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고려하지 않은 기후정책 ‘한계’ 지역주민들부터 변해야 지속 가능”

강연주 기자

텀블러를 넘어서

“커피는 제 텀블러(다회용컵)에 담아주세요.”

기후위기는 개인의 삶을 어떻게 바꿔놓고 있을까. 일상에서 체감하는 변화 중 하나는 텀블러 사용자가 많아졌다는 것이다. 일회용 플라스틱 컵 사용을 줄이기 위해 개인 텀블러를 들고 카페에 가는 사람들을 이제는 흔하게 볼 수 있다. 실제 스타벅스코리아가 개인컵 이용 고객의 혜택을 강화한 지난달 13일 이후 2주간 고객들의 텀블러 이용률을 조사해 보니 전년 동기 대비 60% 증가했다. 제주에서는 도 차원에서 텀블러 사용을 확대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제주도는 지난해 11월30일 본청과 출자·출연 기관 내부에서 일회용품 사용을 금지한다고 밝혔다. 제주대학교와 도내 개인 사업장에서는 ‘일회용품 대신 텀블러 사용’ 운동이 확산되고 있다. 텀블러 사용 등 개인의 일상적인 실천으로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방식을 넘어 아예 환경을 중심에 두고 삶의 경로를 바꾸거나, 가치관을 새롭게 세운 청년들이 있다. 경향신문 신년기획 ‘탄소중립 제주, 미리 가 본 미래’ 7화에서 이런 청년들을 소개한다. 국제협력단체 활동과 기업체의 입사 제안을 뿌리치고 귀농해 ‘지역 환경 활동’을 펼치는 스물아홉 살 청년, ‘환경 정치’로 세상을 바꾸겠다며 지방선거 출마를 선언한 열아홉 살 청년, 그리고 호주에서 발생한 대형산불로 ‘환경 공부’를 시작한 스물다섯 살 대학생이 그 주인공이다.


신년기획 7회 텀블러를 넘어서. 제주농부 김민희. 김영민 기자

신년기획 7회 텀블러를 넘어서. 제주농부 김민희. 김영민 기자

■제주로 귀농해 지역활동 펼치는 김민희씨

해녀·농부들 증언 듣고 심각성 알아…친환경 농사 지으며 현장 목소리 지자체에 전하는 가교 역할
채식 커뮤니티 만들고 청년들과 지역 문제 토론하며 “작은 변화가 큰 파도 만들어”

로컬

전에는 밭일이 싫었다. ‘지긋지긋한 밭 따위 다 팔아버려야지’ 생각한 적도 있다. 주변의 다른 제주도 청년들처럼 제주를 벗어나 성공한 뒤 금의환향하겠다는 포부도 품었다. 김민희씨(29)는 그렇게 3년 전 고향인 제주를 떠나 서울살이를 시작했다. 평소 꿈이었던 국제협력단체에 들어가 일하고, 그사이 한 외국 무역회사에서 입사 제의까지 받았다. 그런 그가 지난해 3월 2년여 만에 ‘농부가 되겠다’며 다시 제주도로 돌아왔다. 방학만 되면 감귤을 따야 하고, 크리스마스 같은 남들 노는 날에도 일해야 해서 밭일을 유독 싫어하던 그였다.

서울에서 보낸 2년 사이 김씨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서귀포시 하례리에 있는 김씨의 지역 활동 사무실에서 이야기를 들어봤다. 덖은 찻잎이 담긴 텀블러에 뜨거운 물을 부으며 김씨가 말했다.

제주농부 김민희(29)씨는 녹색연합이 2019년 11월 7일에 주최한 '기후변화의 증인들' 간담회를 인생의 전환점이자 귀농을 결심한 계기로 꼽는다. 사진은 김씨가 간담회 내용을 들으면서 수첩에 기록해놨던 당시의 다짐이다. '기후변에 대해서 일해보자', '가장 많이 알게 된 것은 '기후변화'' 등이 적혔다.

