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고, 감동하고, 희구하고, 전율하며 살라.’
김용택 시인은 한때 조각가 오귀스트 로댕의 이 말을 벽에 붙여놓고 매일 같이 음미했다고 했다. 자신이 가르쳤던 아이들이 늘 세상을 새로워했던 것처럼 우리도 삶을, 사랑을 그렇게 느껴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김 시인에게는, 또 우리에게는 ‘사랑’이나 ‘시’ ‘문학’ 같은 거창한 말보다는 ‘일상’과 ‘삶’을 새롭게 채워나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했다.
경향신문 연례기획 ‘심리톡톡 시즌2-사랑에 관하여’ 3월 강연에서는 ‘섬진강 시인’으로 불리는 김용택 시인이 ‘뭐 할라고 결혼하냐’라는 주제로 삶과 사랑에 대한 통찰을 들려줬다. 지난 23일 서울 정동 경향신문사에서 열린 강연에서 김 시인은 자신의 시 ‘그 여자네 집’에 얽힌 첫사랑 얘기부터 시작해 부부 생활을 늘 새롭고 신비롭고 감동적으로 채워가는 방법에 까지 ‘68년간 준비한’ 이야기를 풀어놨다. 김 시인의 강연을 요약해 소개한다.
■ 아직도 또렷이 기억하는 ‘그 여자네 집’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자리니까, 초등학교 때 겪었던 일부터 시작해서 우선 ‘그 여자네 집’이라는 제 시에 얽힌 얘기부터 할게요.
제가 태어난 곳은 전북 임실군 덕치면입니다. 면 소재지에서 5㎞ 더 들어가면 진뫼마을이라는 조그만 마을이 있어요. 옛날에는 35가구까지 살았는데, 지금은 10가구 정도 삽니다. 저는 그 마을에서 나고 자랐어요. 마을에서 40분쯤을 걸으면 초등학교가 있는데 걸어서 거길 다녔지요.
제가 4학년 때 우리 동네의 한 여성을 좋아했습니다. 같은 학년의 같은 반이었는데 나이는 저보다 4살이나 더 먹어서 열여섯이었지요. 저희 큰어머니가 13살 때 시집을 오던 시절이었으니 나이가 꽤 많았는데, 제가 굉장히 좋아했지요. 우리 반이 여덟 명이었는데, 다른 남학생과 같이 걸어가는 꼴을 못 봤어요. 운동회가 되면 반드시 내 편이 돼야 했죠. 그 여성과 같이 살고 아기까지 낳는 꿈까지 꿀 정도였어요.
5학년 때 소풍을 가는데, 당시에는 도시락을 사서 30~40리 길을 걸었어요. 그런데 앞서 가던 그 여성이 언덕 밑으로 나를 불렀어요. 손에다 뭘 하나 쥐어주고 갔는데, 나중에 봤더니 동전이었지요. 그 여성이 징표를 줬다고 생각했어요. 오랫동안 간직했습니다. 당시에는 그게 뭔지 몰랐는데 중학생이 돼서 알고 보니 미화 동전이었어요. 1센트인가 됐던 것 같습니다. 그 시골에 어떻게 미화가 있었는지는 지금도 의문이에요.
6학년 때인가 정월대보름에 동네에서 밤새워 농악을 할 때였어요. 한밤에 어떤 사람이 내 손을 잡고 끌고 가길래 봤더니 그 여자인 거예요. 가슴이 두근두근했습니다. 그 여성이 저를 골방으로 데려가더니, 여자 한복을 딱 입히는 겁니다. 고깔을 딱 씌우고 꽃띠를 둘러줬어요. 그러고는 농악 마당에다 저를 풀어주고 무동춤을 추게 했지요. 그게 그 여자와 마지막 추억이었습니다. 철이 들어서는 어느새 그 여성을 잊어버렸지요. 그게 처음으로 느낀 사랑의 감정이었습니다. 내용도 근거도 없지만, 한 인간에게 한 여성이 다가온, 오랫동안 뇌리에 남아 있는 첫사랑이었습니다.
