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카맣게 탄 세쿼이아, 범인은 기후변화

이정호 기자

미국 서부 산불의 대학살 ‘지구 대표 거목’ 자이언트 세쿼이아

산불로 잿더미가 된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자이언트 세쿼이아’ 숲. 연이은 미국 서부 산불로 자이언트 세쿼이아 전체 개체 수의 20%가 사라졌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미국 국립공원관리청(NPS) 제공

산불로 잿더미가 된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자이언트 세쿼이아’ 숲. 연이은 미국 서부 산불로 자이언트 세쿼이아 전체 개체 수의 20%가 사라졌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미국 국립공원관리청(NPS) 제공

수분 많아 웬만한 불에 꿈쩍 않는데
지난해에만 1만그루나 잿더미로
연이은 화마에 최대 20% 사라져

밑동에 알루미늄 막 둘러도 한계
더워지는 지구, 소멸 위기 내몰아

아궁이 속에서 열기를 다 토해낸 땔감처럼 새카맣게 불에 탄 나무들이 땅에서 나뒹군다. 고열에 노출된 줄기는 힘없이 부스러져 있고, 뿌리를 박고 선 나무들도 형태만 유지할 뿐 생명체로서의 수명은 다한 지 오래다. 올해 가을, 미국 서부 산불로 잿더미가 된 캘리포니아주의 한 ‘자이언트 세쿼이아’ 나무가 모인 숲속 모습이다. 그런데 이런 비극은 사진 속 지역에서만 일어난 게 아니었다. 지구에 사는 자이언트 세쿼이아 다섯 그루 가운데 한 그루가 지난 2년 새 일어난 산불로 사라졌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사실상 집단 소멸이다.

본래 자이언트 세쿼이아는 불에 잘 버티는 나무다. 일단 몸집이 크다. 높이 84m, 지름이 11m에 이르러 세계 최대 부피의 생명체로 꼽히는 ‘제너럴 셔먼’이라는 이름의 나무가 자이언트 세쿼이아다. 특히 껍데기에 수분을 다량 품고 있어 웬만한 화염에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기후변화 속 고온건조 현상이 만든 대형 산불 앞에 맥을 못 춘 것이다. 기후변화에 즉시 브레이크를 걸지 않으면 자이언트 세쿼이아의 운명을 따를 다른 나무들이 줄줄이 등장할 거라는 우려가 나온다.

■ 2년 새 개체 수 20% 소멸

미국 국립공원관리청(NPS)은 올해 캘리포니아주에서 발생한 산불로 최대 3637그루의 자이언트 세쿼이아가 타버렸다고 최근 발간한 보고서를 통해 밝혔다. NPS는 3637그루라는 숫자를 가리켜 “이미 불에 타 죽었거나 지금 당장은 살아남았더라도 화염으로 인한 손상 때문에 3~5년 내에 죽을 자이언트 세쿼이아들”이라고 밝혔다. 산불로 인한 비극은 올해에만 닥친 게 아니었다. 지난해에도 최대 1만그루가 잿더미가 됐다.

주목되는 점은 지난해와 올해 산불로 자이언트 세쿼이아가 ‘소멸’을 걱정해야 할 수준에 이르렀다는 사실이다. NPS에 따르면 지구상 자이언트 세쿼이아의 최대 20%가 사라진 것이다. 한 생물의 숫자가 산불로 이렇게 짧은 시간 안에 크게 줄어든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자이언트 세쿼이아의 서식지가 매우 좁기 때문이다. 이 나무는 전 세계에서 캘리포니아주 동부의 시에라네바다산맥에서만 자란다. 이곳의 숲 70곳, 모두 합쳐 113㎢(서울시 면적의 18%)가 지구상 자이언트 세쿼이아의 보금자리다. 이 숲 가운데 27곳, 25㎢가 지난해와 올해 닥친 대형 산불에 직격탄을 맞으면서 사달이 벌어졌다. 인구 밀도가 높은 도시에 집중 폭격이 이뤄져 사상자가 대거 나오는 전쟁 같은 일이 미국의 숲에서 나타난 것이다.

지난 9월 산불이 번진 미국 캘리포니아주에서 소방대원들이 높이 84m에 줄기 지름 11m인 ‘제너럴 셔먼’이라는 이름의 자이언트 세쿼이아에 방화용 알루미늄 막을 덮고 있다. 알루미늄 막은 효과적인 방화 수단이지만, 모든 자이언트 세쿼이아를 이렇게 감쌀 수는 없어 대규모 피해가 발생했다.  미국 국립공원관리청(NPS) 제공

지난 9월 산불이 번진 미국 캘리포니아주에서 소방대원들이 높이 84m에 줄기 지름 11m인 ‘제너럴 셔먼’이라는 이름의 자이언트 세쿼이아에 방화용 알루미늄 막을 덮고 있다. 알루미늄 막은 효과적인 방화 수단이지만, 모든 자이언트 세쿼이아를 이렇게 감쌀 수는 없어 대규모 피해가 발생했다. 미국 국립공원관리청(NPS) 제공

■‘알루미늄 보호막’ 방어 한계

자이언트 세쿼이아가 특정 지역에 모여 서식해서 벌어진 일이라고는 하지만, 사실 이 나무는 불에 쉽게 당하지 않는 능력을 지녔다. 다 자라면 높이가 100m에 육박하고, 지름은 수m에 이를 정도여서 지구 대표 거목으로 꼽힌다. 웬만한 화염은 견디는데도 개체 수가 단 두 해 만에 20%나 줄었다는 건 그만큼 화염의 강도와 기간이 예사롭지 않았다는 뜻이다.

인간이 자이언트 세쿼이아를 지키기 위해 아무 일도 하지 않은 건 아니다. 올해 미국 서부 산불이 한창일 때 일부 자이언트 세쿼이아 밑동에 화염을 견디는 알루미늄 막을 두르는 작업이 이어졌다. 하지만 수만그루의 자이언트 세쿼이아를 이런 방식으로 모두 지킬 수는 없었다. 소방 당국은 장비와 인력을 최대한 투입했지만, 산불이 워낙 강하고 광범위해 피해가 불가피했다.

■ 기후변화 탓 ‘대학살’ 확대 우려

문제는 기후변화다. NPS는 보고서에서 “기후변화와 관련해 ‘연료’가 건조되는 일이 증가하고 있다”며 “종전보다 더 큰 더위가 동반되는 가뭄이 나타나고 있다”고 지적했다. 기후변화로 고온이 지속되면서 산불의 연료 격인 나무들이 불에 타기 딱 좋도록 바짝 마르는 일이 일상화하고 있다는 의미다. 번개가 떨어져 숲에서 자연발화가 일어나면 여지없이 대형 산불로 번지고 있는 것이다.

NPS는 숲에 있는 연료의 밀도를 낮춰야 한다고 강조했다. 산불 이후 생긴 잔해를 치우고, 숲에 서식하는 나무도 적절한 숫자로 관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구 온난화 방지가 속도를 내지 못한다면 ‘대학살’을 당한 자이언트 세쿼이아를 비롯해 다른 나무들도 빠른 속도로 사라질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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