제주농부 김민희(29)씨는 녹색연합이 2019년 11월 7일에 주최한 '기후변화의 증인들' 간담회를 인생의 전환점이자 귀농을 결심한 계기로 꼽는다. 사진은 김씨가 간담회 내용을 들으면서 수첩에 기록해놨던 당시의 다짐이다. '기후변에 대해서 일해보자', '가장 많이 알게 된 것은 '기후변화'' 등이 적혔다.

“원래 환경에 대한 관심이 많은 편은 아니었어요. 막연하게 ‘기후위기가 심각하다’는 문제를 인식했을 정도라고 할까요. 그러다 2019년 11월 국제협력 업무의 연장선으로 녹색연합이 주최한 ‘기후변화의 증인들’이라는 간담회를 접했어요. 농부, 해녀 등 다양한 분들이 ‘증인’으로 참석해서 기후변화로 인한 각자의 상황을 하나하나 말씀하셨어요. ‘제주 바다서 흔히 보이던 해조류들이 이젠 많이 사라졌다’ ‘제주 바다의 갯녹음(바다의 사막화) 현상이 심각하다’ ‘더 이상 사과 농사를 짓지 못할까 두렵다’… 말씀들을 쭉 듣는데 기분이 너무 이상한 거예요. 바로 저희 가족 얘기이기도 했거든요.”

해녀 할머니와 농부 부모 아래서 나고 자란 김씨. 참가자들은 물질하던 내 할머니의 바다, 밭일하는 내 부모의 일터가 조용히 사라지고 있다고 증언했다. ‘올해 유독 병충해가 많고, 농약이 잘 안 듣더라’ ‘지난여름에 비가 너무 많이 와 밀감이 다 떨어졌다’던 부모님 말씀이 머리를 스쳤다. 흘려들었던 어른들 말씀이 퍼즐처럼 하나둘씩 맞춰졌다. 아마존 열대우림에서나 발생하는 줄 알았던 기후위기가 자신이 나고 자란 땅에서 해일처럼 현실로 다가왔다.

“기후변화에 대해서 일해보자.” 간담회 직후, 김씨는 수첩에 짤막한 다짐을 적었다. 간담회는 김씨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 “기후변화를 최대한 늦추기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작은 일부터 찾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내린 답은 제 정체성이 담긴 제주, 그리고 농업에 있었고요. 결정은 어렵지 않았어요. 오히려 서울에 남아있을 때는 제가 할 수 있는 게 잘 보이지 않아서 무력했거든요. 저는 수도권이 아니라 지역을 중심으로 기후위기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를 고민하고 싶었어요.”

김씨가 귀농해 만든 지역 청년 활동 공간 ‘브로컬리 연구소’에서 청년들이 연주회 준비를 하고 있다.

김씨가 귀농해 만든 지역 청년 활동 공간 ‘브로컬리 연구소’에서 청년들이 연주회 준비를 하고 있다.

귀농을 결심한 이후 김씨는 약 1년간 경기 군포시에 있는 농업학교를 오가며 앞으로 어떤 농업을 하고 싶은지 구체화했다. 그리고 지난해 3월 고향으로 돌아오자마자 감귤밭을 일구기 시작했다. 목표는 ‘지속 가능한 환경친화적 농업’이다. 이를 위해 농약, 화학비료 등의 사용을 줄이는 등 자연을 해치지 않고 탄소배출량을 최소화해서 먹거리를 생산하고 있다.

“농사를 짓다 보니 정부가 이 분야에서 펼치는 탄소중립 정책이 눈에 밟히기 시작했어요. 기후위기의 대안이 ‘탄소중립’이라는 것에도, 이를 위해 농업 부문 탄소배출량을 줄여야 한다는 것에도 동의해요. 그래서 저도 최대한 자연에 해를 끼치지 않는 방식으로 농업을 해보려고 하고요. 다만 지금의 정책은 지역별 특성을 충분히 고려하지도, 지역민들을 충분히 설득하지도 못했다고 생각해요. 정부는 2050년까지 탄소중립 정책을 이행하겠다지만, 정작 현장에 있는 농부들 가운데 이 정책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은 손꼽을 수 있을 만큼 적거든요. 저는 지역민들이 먼저 변화의 필요성을 인지하고 그 안에서 새로운 시도를 모색하는 게 모든 기후위기, 탄소중립 정책의 시작이라고 생각해요.”