저는 순창농림고를 졸업하고 덕치초등학교 선생이 됐습니다. 졸업한 학교의 선생이 된 셈인데, 그때가 스물두 살이었죠. 어느 날 퇴근을 하는데, 11월쯤이었습니다. 벼가 다 베어진 들판 끝에 배추밭이 하나 있는데, 어떤 여자가 배추를 뽑아서 소쿠리에 이고 서리 낀 들판을 가로질러 오는 겁니다. 빨간 스웨터에 월남치마를 입고 양 갈래로 머리를 땋았는데, 꼭 나한테 다가오는 것 같았어요. 퍽 긴장이 됐는데, 나를 휙 지나쳐 가는 겁니다. 웃을 리가 없었겠지만, 언뜻 날 보고 웃은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쪽니가 딱 보였는데, 반해버렸죠. 알고 보니 이웃마을 처녀였어요. 편지를 썼습니다. 옛날에 저희들이 여자와 사귈 때는 편지를 많이 썼는데, 정말 끝도 없이 편지를 썼지요. 저도 편지를 굉장히 많이 썼는데, 옛날에는 아명을 많이 지어 썼어요. 편지에서 내 이름은 ‘준’이었습니다.(웃음)
눈이 많이 오는 크리스마스 무렵인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그 여자에게 물방울무늬 스카프를 선물했습니다. 이런 시시콜콜한 것까지 기억이 나는 걸 보면, 연애는 정말 잘 해야 해요. 이듬해 봄, 보리걷이가 끝난 밭에 가설극장이 들어왔지요. 포장을 치고 영화를 상영하는 거죠. 우연히 거길 갔는데, 그 여자가 거기 있었습니다. 발전기로 낸 불빛 밑에 처녀 여럿이 앉아 있었는데 그렇게 예쁠 수가 없었어요. 둘이 사귀기 시작했지요. 학교에서 운동회를 하면 화장을 한 그 여자가 파라솔을 끼고 친구들하고 코스모스 핀 신작로를 걸어와서 운동장에 들어오던 모습이 기억나네요.
둘이 참 좋아했죠. 그 여자는 친구들과 동네에 놀러 와서 내가 집에서 책을 보고 앉아 있으면 작은 돌멩이를 창문에다 던졌지요. ‘어 왔구나’ 하고 문을 열면 들어왔어요. 이불을 깔고 여럿이서 발을 덮고 있으면 발을 더듬어서 그 여자 발을 찾기도 하고. 옛날에는 손을 못 잡으니까, 손잡기까지도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리기도 했어요. 그런 수준 정도의 사랑이었는데. 어느 날 그녀가 사라져버렸어요. 1974~75년쯤 됐던 거 같은데. 그때는 농촌 인구가 급속도로 도시로 유입되던 시절이어서 따라가 버린 거죠. 그러고 오랜 세월이 흘러서 ‘그 여자네 집’이란 시를 썼습니다. 교과서에도 실려 있는 시인데, 사람들이 많이 좋아해줬고 저도 읽을 때마다 그때 기억이 또렷하게 나는 시예요.
제 아내도 그 시를 봤어요. 제가 가끔 놀리기도 해요. 시 중에 살구꽃이니 은행나무니 하는 풍경들이 나오는데, 제가 “그 여자네 집 살구꽃은 아직도 그렇게 이뻐”라고 그러면 아내가 “저 썩을 놈의 살구나무 베어버려야 한다”고 하죠.(웃음) 우리 마을과 그 여자가 살았던 마을 중간에 그 여자와 자주 만났던 느티나무도 있었어요. 어느 날 그 느티나무가 죽어가길래 “저 느티나무 왜 죽어가지” 하니까, 아내가 “진작 죽어야 할 나무”라고 말하기도 했지요.(웃음)
그런데 세월이 참 많이 흘렀지요. 지난번에 병원에 갈 일이 있어서 갔다가 전화를 하고 있는데 30대 중반의 여성이 옆에 서 있었어요. 전화 끊고 나서 ‘누구냐’ 했더니 ‘그 여자네 집 딸’이라고 했어요. 꼭 엄마를 닮아서 참 이쁘다, 그랬어요.
