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얼굴도 모르는 집주인···임대차계약 해지통보했더니 ‘죽은 사람?’읽음

류인하 기자

공시송달했지만 집주인 사망해

HUG는 전세보증금 반환 거절

전세사기피해자전국대책위 회원들이 지난 23일 국회 앞에서 열린 전세사기 특별법 국회 법안소위 합의안에 대한 입장 발표 기자회견에서 손피켓을 들고 있다. 성동훈 기자

전세사기피해자전국대책위 회원들이 지난 23일 국회 앞에서 열린 전세사기 특별법 국회 법안소위 합의안에 대한 입장 발표 기자회견에서 손피켓을 들고 있다. 성동훈 기자

임차인이 집주인을 상대로 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임대차계약 해지통보를 했지만 주택도시보증공사(HUG)로부터 전세보증금 반환을 거절당하는 황당한 사건이 발생했다.

가장 강력한 통보인 법원의 ‘공시송달’까지 동원하는 사이 세 번째 바뀐 집주인이 요양병원에서 사망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해당 집주인은 세입자가 얼굴도 모르는 사람이었다. 숨진 집주인의 딸은 “아버지가 두 번째 임대인에게 명의만 빌려줬던 것”이라고 주장했다.

딸의 주장대로라면 두 번째 집주인은 임차인의 보증금만 챙긴 채 사회활동이 불가능한 노인에게 집 명의를 넘긴 전세사기 가해자다. 해당 집은 집값과 보증금이 같은 깡통전세였다.

HUG는 그러나 세입자가 모든 방법을 동원해 계약해지 통보를 해도 결과적으로 집주인이 답변을 하지 않은 이상 효력이 없다며 임차인의 보증금 반환신청을 거절했다.

우리 민법상 임차인의 계약해지 통보는 ‘도달주의’를 취하고 있다. 즉 임대인이 계약해지 통보를 받았다는 확인이 있어야 효력이 발생한다는 말이다. 임대인이 의도적으로 연락을 피하거나, 보증금만 갖고 무능력자에게 집명의를 돌려버리면 임차인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

30일 경향신문이 취재한 것을 종합하면 A씨(42)는 지난 2020년 11월 13일 서울 은평구의 한 다세대주택에 보증금 2억2800만원을 주고 임대차계약을 맺었다. 당시 집주인은 B씨였다. 그러나 그가 거주한지 불과 한달 여 만에 임대인이 C씨로 바뀌었다는 HUG 알림톡을 받았다. A씨도 모르는 사이 집주인이 바뀐 것이다. 첫 집주인은 그에게 집을 다른 사람에게 넘겼다는 통보조차 하지 않았다.

바뀐 두 번째 집주인 C씨는 집을 넘겨받은지 며칠 만에 A씨에게 연락해 “보증금을 2000만원만 올려달라”고 요구했다. A씨가 그의 요구를 거절하자 C씨는 그 뒤로 A씨의 연락을 받지 않았다. 집의 안방 천정 일부가 내려앉는 누수사고가 발생해 C씨에게 수십여 차례 연락을 시도했지만 역시나 연락이 닿지 않았다.

집주인이 또다시 바뀐 것은 그가 세들어 산 지 6개월만인 2021년 5월 27일이었다. 이번에도 HUG의 알림톡을 통해 집주인이 바뀐 사실을 알았다. 그러나 A씨가 세 번째 집주인 D씨의 연락처를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두 번째 집주인이 잠적하면서 바뀐 집주인의 연락처를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A씨가 뒤늦게 알게 된 사실은 세 번째 집주인은 고령의 노인으로 당시 요양병원에 입원 중이었다.

세들어 산지 6개월만에 집주인만 3명

A씨는 결국 임대차계약이 종료되기 6개월 전 현 주택소유자의 등기부등본을 발급받아 D씨에게 1차 내용증명을 발송했다. 내용증명은 나흘만에 반송됐다. A씨는 두 달 뒤 D씨의 주소지가 바뀐 것을 확인하고 계약만료 2개월을 앞둔 9월 D씨에게 2차 내용증명을 발송했다. 이 역시 하루만에 반송됐다.

그에게 남은 방법은 공시송달밖에 없었다. 공시송달은 상대방에게 내용증명이 도달하지 않을 경우, 법원이 통보할 내용을 대신 게시하고 상대방에게 송달된 것으로 간주하는 제도다. 상대방이 통보내용을 받지 않아도 받은 것으로 법적효력을 부여하는 것이다.

법원은 임대차계약 만료를 열흘 정도 앞둔 지난 2022년 11월 2일 공시송달 처분을 내렸다. A씨로서는 얼굴조차 모르는 세 번째 임대인에게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임대차계약 해지통보를 한 셈이다.

