꽁꽁 언 남극 해빙 밑에 '녹색 미생물 숲' 있다고?

이정호 기자
2005년 9월 인공위성에 남극 대륙과 해빙의 모습이 촬영됐다. 남극 대륙은 짙은 흰색, 바다 위의 해빙은 옅은 흰색으로 보인다.미국 항공우주국(NASA) 제공

2005년 9월 인공위성에 남극 대륙과 해빙의 모습이 촬영됐다. 남극 대륙은 짙은 흰색, 바다 위의 해빙은 옅은 흰색으로 보인다.미국 항공우주국(NASA) 제공

#해저 11㎞에 자리 잡은 자원탐사용 심해기지 내부, 기지의 시설관리 기술자인 주인공 노라 프라이스(크리스틴 스튜어트 분)는 어느 날 천장에서 물이 새는 현상을 발견한다.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던 그 순간, 갑자기 복도 벽면에서 엄청난 압력으로 바닷물이 뿜어져 나오며 기지가 붕괴되기 시작한다. 비상 대피구역으로 몸을 피한 노라와 소수의 근무자들은 생존을 위해 인근의 다른 기지로 특수 잠수복을 입고 걸어서 이동한다.

그런데 이동하던 그들 앞에 지금까지 알려진 적 없는 괴생명체가 나타난다. 엄청난 헤엄 속도와 공격성 탓에 희생자는 늘어만 간다. 2020년 개봉한 미국 영화 <언터워터> 줄거리다.

<언터워터>에서 관객의 공포를 자극하는 핵심 요소는 어두움이다. 언제, 어디서 괴생명체가 달려들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바닷물은 햇빛 가림막이다. 수심 200m만 내려가도 햇빛이 거의 닿지 않는다. 바닷속으로 한참 들어가지 않아도 어둠이 찾아오는 곳도 있다. 바닷물이 얼어서 생긴 얼음, 즉 ‘해빙’ 아래다. 두께 수m짜리 얼음이 햇빛을 튕겨내는 반사판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과학계에서 남극 바다의 해빙 밑에 식물성 플랑크톤이 번식하고 있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이상한 일이다. 해빙 밑에선 빛을 받아 광합성을 해야 살 수 있는 식물성 플랑크톤은 없을 것으로 과학계는 생각해 왔기 때문이다. 햇빛이 파고들 수 있을 정도로 남극 해빙 여기저기에 깊은 균열이 생겼다는 뜻이다.

2010년 6월 북극 주변의 아이슬란드 근처 바다에서 인공위성 카메라에 식물성 플랑크톤(녹색 얼룩)이 촬영됐다. 식물성 플랑크톤은 바다 어디든 살지만, 햇빛이 투과되지 않는 해빙 아래는 예외일 것으로 과학계는 생각했다. 그런데 최근 10여년새 북극 해빙에 이어 남극 해빙 아래에서도 식물성 플랑크톤이 발견됐다. 미국 항공우주국(NASA) 제공

2010년 6월 북극 주변의 아이슬란드 근처 바다에서 인공위성 카메라에 식물성 플랑크톤(녹색 얼룩)이 촬영됐다. 식물성 플랑크톤은 바다 어디든 살지만, 햇빛이 투과되지 않는 해빙 아래는 예외일 것으로 과학계는 생각했다. 그런데 최근 10여년새 북극 해빙에 이어 남극 해빙 아래에서도 식물성 플랑크톤이 발견됐다. 미국 항공우주국(NASA) 제공

■해빙 밑 식물성 플랑크톤 번식

미국 항공우주국(NASA)의 지원을 받는 미국과 뉴질랜드, 캐나다 과학자들은 지난달 29일(현지시간) NASA 공식 발표를 통해 남극 해빙 밑에서 식물성 플랑크톤이 번식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고 밝혔다. 깊은 바닷속 얼음 밑에 ‘녹색 미생물 숲’이 있었다는 뜻이다. 연구 결과는 국제학술지 ‘프론티어스 인 마린 사이언스’ 최신호에 실렸다.

연구진은 깊은 바닷속의 비밀을 ‘아르고 프로젝트’를 통해 알아냈다. 아르고 프로젝트는 30여개국이 참여해 2000년부터 시작된 국제 연구 프로그램이다. 전 세계 바다에 길이 124㎝, 지름 23㎝, 중량 26㎏짜리 육중한 센서인 ‘아르고 플로트’ 4000여기를 투척해 수온과 염분 등을 지속적으로 측정한다.

연구진은 아르고 플로트가 남극 바다에서 잡아낸 자료를 살펴보다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엽록소와 탄소가 감지된 것이다. 식물에서 나타나는 징후다. 자료를 추려보니 이는 2014년부터 일어난 일이었다.

연구진은 2020년까지 남극 해빙에서 포착된 2000여건의 측정치 대부분에서 식물성 플랑크톤이 감지됐고, 특히 측정치의 25%에선 식물성 플랑크톤이 다량 증식하는 ‘블룸(bloom)’ 현상이 확인됐다고 밝혔다. 연구를 주도한 크리스토퍼 호바트 오클랜드대 연구원은 NASA 발표를 통해 “남극 해빙 밑에서 식물성 플랑크톤이 자라고 있다는 것은 이번에 사상 처음으로 확인된 것”이라고 강조했다.

■남한 면적 50배 번식 가능성

식물성 플랑크톤이 생긴 동력은 두말 할 것 없이 햇빛이다. 완벽한 햇빛 반사판이었던 해빙 여기저기가 갈라지며 빛이 파고들 수 있는 균열이 생긴 것이다. 균열을 통해 해빙 밑바닥까지 들어온 햇빛이 식물성 플랑크톤의 광합성을 촉진시켜 생존과 번식을 유도한 것이다.

연구진은 NASA의 지구 관측용 위성 ‘ICESat-2’에 탑재된 레이저 고도계도 사용했다. 빛 입자를 쏘는 레이저 고도계를 쓰면 해빙 두께와 곳곳에 생긴 틈까지 알아낼 수 있다. 햇빛이 파고드는 곳을 구분할 수 있는 것이다. 연구진은 이를 통해 남극 해빙에서 식물성 플랑크톤이 잠재적으로 번식할 수 있는 면적이 300만~500만㎢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했다. 남한 넓이의 30~50배다.

식물성 플랑크톤이 번성하면 작은 해양 동물이 살기 좋아지고, 이를 먹이로 삼는 큰 해양 동물의 서식 여건도 나아진다. 연구진은 남극 해양 생태계에 변화가 나타날 것으로 추정했다.

이 변화가 긍정적일지 부정적일지는 일단 지켜봐야 할 것으로 보인다. 해빙 밑의 식물성 플랑크톤은 2011년 북극에서 처음 발견됐는데, 이때 과학계에선 걱정이 많았다. 상대적으로 덜 추운 곳에 살던 해양동물이 북극 바다 생태계로 치고 들어올 가능성이 대두됐기 때문이다. 과학계는 대구와 같은 어종을 중심으로 북극 해양 생태계를 침범하는 동물이 있는지 관찰하고 있다.

특히 햇빛이 파고들어갈 정도로 해빙에 깊은 균열이 생긴 건 온난화가 가속화되고 있다는 증거일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 우려된다. 연구진은 “남극 해빙에서 식물성 플랑크톤의 분포에 계절적인 특징이 있는지도 추가 조사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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