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꺼질지’ 모를 알래스카의 평온…송유관이 위험해!

이정호 기자
총길이 약 1300㎞에 이르는 알래스카 송유관. 여러 개 설치된 영문 ‘H’ 모양의 지지대가 송유관 무게를 지탱한다. 최근 알래스카 영구동토층이 녹으며 지반이 무너져 지지대가 기울거나 구부러지는 일이 발생했다.  알래스카 주정부 제공

총길이 약 1300㎞에 이르는 알래스카 송유관. 여러 개 설치된 영문 ‘H’ 모양의 지지대가 송유관 무게를 지탱한다. 최근 알래스카 영구동토층이 녹으며 지반이 무너져 지지대가 기울거나 구부러지는 일이 발생했다. 알래스카 주정부 제공

영구동토층 녹으며 지지대 망가져
땅속 온도 낮추는 특수장비 투입

하루 운송되는 원유량 48만배럴
2007년 태안 선박 유출량의 6배
온난화로 지속적 사고 위험 커져

2010년 4월20일, 미국 루이지애나주 앞바다 근처 멕시코만에 머물던 석유 시추선 ‘딥워터 호라이즌호’에서는 날카로운 긴장감이 감돈다. 시추장비가 감당하기엔 해저 압력이 너무 높다는 신호가 감지됐지만, 밀린 작업량을 맞추기 위해 석유회사는 노동자들에게 계속 일할 것을 지시한다. 결국 수익을 향한 과욕은 참사를 부른다. 시추선이 폭발하며 대규모 사상자가 발생한다.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된 미국 영화 <딥워터 호라이즌>의 내용이다.

당시 사고로 인해 무려 490만배럴의 석유가 유정에서 바다로 흘러나왔다. 한국 전체에서 이틀간 사용하는 원유에 해당하는 막대한 양이다. 이전에도 유정에서 원유가 샌 사고는 많았다. 1979년 멕시코만에서 탐사 유정 ‘익스톡1’이 폭발한 게 대표적이다. 당시 사고로 원유 320만배럴이 유출됐다. 원유가 유출되는 또 다른 주요 경로는 유조선 파괴다. 1989년 유조선 엑슨발데즈호가 미국 알래스카주 인근 바다에서 좌초하면서 원유 24만배럴이 새나왔다. 2007년 한국 태안반도에서도 유조선과 크레인선이 충돌해 7만8000배럴이 바다로 흘러들었다.

■ 심상찮은 송유관 지지대 손상

그런데 최근 원유가 환경에 유출되는 경로에 중요한 변화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불안한 눈길이 쏠린 곳은 송유관이다. 이달 중순 미국 과학매체 사이언티픽 아메리칸 등은 알래스카 주정부가 송유관 관리회사의 요청을 받아들여 송유관을 지지하는 지상 구조물을 수리하는 특수 장비인 ‘열사이폰(thermosyphon)’ 사용을 승인했다고 전했다. 총길이 1300㎞에 이르는 알래스카 송유관 가운데 페어뱅크스시 주변의 약 250m 구간에서 송유관을 떠받치는 ‘H’자형 지지대가 기울거나 구부러진 데 따른 조치다.

주목되는 건 지지대가 망가진 이유다. 지지대 아래의 영구동토층이 녹으면서 지반이 무너졌다. 영구동토층은 2년 이상 결빙 온도 이하를 유지하며, 말 그대로 꽁꽁 얼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 땅이 흐물흐물해진 것이다. 알래스카 송유관에서 이런 유형의 파손이 생긴 건 처음이다.

열사이폰의 핵심 기능도 녹아내린 영구동토층에 냉기를 불어넣는 일이다. 모두 100여대를 동원하는데, 지면에서 12~18m 아래까지 파이프를 꽂은 다음 냉매로 땅속 온도를 낮출 계획이다. 열사이폰은 기존에도 12만여대가 송유관 주변에 설치돼 있었지만, 더 깊은 땅까지 얼리기 위해 추가 공사에 들어간 것이다.

냉매를 이용해 땅속을 얼리는 ‘열사이폰’(타원). 최근 영구동토층이 녹아 송유관 지지대가 손상된 알래스카에 추가 설치될 예정이다.  미국 지질조사소(USGS) 제공

냉매를 이용해 땅속을 얼리는 ‘열사이폰’(타원). 최근 영구동토층이 녹아 송유관 지지대가 손상된 알래스카에 추가 설치될 예정이다. 미국 지질조사소(USGS) 제공

■ 단발성 사고로 그치질 않을 가능성 커

문제는 송유관 지지대가 망가지는 일이 계속 일어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지지대를 망가뜨린 영구동토층 붕괴가 지구 온난화라는 구조적인 문제에서 비롯됐기 때문이다. 올해 5월 미국해양대기청(NOAA) 등이 분석한 내용에 따르면 지구 대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는 419.13PPM으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영국 리즈대 연구진 등이 2017년 ‘네이처 기후변화’에 발표한 논문을 보면 전망은 더 어둡다. 지구 기온이 2도 오르면 영구동토층 약 390만㎢가 손실된다. 남한의 40배 면적에 육박한다. 이대로라면 송유관 지지대가 연쇄적으로 무너지고, 알래스카 대지로 원유가 광범위하게 유출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뜻이다. 알래스카 송유관을 흐르는 하루 원유량은 48만배럴에 달한다. 2007년 한국의 태안반도를 검게 물들인 전체 원유 유출량의 6배가 단 하루에 움직인다. 사달이 생기면 환경 피해가 클 수밖에 없다.

김백민 부경대 환경대기과학과 교수는 “올해 폭염은 캐나다를 포함해 과거보다 북쪽으로 확장하는 양상을 띠고 있어 문제가 더 커지고 있다”며 “탄소 감축 노력을 이어가면서 필요한 지역에선 송유관을 지탱할 구조물을 보강하는 방식의 기후변화에 대한 적응도 병행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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