②청각장애인에게 수어로 AS해줄 기업 없나요읽음

조미덥 기자
청각장애인 민서연씨(가명·스마트폰 화면)가 지난 15일 서울 영등포구의 한국장애인소비자연합 사무실에서 수어통역사를 통해 경향신문 기자에게 기업의  AS(애프터서비스)를 받으면서 겪은 어려움을 얘기하고 있다. 조미덥 기자

청각장애인 민서연씨(가명·스마트폰 화면)가 지난 15일 서울 영등포구의 한국장애인소비자연합 사무실에서 수어통역사를 통해 경향신문 기자에게 기업의 AS(애프터서비스)를 받으면서 겪은 어려움을 얘기하고 있다. 조미덥 기자

서울 은평구에 사는 청각장애인 주부 민서연씨(45·가명)는 몇년 전 노트북을 수리하며 겪은 일을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이 아프다. 노트북에 갑자기 비밀번호가 걸려서 AS(애프터서비스)센터를 찾았다.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만한 대기업이었는데, 수어통역을 제공하진 않았다. 기초지방자치단체에 배치된 수어통역사를 부를까 하다가 시간 맞추기도 어렵고, 간단한 수리라 생각해 필담으로 AS를 받기로 했다.

하지만 AS센터 직원은 필담에 서툴렀고, 민씨는 그 직원이 쓰는 용어가 어려워 무슨 뜻인지 이해되지 않았다. 그 직원은 소통이 잘 안된 상황에서 노트북을 포맷(초기화)했고, 민씨가 노트북에 오랫동안 보관하던 사진과 자료가 다 날아갔다. 민씨는 무척 억울했지만 하소연할 데가 없었다.

민씨는 지난 15일 수어통역사를 통해 경향신문 기자에게 “대부분의 청각장애인들이 살면서 수도 없이 겪는 일”이라고 전했다. 한번은 아주 간단한 세탁기 고장이었는데 수어로 설명하지 못하다 보니 2만5000원의 출장비를 주고 부른 일도 있었다고 했다.

현재 대부분의 AS는 기업의 콜센터에 전화를 거는 것으로 시작된다. 음성 자동응답으로만 진행되게 해놓은 기업도 있다. 청각장애인들은 여기서부터 어려움을 겪는다. 영상통화 기술이 발달하고 비용도 낮아졌지만, 공공기관과 지방자치단체, 금융권, 통신사를 제외하면 영상통화로 수어 서비스를 제공하는 회사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다. 민씨는 “지금까지 AS 과정에 수어통역을 제공하는 회사를 만난 적이 한번도 없었다”며 “자기 제품을 잘 아는 직원이 고객에게 수어통역을 해주면 정확한 의사소통이 가능할텐데 아쉽다”고 말했다.

지난해부터 확산된 코로나19는 청각장애인들의 상황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우선 수어통역사를 만나는 일부터가 대면 접촉이다. 대화를 위해 입모양을 봐야 하기 때문에 마스크를 벗고 대화하는 일이 많아서 감염 우려도 크다. AS센터, 편의점, 길거리에서 비장애인들의 입모양을 보고 도움을 받는 경우가 많은데, 다들 마스크를 쓰고 있어서 청각장애인들은 고립감을 느낀다. 특히나 몸이 아파서 찾는 병원 같은 곳에서는 마스크 착용이 더욱 강조되고 있어서 청각장애인과 수어통역사들의 소통과 감염예방대책이 필요하다. 대면 교육을 대체해 진행되는 동영상 교육 서비스도 청각장애인을 위한 자막 서비스가 제공되지 않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민씨가 겪었듯 필담도 쉽지 않다. 청각장애인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용어가 많기 때문이다.하지만 기업에서는 그런 상황에 대한 이해도가 높지 않다. 민씨는 “AS센터에 가면 직원이 설명서에 써 있는데 왜 모르냐고 타박한다”며 “사용설명서를 보는데 글자는 읽어도 무슨 뜻인지 이해가 안된다”고 하소연했다. 민씨는 “가끔 연로하신 청각장애인이 제품설명서 내용을 물어보시는 경우가 있는데, 나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며 “설명서를 그림과 수어영상으로 만들어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2016년 한국수화언어법이 통과되면서 국내에서도 수어가 국어와 동등한 언어로 인정받고, 특히 공적 영역에선 수어통역이 제공되는 곳이 많아지고 있다. KBS 뉴스나 코로나19 관련 브리핑 등에 수어통역 서비스가 나오고, 최근에 방탄소년단이 신곡 안무에 국제수어 동작을 넣으면서 수어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하지만 기업들은 여전히 수어통역이나 수어설명서 제공을 비용 증가로 여기고 나서지 않고 있다. 민용기 한국장애인소비자연합 정책기획팀장은 “청각장애인에게는 한국어도 외국어나 마찬가지”라며 “기업들은 청각장애인이 이해할 수 있는 방법으로 사용법을 설명하고, 수어로 AS를 제공해야 한다”고 말했다.

코로나19가 불러온 비대면 시대, 비장애인의 소비는 빠르게 비대면으로 전환되고 있지만 장애인은 원하는 물건을 사고 서비스를 받기가 이전보다 더욱 힘들어졌다. 기업은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면서도 소비자로서 장애인이 누려야 할 권리를 찾아주는 데엔 인색하다. 경향신문은 이번 시리즈 기사를 통해 장애인을 복지·인권의 틀로 바라보는 시야를 넘어 소비의 주체로서 장애인이 처한 상황을 진단해보고자 한다. 또 미력하나마 상황을 개선하고자 노력하는 기업을 조명하고, 변화를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도 짚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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