지역의 변화를 이끌기 위해 김씨는 지역민들과 함께 다양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먼저 정치와 지역 현장의 간극을 줄이기 위해 도의원과 현장을 연결하는 일을 배우고 있다. 지역 청년 혹은 농부들의 목소리가 지방자치단체의 정책에 반영되도록 가교 역할을 하는 것이다. 지역민들과 비건 커뮤니티도 운영한다. 김씨는 채식이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실천적인 활동이라고 말한다.

동네 청년들과 지역 문제에 대해 토론하고 지역에서 새로운 시도를 해보기 위해 ‘브로컬리 연구소(BE LOCALLY LAB)’라는 지역 청년 활동 공간도 차렸다. 지역의 청년들이 각자가 갖고 있는 콘텐츠(재능)를 활용하는 장이기도 하다. 비건이나 음식 만들기에 관심이 있는 지역 청년들이 합심해 연구소에서 팝업(임시) 가게를 열기도 했고, 서귀포 문화도시센터와 협업해 지역 음악가들과 마을을 연결해주기 위한 작은 공연도 펼쳤다. “청년들이 제주를 떠나는 이유 중 하나가 이곳에서 향유할 수 있는 문화가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어요. 문화생활이 곳곳에 널려 있는 도시와 달리 지방은 즐길 거리가 없으니까요. 그래서 소비만 하는 문화가 아니라 지역 청년들이 함께 직접 문화를 생산해보는 작당소를 만든 거죠. 지역의 변화를 이끌어내려면 앞으로 지역을 이끌어갈 저희 청년들이 재미있게 먹고살 수 있어야 하니까요.”

김씨는 기후위기라는 시급한 문제에 대응하기 위해 신속한 집행이 가능한 ‘톱다운(하향)식’의 정책을 추진하는 게 맞을지 혹은 조금 느리게 가더라도 지역의 합의를 반영해서 정책을 추진하는 게 맞을지에 대해 고민해본 적이 있다. 김씨는 “어려운 문제지만, 장기적인 관점에서는 결국 지역의 합의로 문제를 풀어나갈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됐다”고 말했다. “지역 생태계를 고려하지 않은 정책은 상당한 갈등을 야기할 수 있어요. 논밭, 감귤밭 위에 설치한 태양광 패널이 그 예라고 생각해요. 이건 농업의 생태계를 해칠 수 있는 정책이거든요. 주민들의 충분한 합의가 뒷받침되지 않은 정책은 지역의 지속 가능성을 위협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김씨는 자신의 선택이 당장 기후위기를 막지는 못해도, 변화의 시작점을 찍는 움직임이라고 믿는다. 탄소중립 시대, 지역을 더욱 지속 가능한 공간으로 만들면서 농민을 비롯한 기후변화 당사자들의 목소리를 키우고 싶다. “제가 하는 다양한 활동들은 환경이라는 큰 틀로 묶을 수 있어요. 이렇게 지역에서 작은 변화들이 시작된다면 기후위기라는 큰 문제도 조금씩 해결되지 않을까요. 함께 만드는 변화가 더 큰 파도를 만들어낼 거라고 생각해요.”

사진 김영민 기자

사진 김영민 기자

■환경 정치로 세상을 바꾸겠다는 이건웅씨

“미래세대 생존 문제 더 이상 어른에게만 맡길 수는 없어요”

정치

강정마을 시위 참여 계기로
친구들과 환경운동 시작했지만
제2공항 착공 등 여론과 달리
개발 강행하는 지자체 보며
‘정치로 제도 바꿔야겠다’ 결심
올해 지방선거 출마 선언해

지금 정책은 기후위기 부추겨
제주다움 해치는 난개발 등 문제
정책 중심에 ‘환경보호’ 둬야

김민희씨의 감귤 밭에서 차로 약 40분 거리에 있는 서귀포 표선면에는 오는 6월 지방선거에 출마하려는 청년 이건웅씨(18)가 살고 있다. 올해 고등학교를 졸업한 만 열아홉 청년은 어쩌다 험한 정치판에 뛰어들기로 결심했을까. 그는 “난개발과 기후위기 문제 때문”이라고 단언했다.