■ 부부, 공부하고 고치고 바꾸는 ‘인생 학교’
제가 결혼을 늦게 했습니다. 초·중·고 때는 교과서 외에 못 봤는데, 뒤늦게 책을 읽다 보니 너무 재미있었어요. 책을 읽다 보면 생각이 정말 많이 났고, 그걸 쓰다 보니 글을 쓰게 됐지요. 정신이 없었습니다. 제가 연애 감정이 좀 무뎠어요. 책에 빠져 살다 보니 어느덧 35살이었습니다. 결혼은 생각도 안 해 봤어요. 결혼을 하면 공부하는데, 책을 보는데 방해가 될 것 같았습니다. 월급은 정말 적었고, 집안에도 돈이 풍족하지 못해서 결혼을 하면 아기를 낳고 돈이 들 테니 책을 못 살 것 같았어요. 그래서 결혼에 대한 생각을 안 해 봤습니다.
그때 당시 제가 세 가지 소원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멸치볶음을 가지고 소풍을 가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한 번도 집에서 멸치를 먹은 기억이 없어요. 좀 잘 사는 집에서는 소풍가는 날 멸치볶음 반찬을 가져오기도 했는데 그게 너무 맛있는 겁니다. 요즘도 국에다 멸치를 넣잖아요. 그걸 안 건져내고 대가리까지 다 씹어 먹습니다. 멸치가 국물에 싹 풀려도 그렇게 맛있습니다. 인제 멸치 소원은 다 풀린 거죠.
또 하나 소원은 돈 생각 않고 담배를 사 피우는 거였어요. 십 몇 년 동안 담배를 외상으로 사 피웠거든요. 한 달 내 외상으로 피우고 월급날 갚는 거죠. 그러니 너무 담배 허기가 진 거예요. 제발 돈 좀 생각 않고 담배를 맘대로 사 피웠으면 하는 게 소원이었어요. 지금도 가끔 그 외상으로 담배를 사던 점빵(가게)에서 담배를 외상으로 사는 꿈을 꿉니다. 깜짝 놀라죠. ‘아직도 그것이 해결이 안 됐는가?’ 싶어서. 지금은 담배를 끊었다 안 피운지 20년 됐습니다.
마지막 소원은 책이었어요. 돈 생각 않고 책을 마음껏 사보고 싶었습니다. 월급도 적은데다 동생이 다섯 명이나 돼서 책 사 보는 게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습니다. 방학이 되면 전주에 가서 헌책을 한 가득 사서 터미널까지 간 뒤에 버스를 타고 왔어요. 정거장에서 내리면 우리 집까지 또 30분을 걸어야 했어요. 그래서 정거장에 미리 지게를 갖다 뒀어요. 버스에서 내리면 책을 지게에 짊어지고 성큼성큼 걸어서 집으로 갔지요. 주로 헌책을 샀지만, 책도 외상으로 사 본 터라 1995년에야 책 외상도 다 갚았습니다. 월급 타면 동생을 나눠 준 뒤에 책도 순번을 1번, 2번 정해 두고 사 모았습니다.
그러다보니까 연애를 한다든가 여자를 만나는 일이 없었어요. 책을 읽기 시작한 지 13년 만에 문단에 나왔습니다. 문단에 나가도 삶이 변하는 건 없었습니다. 떼돈 버는 것도 아니고 출세하는 것도 아니고. 책 외상은 더 늘었어요. 조금씩 유명해지긴 했지요. 지금은 소설 쓰는 김훈씨가 당시 한국일보에 크게 내버린 거야. 그래서 당시 민주화 운동의 일환으로 진행됐던 문화운동 패들이 자주 제가 사는 곳에 놀러오기도 했어요.
