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창간 78주년 기획
브랜드 가치 유지 위해 재고 ‘보안 소각’
누가 얼마나 태우는지 몰라
소각량 보고하도록 해 추적 관리해야
태그가 달린 새 옷들이 철통 보안 속에 태워지고 있다. 기업은 불량품 유통, 시제품 디자인 유출, 재판매 차단 등을 ‘보안 소각’ 이유로 든다.
실제 이유는 다르다고 관련 업계와 전문가들은 말한다. 생산한 분량을 다 팔지 못했다는 사실도, 멀쩡한 옷을 태운다는 사실도 알려져서 좋을 게 없어 ‘대외비’로 태운다는 것이다.
태워지는 규모는 알 수 없다. 정부는 모르고, 기업은 숨긴다.
과잉생산된 옷들은 소각되면 대기를 오염시키고, 매립되면 땅을 더럽힌다. 유럽연합(EU)은 지난 7월 재고 소각 금지 법안을 통과시켰다. 한국은 소각량조차 추산하지 못하고 있다.
‘누구도 모르게 하라’
지난 7일 지방의 한 컨테이너 건물. 철문 앞에 3.5t 탑차가 끼익 소리를 내며 멈춰 섰다. 탑차에는 한 업체에서 파쇄를 의뢰한 ‘보안 물품’이 가득했다. 컨테이너의 문이 열리자 직원들이 물품을 건물 안으로 들여 넣기 시작했다. 작업복 뒤에는 ‘보안’이라는 글자가 선명했다. 이날 오전, 폐기를 의뢰한 업체의 지하 주차장에서 옮겨와 곧바로 폐기 작업에 들어갔다.
물품 이동부터 폐기까지 전 과정에서 철저한 ‘신속’ ‘보안’이 강조됐다. 의뢰 업체와 접촉 일시, 장소 등은 물건을 옮길 파쇄 업체 내에서도 소수에게만 공유됐다. 봉인된 물품들은 건물 안으로 옮겨진 뒤에야 박스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의뢰 업체 외에 무엇이 태워졌는지 아는 이들은 물품을 옮기고 파쇄한 보안요원 두 명 뿐이다. 작업자들이 중간중간 의뢰 업체에 보고할 용도로 인증 사진을 찍었다.
오후 3시40분쯤 물품들이 차례로 컨베이어 벨트에 올랐다. 파쇄기가 ‘웅웅’ 소리를 내며 이를 빨아들이자 곧 손바닥 절반 크기로 분쇄됐다. 건물 밖 철제 적재함에 떨어졌을 땐 업체 설명대로 “원래 무엇이었는지 알 수 없게” 된 상태였다.
‘007 작전’ 같은 보안 속에 파쇄된 물건들은 기밀문서도, 하드디스크도 아닌 ‘새 옷’들이다. 패션기업은 매년 팔리지 않은 재고를 파쇄해 소각한다. 재고 폐기는 기업에게 보관비 절약, 손실 처리를 통한 세금 보전 등 이점을 준다. 가격을 낮춰 팔거나 기부할 수도 있지만 중고가 브랜드의 경우 선호하는 방식은 아니다. “저렴한 옷을 파는 곳”이란 인식이 생겨 브랜드 가치가 떨어질 위험이 있다고 여긴다. 건축자재 등으로 재활용하면 소각할 때보다 2~10배 많은 비용이 발생한다. 태워 없애는 게 가장 손쉽고 경제적인 방법이란 뜻이다.
재고 폐기와 소각에는 환경오염이 뒤따른다. 태그도 떼지 않은 옷이 버려진다는 것 자체가 자원 낭비일 뿐만 아니라, 소각과정에서 다량의 온실가스가 배출된다. 매립지에 묻어도 분해 과정에서 메탄을 뿜어낸다. 메탄의 온실효과는 이산화탄소보다 81배 강하다.
글로벌 컨설팅 기업 ‘맥킨지앤컴퍼니’의 지난해 보고서를 보면 패션 산업은 전 세계 탄소 배출량의 3~5%를 차지한다. 국제 항공 산업(2.5%)을 넘어서는 규모다. 이 보고서는 패션 산업을 “지속가능성과 가장 거리가 먼 산업 중 하나”로 꼽고 “수십억 개의 의류가 판매되지 않거나 사용이 끝나면 매립되거나 소각된다”고 했다. 홍수열 자연순환연구소 소장은 “이런 이유로 기업이 재고 소각을 숨기는 것”이라고 말했다.