“제가 사는 표선읍은 제주의 여러 지역 중에서도 유독 제2공항 건설에 대한 찬성의견이 압도적으로 많아요. 인근 성산읍에 제2공항이 들어서면 여기는 관광객이 늘어 수혜지역이 되니까요. 저희 부모님도 찬성하세요.”

부모와 이씨의 입장이 갈린 잣대는 ‘환경’이었다. “제2공항이 들어서게 되면 나무와 같은 탄소흡수원은 줄고, 항공기에서 나오는 탄소배출량은 배로 증가하게 됩니다. 제주도가 2030년까지 ‘탄소 배출 없는 섬’을 만들겠다고 선언해놓고서 새로운 공항을 짓는다는 것은 앞뒤가 안 맞는 정책이라고 생각해요.”

처음부터 이씨가 개발에 비판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집 근처가 개발되면 언젠가 우리 동네에도 영화관이 들어서지 않을까’ 내심 기대한 적도 있다. 그러나 마냥 좋아하기에는 잃는 것들이 눈에 띌 만큼 늘어갔다. 친구들과 뛰어놀던 대나무숲은 모두 밀려 도로로 변했고, 놀이터는 주차장으로 바뀌었다. 3~4층짜리 건물이 곳곳에 들어서면서 집 인근 논밭들도 하나둘씩 사라졌다. 집 앞 2차선 도로가 4차선으로 확장될 때 이씨의 집도 허물어야 했다. “재건축 대상이 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이사를 가야 했어요. 당시 여덟 살이었지만, 집 주변이 생각보다 빠르게 변화하는 것을 보면서 의문이 쌓이게 됐어요.”

‘환경 정치’를 위해 올해 지방선거 출마를 선언한 청년 이건웅씨의 노트북에 제주녹색당 활동 등 환경운동의 자취를 볼 수 있는 스티커들이 붙어 있다.

‘환경 정치’를 위해 올해 지방선거 출마를 선언한 청년 이건웅씨의 노트북에 제주녹색당 활동 등 환경운동의 자취를 볼 수 있는 스티커들이 붙어 있다.

2016년 봄, 이씨는 삶의 전환점을 맞이했다.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 착공 뉴스를 뒤늦게 접하면서부터다. “막연히 ‘강정마을 주민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는 생각에 5박6일을 걷는 평화대행진 일정에 참여했어요. 이후 2019년까지 4년 내내 대행진 현장에 참가했는데 그곳에서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 밀양 송전탑 피해 주민, 사드(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 부대 지역 주민 등 다양한 사회 현안의 당사자들을 만났어요.” 이렇게 사회문제를 조금씩 알아갈 즈음, 현장에서 인연이 닿아 2019년 5월 제주 녹색당에 입당했다.

‘학생 환경운동가’로의 첫발은 녹색당 입당 이후 본격적으로 내디뎠다. ‘미래를 살아가야 하는 건 우리 청소년들인데, 왜 어른들은 우리한테 아무것도 묻지도, 들으려 하지도 않을까’ 이 물음에 공감한 친구들과 청소년 환경단체 ‘우리도 제주도’를 결성했다. “제주도를 더 이상 어른들에게만 맡길 수 없다”며 친구들과 함께 기자회견을 열고, 비자림로 확장공사·동물테마파크 등의 난개발로 인한 환경파괴를 비판했다. 도청 관계자들을 직접 만나 제2공항 사업 중단을 요구한 적도 있다. 더 많은 친구들에게 환경문제를 알리기 위해 토크콘서트도 열었다.

그러나 열심히 활동할수록 답답한 마음도 커져갔다. 정작 변화는 더뎠기 때문이다. “저는 환경보호를 최우선으로 생각하지만 어른들은 환경을 파괴하고 개발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생각해요. 지금의 정치가 그런 것 같아요. 제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과 어른들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좀 달라보여요.” 교복 조끼에 달린 ‘SAVE THE JEJU(제주를 지키자)’ ‘그대로가 아름다워’ 등의 문구가 적힌 배지 50여개를 바라보며 이씨가 말했다.

