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