1983년인가 됐을 때인데, 시집 <섬진강>을 내기 전에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옛날에는 부모가 돌아가시면 1년 후에 탈상을 했는데, 탈상하고 제사를 지내는 날 문상 온 사람들 중에 여학생 두 명도 있었지요. 그 중에 한 여자가 계속 내 옆에 앉아 있는 거예요. 나중에 보니 셋째 동생과 같은 국문과 학생이었어. 탈상을 하고 전주에 갔는데 또 그 여학생이 내 옆에 있는 거야. 동생이 졸업한다고 해서 졸업식날 갔는데 그 여학생이 학사모를 쓰고 서 있는 모습이 그렇게 예뻤어요. 같이 사진을 찍었는데, 그 사진이 아직도 있어요.
졸업을 하고 보리가 좀 자랐나, 3월 중순 쯤에 그 여학생이 밤중에 우리 집에 혼자 온 거야. 굉장히 혼냈어요. 여자 혼자 그 외진 길을 30분을 걸어와야 하거든. 그 후에도 한 달쯤 오더니 할 말이 있대. 해 봐라 그랬더니 “선생님 저랑 같이 살면 안돼요?” 그래요. 제가 화를 냈죠. 나이차가 너무 나잖아요. 그런데 다음 주에 또 와서 계속 그 얘기를 하는 거야.
그렇게 해서 결혼식을 했는데 하기 전에 아기를 먼저 낳았어요. 아기가 컸을 때 결혼식을 했어요. 집이 너무 가난하잖아요. 물을 길어다가 밥을 해야 하고, 불을 때서 밥을 해야 돼요. 연기가 얼마나 나. 빨래도 냇가에 가서 해야 돼요. 그 겨울 추운데. 세탁기가 어디 있어. 진짜 고생을 많이 한 것 같아요. 차츰차츰 살림이 늘어나고 동생들 결혼 다 시키고 돈도 좀 모으고 살았죠.
결혼은 준비를 해서 하는 게 아니잖아요. 기본적으로 제가 생각한 건 아내 말을 잘 듣자는 거였습니다. “여보, 양말을 까서 뒤집어서 놔” 그러면 다음부턴 그런 일이 없었어요. 아내 말을 한 1년 들었는데, 나를 다 고치고 바꿔버렸어요. 이 세상에서 가장 많이 빡세게 공부하고 고칠 수 있는 학교는 부부 밖에 없습니다. 서로 고치고 맞춰서 공동생활 할 수밖에 없어요. 모든 걸 싫든 좋든 고치고 바꿔야 합니다. 그래서 공부가 필요하죠. 공부가 안 이뤄지면 끊임없이 싸우게 됩니다. 공부라는 것이 꼭 책을 읽고 하는 게 아닙니다. 삶 속에서 자기를 고치고 바꿔서 맞추는 겁니다. 피나는 노력이 필요한 거죠.
집에서 하는 여러 가지 일들을 전부 아내 위주로 맞춰서 해요. 반찬도 절대 다 못 내놓게 합니다. 메인 요리, 닭볶음탕 같은 게 있으면 그것만 먹어요. 아내가 아침에 일어나서 허리 한 번 더 굽혀야 할 일이 너무 많습니다. 사람들이 아무 것도 안 하는 것 같은데, 별 게 다 어질러져 있어요. 물컵이 곳곳에 있고, 신문이나 과일껍질 별 게 다 흩어져 있어요. 저는 빨래통까지 다 정리를 합니다.
지금까지 아내 생일이나 결혼기념일 이벤트를 한 번도 한 적이 없어요. 이런 걸 한 번도 챙겨주지 않았다는 것은 평소에 잘했다는 겁니다. 평소에 한 인간한테, 같은 집 울타리 안에 사는 사람의 인격을 존중해 주는 거예요. 지금도 마찬가집니다. 그 사람의 일상을 존중합니다. 이벤트가 아니라, 집안에서 일상을 존중하는 삶이 중요해요.