올해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씨의 교복 조끼에 환경보호, 인권옹호 등의 의미가 담긴 배지 50여개가 빼곡하게 달려 있다.

올해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씨의 교복 조끼에 환경보호, 인권옹호 등의 의미가 담긴 배지 50여개가 빼곡하게 달려 있다.

도민의 여론과 달리 개발을 강행하는 지방자치단체의 행태를 목격하면서 이씨는 무력감이 극에 달했다고 한다. “지난해 2월이었어요. 제주도민을 대상으로 제2공항 착공 찬반 여론조사를 했는데 ‘반대’ 의견이 상대적으로 높게 나왔어요. 그런데도 원희룡 전 제주도지사는 그다음 달 기자회견을 열고 사업 강행 의사를 공식화했어요. 많은 주민들의 반대가 결정권자의 말 한마디에 고꾸라지는 느낌이었어요. 이런 상황이 답답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목표가 분명해지는 계기가 됐어요. 내가 나고 자란 제주의 모습을 지키려면 무슨 일이 있어도 저 자리(정치권)에 가야겠구나 싶었어요.”

이씨는 현장의 힘을 믿는다. 제도권으로 들어가 현장의 목소리가 묻히지 않도록 돕는 것이 지금 이씨가 바라는 것이다. “현장의 활동가들이 있었기에 그나마 지금의 생태계가 보존될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다만 환경을 좀 더 실질적으로 보호하기 위해서는 정책 시스템을 바꿔야겠죠. 그래야 많은 변화가 따라올 테니까요. 전 환경보호를 말하는 현장의 목소리를 정책에 담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지금의 정책은 기후위기를 부추기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어요.”

개발과 환경은 서로 엇나갈 수밖에 없는 걸까. 개발로 이뤄지는 지역의 발전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자 이씨는 “막연히 모든 개발을 비판한다기보다 ‘제주다움’을 해치는 개발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에너지를 쓰지 말자는 게 아니에요. 재생에너지로 에너지를 전환하고, 탄소배출량 높은 석탄화력발전소는 줄여나가자는 거죠. 발전을 비판만 하는 것도 아니에요. 지금처럼 생태계를 밀어내고 그 위에 건물을 올리는 개발에만 집중할 게 아니라 이제는 환경을 지키고 보호할 수 있도록 기술을 활용하자는 거죠. 정책의 중심에 환경보호를 놓고 생각하자는 거예요.”

‘사람과 자연이 공존하는 청정 제주’. 이씨는 제주도가 내세운 슬로건 그대로의 미래를 꿈꾼다. “이전보다 지구 기온이 1.5도 높아질 때까지 남은 시간이 7년정도밖에 안 남았대요. 저희 세대에게 기후위기는 생존의 문제라고 생각해요. 물론 정치가 모든 것을 해결해주지는 않겠지만 환경을 보호하기 위한 인프라는 조금이라도 빠르게 마련해줄 수 있다고 봐요. 더 늦기 전에 지금의 정책에 환경보호를 강조하는 목소리를 반영하고 싶어요.”

사진 박민규 기자

사진 박민규 기자

■호주 산불 계기로 ‘환경공부’ 시작한 이우윤씨

“환경문제 배울수록 일상과 접점 많아져 변화 가능성 커지죠”

교육

호주 산불 피해 직접 겪으며
이상기후 궁금증 생겼지만
제대로 알려주는 곳 많지 않아

귀국 후 기후변화청년모임 찾아
에너지 전환 정책 배우고 논의
환경교육, 따로 시간 할애해야지만
배울수록 내 삶과 연결고리 생겨

환경문제와 삶의 방향 다르지만
일과 기후변화 접목해보고 싶어

공대생 이우윤씨(25)는 수도권 1기 신도시인 경기 성남시 분당에서 자란 ‘도시 토박이’다. 딱히 기후위기를 내 일이라고 생각해본 적 없이 자랐다. 청소년 때는 물론 대학에서도 환경에 관한 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정보기술(IT) 업계에 취업하는 것을 목표로 준비하고 있는 만큼 앞으로의 삶도 환경이나 기후위기 문제와는 그리 가까울 것 같지 않았다. 카페에서 텀블러를 사용하는 것 정도로 막연하게 환경을 보호해야겠다는 의무감을 채웠다. 이씨의 말에 의하면 ‘환경보호에 대한 무관심과 관심의 경계’에 서 있는 정도였다.