전세사기 깡통전세 피해자가 지난 16일 국회 본청계단에서 대책위원회가 연  ‘선구제 후회수’ 방안 반대 정부여당 규탄대회에서 억울한 사연이 빼곡히 적힌 종이를 들고 발언하고 있다. 박민규 선임기자

전세사기 깡통전세 피해자가 지난 16일 국회 본청계단에서 대책위원회가 연 ‘선구제 후회수’ 방안 반대 정부여당 규탄대회에서 억울한 사연이 빼곡히 적힌 종이를 들고 발언하고 있다. 박민규 선임기자

그러나 A씨는 HUG로부터 전세보증금을 돌려받을 수 없었다. 그가 첫 번째 내용증명을 보낼 때까지는 살아있던 D씨가 두 번째 내용증명을 보낼 때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즉 죽은 사람에게 보낸 내용증명은 효력이 없다는 게 HUG가 내세운 보증금 반환 거부 사유였다. 법원의 공시송달 역시 이미 죽은 사람에게 보낸 것이기 때문에 효력이 없다고 봤다. D씨는 2022년 8월 20일에 사망했으나 사망신고는 석 달 뒤인 11월 중순에야 이뤄졌다. 11월 중순까지 D씨는 법적으로는 살아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법원도 D씨를 상대로 공시송달을 한 것이다.

HUG는 A씨에게 “D씨의 유가족을 상대로 계약해지통보를 해보라”고 안내했다. 그러나 D씨의 유일한 가족인 딸은 이미 상속포기를 한 상태였다. D씨의 딸 역시 아버지가 사기를 당한 것이라며 두 번째 집주인을 고소한 상태라고 주장했다.

그 사이 A씨의 임대차계약은 자동 연장됐다. 집주인이 존재하지 않는 집의 세입자 신세가 된 셈이다.

HUG측 관계자는 A씨에게 “D씨의 형제자매 및 그 자녀들에게 상속포기 확인서를 받아 법원으로부터 집에 대한 제3관리인 지정을 받아 제3관리인에게 계약해지 통보를 하면 된다”고 안내했다.

세 번째 집주인 연락처를 몰라 등기부등본을 통해 확인한 주소로 내용증명을 보냈던 A씨에게 HUG가 내놓은 방법은 사망한 사람의 형제자매에 그 자녀들까지 찾아다니며 상속포기 확인서를 받아오라는 것이었다.

A씨는 “고인의 딸로부터 고인의 형제자매만 5~6명이라고 들었지만 그 자녀들이 몇 명인지는 알 수도 없었다”고 말했다. D씨 딸과의 연락도 이제는 끊긴 상태다.

그는 “몇날 며칠 하루 2~3시간만 자고, 스낵면 한 봉지로 끼니를 떼우면서 전세보증금 대출금을 갚았는데, 이젠 생업도 팽개치고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집주인의 형제자매를 찾으러 다녀야할 상황”이라고 말했다.

대전 일대에서 영업일을 하는 A씨는 전세사기를 당한 서울 은평구 다세대주택에 주소지를 그대로 둔 채 찜질방이나 모텔에서 숙식을 하다 일주일에 1~2번 서울에 오는 이중고를 겪고 있다. 그는 “처음 임대차계약 체결 당시 집주인은 멀쩡한 신혼부부였고, 선순위근저당도 없는 깨끗한 집이었다”며 “내 잘못은 단 하나도 없는데 졸지에 전세사기 피해자가 돼 버리고 힘들게 모은 전세보증금 마저 돌려받지 못하는 신세가 됐다”고 말했다.

김종보 변호사(휴먼 법률사무소)는 30일 “임차인은 전세보증금을 보호하기 위해 보험에 가입하는 것”이라며 “임차인이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까지 법률요건을 갖출 것을 요구하는 것은 HUG의 본래 기능을 망각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임대인에게 정상적으로 계약해지 통보를 했다면 보증금을 대위변제해주고, 공공기관인 HUG가 임대인을 상대로 구상권을 행사하기 위한 각종 조치를 하는 게 맞다”고 밝혔다.

홍정환 법무법인 루트 대표변호사는 “현실적으로 상속인들을 찾아내야만 한다면 법원의 도움을 받을 길은 있다”면서 “임차인이 망인을 상대로 임대차보증금반환소송을 제기해 법원으로부터 상속인들의 현황 및 현재 주소지 파악을 위한 보정명령을 받은 뒤 상속인들의 주민등록초본을 발급받으면 주소를 알아낼 수는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상속인의 주소지로 임대차계약갱신 거절이나 계약해지를 내용증명우편으로 보내거나 소장의 송달로써 임대차계약 갱신거절이나 계약해지의 의사를 갈음하는 방식으로 HUG에 계약해지를 위한 의사표시를 했다고 증명하는 방법도 활용해볼 필요가 있다”고 제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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