패션기업들은 재고 소각 보안 유지에 각별한 신경을 쓰고 있다. 소각·파쇄 업계 관계자들의 말을 종합하면 패션기업들은 소각·파쇄 업체에 증명서와 보안각서를 요구하거나, 본사 직원을 붙여 물품 인계서부터 소각 단계까지 전 과정을 감시한다. 본사 직원이 동행할 수 없는 경우 작업 과정을 찍은 사진을 확인한다. 이 때문에 소각장에 파쇄된 의류가 도착하면 다른 소각을 멈추고 의류만 소각하는 시스템을 구축해 보안을 유지하는 업체도 생겼다.
관계자들은 폐기 과정에서 보안 유지가 안 되면 폐기 업체가 법적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한 보안파쇄 업체 대표 A씨는 “자기 물건이 안 팔려 폐기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는 것) 자체가 브랜드 이미지 실추”라면서 “법무팀을 보내 뒷조사를 하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다른 업체 B씨도 “보안 유지 실패 시 억대의 소송을 건다”고 말했다.
누가 얼마나 버리는지도 모른다
매년 엄청난 양의 새 옷이 소각되지만 정확한 데이터는 공개된 적이 없다. 기업 스스로 밝히지 않는 데다, 환경부 역시 이를 확인할 수 있는 제도를 갖추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현행법상 기업은 하루 평균 300kg 이상의 사업장 폐기물이 발생하면 지방자치단체에 신고해야 한다. 기업이 폐기물 종류를 분류해 신고하면, 분류코드와 배출량이 한국환경공단 ‘올바로’ 시스템에 기록되는 구조다.
문제는 재고 배출에 정확한 코드가 부여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환경부 관계자는 “원칙적으로는 (재고를) 폐의류로 분류해야 하지만 폐합성수지류와 같은 소재별 코드로 배출해도 무관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A씨도 “‘재고’라는 코드 자체가 없기 때문에 폐기물처리 확인서에는 그냥 폐합성수지류로 나온다”고 말했다.
폐기물엔 각각 고유 코드가 부여된다. 폐의류 ‘512703’, 폐합성수지류 ‘510301’, 폐합성섬유 ‘512702’, 그 밖의 폐섬유 ‘512799’ 등이다. 재고 의류에는 별도로 부여되는 코드가 없어, 이 중 무엇으로 등록해도 문제가 없다. 현행 제도대로라면 기업이 재고를 폐의류 대신 폐합성수지류로 분류해 다른 플라스틱 쓰레기들과 섞어내면서 재고 소각 규모를 감춰도 확인할 수 없다.
일례로 경향신문이 김태선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을 통해 입수한 한국환경공단 ‘올바로’ 자료를 보면 코오롱은 2023년 기준으로 최근 5년간 137만5413t의 폐합성섬유와 폐합성수지류를 배출했다. 그해 71개 섬유패션 상장기업 중 가장 많은 수치다. 같은 기간 코오롱이 신고한 폐의류 배출량은 ‘0’이다. 코오롱 관계자가 기자에게 “3년이 지난 재고들은 소각된다”고 밝힌 데 비춰보면 재고 의류들은 다른 플라스틱 폐기물과 섞여 폐합성수지류 등으로 신고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에 따라 재고 소각량은 특정할 수 없다. 코오롱측은 연간 재고량과 소각 비율을 묻자 “대외비라 말할 수 없다”고 답했다.
코오롱 측은 경향신문 보도 후 “코오롱인더스트리 중 패션 부문은 의류폐기물을 협력 업체를 통해 폐기부터 신고까지 마치고 있다”며 “재고 배출 규모는 매년 30~40t, 5년간 140t 정도”라고 알려왔다.
코오롱뿐만 아니라 태광, 삼성물산 등 다른 기업들도 재고 소각량을 묻는 말에 “말할 수 없다”고 답하거나 취재에 응하지 않았다. 소각량을 폐의류로 정확하게 표시한 곳은 71개 기업 중 단 세 곳 뿐이었다. 세 곳 중 하나인 한섬 관계자는 “거의 모든 기업이 재고를 소각하고 있는 걸로 알고 있다”면서 “아마도 소각량을 특정하지 못하게끔 (다른 코드로 배출)한 것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한 해에 새 옷이 얼마나 폐기되는지는 알 수 없지만, 패션기업이 ‘의류물’을 얼마나 버리는지는 추정할 수 있다. 같은 자료에 따르면 71개 패션의류 상장기업이 최근 5년 동안 배출한 폐의류, 폐합성섬유, 폐합성수지류, 그 밖의 폐의류는 총 214만2057t이다. 의류와 관련된 폐기물이 한 해 42만t 이상 배출된다는 의미다. 사업장 폐기물이 하루 평균 300kg 미만으로 나오는 업체는 신고 대상이 아닌 점을 고려하면, 패션기업이 태우는 의류물은 이를 웃돌 것으로 보인다.