그런 그에게 2019년 9월 발생한 ‘호주 산불’은 커다란 충격이었다. 2019년부터 1년간 워킹홀리데이를 위해 호주 시드니에 머물렀던 이씨는 사상 최악으로 꼽히는 호주 산불 사태를 직접 겪었다. 호주 남동부에서 발생한 산불이 이씨가 사는 곳으로부터 차로 30여분 거리까지 번져왔기 때문이다. 한국의 국토 면적보다 넓은 10만㎢ 땅을 태운 뒤 6개월 만에 진화된 산불이다. 당시 시드니의 공기 상태는 매일 37개비의 담배를 피우는 것과 맞먹을 정도로 악화됐던 것으로 알려졌다.

“시드니 전역에 짙은 노란색 필터를 씌운 것 같았어요. 대기는 미세먼지가 짙게 낀 날처럼 뿌옇고, 피부로 느껴지는 온도도 평상시보다 덥고 건조했어요. 조금만 외곽으로 나가도 타는 냄새가 진동했어요. 바람 타고 넘어온 잿가루도 보였고요. 2~3주 정도 이런 상태가 지속됐어요. 산불 인근 지역에서는 이런 현상이 더 지속됐다고 하더라고요. 무서웠어요. 이 도시까지 불길이 번지는 것 아닌가 하는 위기감도 들었죠.”

이우윤씨가 대형 산불이 발생한 지 3개월 정도 지난 2019년 12월 호주 시드니 도심을 촬영한 사진. 시드니 하늘은 연기와 재로 인해 2~3주간 짙은 노란빛을 띠었다.

이우윤씨가 대형 산불이 발생한 지 3개월 정도 지난 2019년 12월 호주 시드니 도심을 촬영한 사진. 시드니 하늘은 연기와 재로 인해 2~3주간 짙은 노란빛을 띠었다.

이씨는 산불이 장기화한 이유가 기후변화 때문이라는 전문가들의 분석을 현지에서 뉴스로 접했다. ‘이게 진짜 기후위기의 시작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피부로 와닿기 시작했다. “날씨가 이례적으로 기온이 높고 건조해지면서 산불을 끄기 어려워졌다고 하더라고요. 게다가 기후변화는 남반구부터 찾아온다고 했어요. 호주의 산불이 훗날 전 지구에서 발생할지 모르는 셈이지요. 왜 이런 이상기후 현상이 발생하는 건지, 해결 방법은 무엇인지 좀 더 폭넓게 알고 싶었어요.”

하지만 배우고 싶다는 마음과 달리 궁금증을 해소해줄 수 있는 곳이 마땅찮았다. 이씨는 “기후변화에 대해 조금 더 알고 싶었지만, 다니고 있던 (국내) 대학을 비롯해 어느 교육기관에서도 이를 제대로 알려주는 곳이 없었다”고 했다. 학교 내 환경교육을 의무화한 이탈리아나 스코틀랜드와 달리 한국은 환경 교육을 선택 교과로 미뤄두고 있다. 그나마 이루어지는 교육도 전문성이 미비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현재 전국 중·고등학교에서 환경 과목을 가르치는 교사는 모두 111명으로 전체 중·고등학교 교원 대비 0.04% 수준이다. 그나마 이 중에서도 환경 교원 자격증이 있는 사람은 42명에 불과하다.