■ 서로에게 늘 새로운 사람이 되는 법
저는 굉장히 오랫동안 부부간에 잘 산 편입니다. 그런데 세월이 가고 보면 애정이 메말라 버리죠. 습관이 되고 버릇이 돼서. 젊은 청춘시절의 사랑과 애정은 식을 수밖에 없어요. 그러면 인제 우리가 너무 싫어하고 괴로워하는 ‘의무’로 살아야 하는 겁니다. 자식들 때문에 같이 산다고 하게 되는 거죠. 우리가 처음에 여자를, 남자를 알게 될 때는 서로에게 신비로움을 느낍니다. 늘 새로움을 얻게 됩니다. 새로움 속에서 사는 것이고, 새롭기 때문에 사는 겁니다. 새롭기 때문에 신비롭고, 신비롭기 때문에 감동하면서 사는 겁니다. 사랑은 감동입니다. 감동은 느끼고 스며들어서 내 생각과 행동을 바꿔줍니다. 부부든, 사회든, 경제든, 정치든 삶의 모든 요소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늘 새롭고, 신비롭고, 감동적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야 삶에 활기가 차서 행복하게 사는 거죠.
인간이라는 게 옛날에는 50살 되면 다 끝났어요. 요즘은, 제가 예순여덟 살을 먹었고, 이미 정년이 6~7년 지났어요. 우리는 100년을 살고, 우리 자식들은 120년을 살게 됐습니다. 정년퇴직 하고 나면 살 날이 40년이 되는 거죠. 이 인생을 늙어죽을 때까지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50년 동안 사랑한 아내를 또 30년 동안 더 사랑할 수 있을까 의심이 들 수밖에요. 제가 그래서, 가지고 온 주제가 ‘뭐 할라고 결혼하냐’ 이겁니다. 사실 사랑 문제처럼 복잡한 게 없습니다.
부부간에 살면서, 새롭고 신비로워야 하죠. 초등학교 선생하면서 애들한테 배운 것이 애들은 늘 세상이 새롭다는 겁니다. 다 새것이니, 재밌고, 지칠 줄을 모릅니다. 다 새로우니까요. 새로우니 얼마나 세상이 신비롭겠습니까. 신비로우니 심심한 것도 없습니다. 신비롭기 때문에 감동하고, 자기를 끊임없이 고치고 바꿔갑니다. 또 고치고 바꿔가야 새로워지죠.
부부간에도 이렇게 늘 새로움을 느낄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첫째, 공부입니다. 제가 살아오면서 정말 잘했다는 게 몇 가지가 있어요. 하나는 끊임없이 공부하고 책을 보는 것입니다. 아내도 그랬습니다. 아내는 신문을 좋아합니다. 집에 신문을 경향신문을 포함해 세 종류 받아보는데 주로 사설, 칼럼, 그리고 인터뷰 기사를 봅니다. 인터뷰 기사가 정말 중요해요. 다 보고 나서 인터넷에 들어가면 신문이 쭉 뜨죠. 중요한 신문을 가서 또 사설, 칼럼, 인터뷰 기사를 또 다 봅니다. 나만 읽으면 재미없으니 안 사람과 같이 읽습니다. 이렇게 새로운 것을 얻기 때문에, 또 새로워지는 겁니다. 할 얘기가 많아지죠. 신문을 10년 보면 우리가 사는 세상의 전문가가 됩니다. 둘이 같이 보면, 똑같은 사안을 보고 싸울 때도 있고, 공감이 될 때도 있습니다. 정말 균형감각이 있는 글들은 아들과 딸한테도 보내주기도 하죠. 식구들이 같은 기사, 같은 지식을 공유하는 겁니다.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내가 새로워지고, 새로워지기 때문에 신비로움을 느낄 수 있고, 얘기가 통하고, 소통이 이뤄집니다. 이건 정말 아름다운 소통입니다. 부부간에 오랫동안 같이 얘기를 하다 보면, 놀랍게도 얘기가 너무 높아집니다. 이제는 신문을 안 보면 안 되는 것이고, 공부를 안 하면 안 되는 거죠. 새로움을 느끼면, 신비롭고, 또 그러다 보면 감동하는 말들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공부를 하는 겁니다.