소규모 업장 소각량도 추적 어려워
소규모 업장에서 배출해 태우는 옷들 역시 추적이 어렵다. 영세한 봉제 공장에서 나오는 원단 자투리들은 일명 ‘개미’로 불리는 무허가 개인 수거업자들이 트럭으로 실어다 태우는데, 이 역시 신고 대상이 아니다. 환경부와 구청 관계자들은 폐지 수거인에게 세금을 물리지 않듯, 영세 업자들을 지원하는 취지에서 이같은 활동을 관리하지는 않는다고 설명했다.
지난달 30일 오전 7시50분쯤, 서울 상월곡동 한 골목에서도 개미를 찾을 수 있었다. 파란색 트럭이 도로변에 멈추자, 등교하는 학생 몇 명만이 지나다니던 골목이 금세 분주해졌다. 트럭에서 내린 남성은 ‘미싱사 모집’이라고 적힌 지하 건물로 들어갔다. 5분 뒤, 남성은 어깨에 노란색 마대 자루를 지고 트럭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옷감으로 가득 찬 자루는 성인 남성 몸통보다 컸다. 이들이 ‘개미’로 불리는 이유를 추정할 수 있는 장면이다.
포대가 2층 높이로 쌓이자, 그는 길 건너 100m 앞 다른 건물로 차를 옮겼다. 이곳은 간판이 없어 밖에서 볼 땐 공장이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는 공장 직원이 주는 믹스커피 한 잔을 마신 뒤, 고리가 달린 낫 모양의 도구를 사용해 포대를 낚아 머리 위로 쌓았다. 공장 세 곳을 들르자 마대 높이가 키보다 높게 쌓였다.
노란 마대로 가득 찬 트럭은 오전 10시쯤 내부순환로 방향으로 사라졌다. 이렇게 수거된 옷감은 대부분 소각장에서 태워진다. 이들은 지자체를 거치지 않고 공장과 직접 계약하고, 점조직처럼 퍼져 있어 그 수를 추정하기 어렵다. 최근까지 봉제 공장을 운영했다는 재활용업체 대표 C씨는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대략 100명 정도 남아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개미의 수도, 개미를 통해 태우는 옷의 양도 추정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소각량 추적 관리해야”
전문가들은 사용되지 않은 옷이 얼마나 태워지는지 확인할 수 있게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고 말한다. 홍 소장은 “패스트패션 소비 문제는 공론화가 됐는데, 생산 단계에서 만들어지는 재고 쓰레기 문제도 함께 봐야 한다”면서 “얼마나 태우는지를 알아야 태우지 말라고 얘기할 수 있는데 한국은 실태조차 모르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기업이 재고 의류를 얼마나 폐기하고 있는지 매년 실적을 보고하도록 법을 개정해야 한다고도 했다. 또 생산자책임재활용제도(EPR) 적용 대상에 의류를 포함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EPR은 생산자에게 직접적으로 재활용 의무를 부여하는 제도다. 타이어, 전지류, 포장재 등이 적용대상인데 의류는 빠져있다. 홍 소장은 “재활용 의무를 부여해야 기업도 경각심을 가지고, 환경부도 관리 책임을 느낄 것”이라고 말했다.
유럽연합(EU)은 이미 지난 7월 재고를 폐기하지 못하도록 하는 제도를 도입했다. 유럽 신성장 전략 ‘그린 딜’의 하나로 제시된 ‘에코디자인 규정’에 따라 2026년부터 판매되지 않은 직물 및 신발 폐기를 직접적으로 금지하는 게 골자다. 재고 수량과 처리 내용을 보고도록 하는 규정은 내년부터 의무화한다.
정주연 다시입다연구소 대표는 “현행 자원순환기본법은 폐기물관리법상의 폐기물 중 순환자원으로 인정받은 폐기물만을 제도의 적용 대상으로 보고 있다”면서 “의류 재고도 적용 대상임을 명확하게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김태선 의원은 “기업 이미지 제고만을 생각해 멀쩡한 옷을 몰래 소각하는 것은 비윤리적이고 자원낭비와 환경파괴 면에서도 큰 문제”라면서 “손 놓고 있는 정부도 기업이 생산, 소비, 재고처리 과정에서 사회적 책임을 다할 수 있도록 역할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 의원은 이어 “국회에서 ‘의류 재고 폐기 금지법’ 법안 발의 등의 방안을 적극 모색하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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