교육의 공백만큼 기후위기에 대한 공론도 제한적이다. 이씨는 “환경에 대한 얘기를 주변에 먼저 꺼내면 스스로가 유난 떠는 느낌이 들어 되레 위축된다”고 토로했다. “나 요즘 환경과 관련한 이런 기사를 보고 있다, 이렇게 말하면 주변에서는 그냥 ‘대단한데’ 이러고 말아버려요. 아마 호주를 가지 않았더라면 제 삶에도 ‘환경’은 없었을 것 같아요. 어떠한 접점도 없었으니까요. 마치 남 일 같은 거죠.”

2020년 1월 이씨가 시드니 외곽을 방문해 찍은 사진에는 숲 전체가 새까맣게 타버려 황폐해진 모습이 보인다.

2020년 1월 이씨가 시드니 외곽을 방문해 찍은 사진에는 숲 전체가 새까맣게 타버려 황폐해진 모습이 보인다.

이씨는 호주 산불 사태를 목격한 이듬해인 2020년 3월, 한국으로 돌아와 기후변화청년모임 ‘빅웨이브’의 문을 두드렸다. 빅웨이브는 20대 청년들이 주축이 되어 만든 환경단체다. 이씨는 “어떤 활동을 하려는 것보다는 부족한 정보를 채우고, 이곳에서 환경에 대해 함께 대화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빅웨이브에서 보낸 6개월 동안 이씨는 단체 활동가들과 저널리즘 스터디를 하면서 기후위기와 관련된 기사를 보고 정리하거나, 주·월간별로 팀원들과 동향을 나눴다. 단체 활동의 일환으로 탄소를 줄이기 위한 ‘에너지 전환’ 정책에는 무엇이 있을지 배우고 논의했다.

그린피스 소속 기후·환경 전문가를 만나 탄소중립에 대해 직접 묻고 듣는 기회도 있었다. 문재인 정부가 국제사회에 ‘2050년 탄소중립’을 선언한 것은 그 이후의 일이다. 이씨는 “당시 발표된 정부의 탄소중립 정책을 그간 배운 것들을 바탕으로 훨씬 수월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며 “정책과 내 삶에 연결고리가 생기게 된 느낌이었다”고 말했다.

현재 이씨는 학업과 취업준비 문제로 단체에서의 활동을 중단한 상태다. 환경에 대해 조금 더 배워보고 싶었지만, 현실적인 여건상 쉽지가 않았다고 했다. 아직까지 이씨에게 환경문제는 자신과 방향성이 다른, 그래서 따로 시간을 할애해야 하는 분야다.

그럼에도 일련의 경험들은 이씨의 삶에 작지만 뚜렷한 변화를 남겼다. 이씨는 자신이 취직을 원하는 IT 업계가 막대한 양의 전력을 사용하면서 상당한 온실가스를 배출한다는 것을 배웠다. 이를 계기로 취업하고 싶은 기업을 고를 때 기후변화에 대해 어느 정도의 문제의식을 갖고 있는지, 어떤 대안을 갖췄는지를 고려하게 됐다. 자신의 분야와 기후변화 문제를 접목시켜 보고 싶다는 새로운 목표도 세웠다.

만일 이씨가 어릴 적부터 환경에 대한 교육을 받았더라면 삶은 바뀌었을까. 이씨가 말했다. “적어도 기후변화를 지금보다 더 민감하게 받아들였을 것 같아요. 배우고 공부할수록 기후변화가 좀 더 가까이에 있는 느낌을 받았거든요. 내 주변 사람들과 함께 환경문제에 관심을 갖고 알아보게 되니까 좀 더 내 일처럼 느껴지기도 했고요. 저는 환경단체에서의 교육을 통해 제 분야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시각과 가치관을 가질 수 있었어요. 이런 변화를 곳곳에서 만들어내려면 환경과 일상 간의 접점이 더 만들어져야 하지 않을까요. 교육이 기후변화에 대한 무관심과 관심의 간극을 좁힐 수 있는 첫 단계라고 생각해요.”

[탄소중립 제주, 미리 가 본 미래⑦]“현장 고려하지 않은 기후정책 ‘한계’ 지역주민들부터 변해야 지속 가능”

특별취재팀 강연주 강윤중 권도현 김한슬 박미라 박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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