또 하나는, 예술적 감성을 놓치지 않는 건데요. 아내는 결혼해서 끊임없이 미술관을 다녔습니다. 중요한 전시는 서울까지 가서 보기도 했지요. 계속해서 그림을 보고 음악을 듣고, 예술 생활을 가까이 하다 보니, 그림 자체는 별로 안 중요해집니다. 고흐나 피카소 그림이 꼭 좋은 게 아니예요. 더 좋은, 아름다운 그림이 많아요. 그렇게 둘이 오랫동안 그림을 보다 보면 또 세상이 다 그림이 됩니다. 어떤 여자가 앉아 있으면, 남자가 앉아 있으면 그게 다 그림이 되죠. 이 순간을 잡으면 그림이 된다, 삶이 예술이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삶 속에서 구체적이고, 실질적이고 일상적인 것이 예술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술의 눈을 통해서 보면 새로운 겁니다. 예술 자체가 늘 새로운 것이잖아요.
한 번은 아는 사람이 그림 전시를 한다고 해서 갔더니 하나 마음에 드는 것이 있었어요. 작가를 불러서 사겠다고 해 놓고, 아내한테 내가 사고 싶었던 그림이 있는데 한 번 찾아보라고 했어요. 그런데 놀랍게도 나하고 똑같았어요. 그게 너무 신비로운 거야. 너무나 행복했습니다. 그 그림을 사 놓고 2주일 동안 그림 때문에 너무 행복했습니다. 신비하죠? 신비롭습니다. 아무 것도 아닌 게 재미있습니다.
우리 딸이 학교를 다니는데, 방학이 되면 딸하고 인터뷰를 했어요. 1학기 동안에 어떻게 삶을 살았는가, 정신적으로 어떤 면이 성숙했는가, 이런 걸 묻는 거죠. 요샌 누구를 만나냐, 기왕이면 돈 많은 남자가 좋다, 이런 얘기도 하고요.(웃음) 딸이 3학년 때쯤 돼서 물어본 게 하고 싶은 공부지만 그렇게 고생하면서 공부를 하는데, 포기하지 않도록 너를 지켜준 게 무엇이었냐고 물었어요. 딸이 너무 힘들게 공부를 하면서 살았거든요. 몇 가지를 얘기했는데, 그중 한 가지가 엄마, 아빠가 다정하게 밥을 먹는 것을 봤다는 얘기를 하는 거예요. 그 모습을 보면서 엄마, 아빠가 행복하게 사는 구나 그걸 느꼈고, 내가 잘못되면 저것이 깨지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그래서 버티고 견뎠다고요. 놀라운 힘이죠. 그래서 마지막으로 제가 하고 싶은 얘기는, 이따금이라도 부부 간에 저녁에 앉아서 애들이 보는 데서 밥을 먹었으면 하는 거예요. 그게 가정을 지키는 힘이 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아이들에게 행복의 맛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러면 애들이 커서 행복을 만들고, 찾고, 창조하는 것이죠.
저는 그런 생각을 합니다. 순전히 개인적이고, 사소하고, 별 볼 일 없는 삶이라는 것이 사랑이라는 거대하고 말하기 힘든, 논하기 힘든 것을 만나서 인생을 살아가게 되는데, 다시 또 보면 사랑이란 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일상적이고 구체적인 삶 속에서 아내한테, 남편한테 늘 새롭고 신비로움을 느끼고 서로서로 감동을 느끼면서 사는 거죠. 그리고 자기를 고치고, 바꾸고, 맞춰서 살아가는 것이 부부간의 삶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 청중과의 질의응답
-결혼하시면서 많이 바꿨다고 말씀하셨는데, 생활적인 부분 외에 마음이나 생각이나 영혼도 바꾸셔야 했을 것 같아요. 어렵고, 힘들게 바꾼 마음이나 생각은 무엇입니까?
“그런 것이 왜 없겠어요. 있는데, 제가 얘기한다 해도 질문하신 분의 삶과 다른 얘기가 돼요. 그건 스스로 겪고 극복해 나갈 수밖에 없는 것이지, 제게 질문할 건 아닌 것 같습니다. 스스로에게 할 질문인 것 같아요.”
-아들이 결혼을 해야 하는데, 사랑을 알면 여자를 알면 인생을 알면 얼마나 알겠냐는 생각이 들어요. 이리 가면 빨리 행복해질 것 같은데, 샛길로 빠지려고 하거든요. 이럴 때는 제 주장하고 아들 고집하고 어느 정도 선에서 해야 합니까.
“그건 절대 선이 없어요. 그냥 아들 하는 대로 두세요. 자식을 못 이기잖아요. 아버님이 안고 있는 사고방식이 나쁘다, 틀렸다, 잘못됐다는 게 아닙니다. 아버님이 가진 그 테두리는 우리 어른들이 갖고 있는 상식적인 거죠. 다 아시겠지만 절대 내 맘대로 자식들이 안 됩니다. 아이가 이 여자를 선택하면 정말 그 여자를 좋아해주면 되는 겁니다. 잘 살도록 가꿔주고 키워주는 게 부모가 할 일입니다. 미리 정해놓고, 그건 있을 수가 없는 일이죠. 나이가 스무 살 서른 살 넘으면 자기 일은 다 알아서 해야 하는 거죠. 끊임없이 자식을 믿어주면 됩니다. 믿어주세요.”
-선생님은 인터뷰에서 “저기 꽃이 피었다고 말해주는 게 시인의 역할”이라고 하신 적이 있습니다. 젊은이들이 각박한 현실이나 절망 속에서 희망의 싹을 본다든가 행복한 마음을 가지려고 마음을 추스르려 할 때 어떤 게 필요할까요.
“어려운 질문입니다. 일단 우리가 오래 산다는 걸 생각해볼 필요가 있어요. 우리 어머님들은 60세까지라고 생각했는데, 우리 아들딸은 100년, 120년을 삽니다. 잘 안 맞는 거죠. 저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젊은이들에게 방황하는 시간을 줘야 한다, 고민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절망하고 좌절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실패를 하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사랑에 실패가 없으면 사랑이 커지질 않습니다. 불어나질 않아요. 실패가 있어야 하고, 버림받아봐야 하는 거죠. 그래야 사랑이 뭔가를 아는 거죠. 절망하고 좌절하고 고민하고 고뇌하는 시간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삶이 튼튼해집니다. 그러면서 자기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찾아야 합니다. 좋아하면 열심히 하고, 열심히 하면 잘하죠. 이 이상은 없습니다. 이 이상은 행복할 수 없습니다. 새롭고 신비로운 삶을 살려면, 좋아하는 삶을 살라는 거죠. 마흔 살까지 방황하는 게 어떻겠나 싶은데, 그렇다고 그냥 놀면 안 되는 겁니다. 있는 힘을 다해서 좋아하는 걸 찾아야죠. 열심히 찾아서 마흔이 됐는데 10년이 지나도 50살이에요. 살 날이 50년이나 남았어요. 물론 꼭 그렇지는 않더라도 그런 삶의 방황이 외로움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죠. 그걸 빼먹고 살기 때문에 우리 삶이 허술합니다. 배가 뒤집어지는 것도 사실은 허술한 삶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말이 로댕의 말입니다. ‘사랑하고, 감동하고, 희구하고, 전율하며 살라’ 제가 이 말을 벽에다 매일 붙여놓고 살았습니다.”
-선생님의 시는 주옥 같은 것들이 많은데 찰나에 생각하시는 것인지, 많은 고난과 산고 끝에 나오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시라는 게 아무 것도 아니거든요 말장난이잖아요. 한편의 시를 쓰려면 뼈를 깎는 아픔과 피를 말리는 고통이 기다리고 있다는 말들을 하는 데요. 저는 시가 중요하지가 않습니다. 시를 써 보려고 한 적이 없습니다. 시인이 되려고 해 본 적이 없습니다. 책을 읽다 보니까 생각이 많이 났고, 쓰다 보니까 어느 날 시를 쓰고 있어서 깜짝 놀랐습니다. 저는 시가 중요하지 않고 사는 게 더 중요했습니다. 재밌고, 즐겁고, 행복하게 사는 게 중요한 것이죠. 시보다 삶이 중요해서 살다가 보면 어느 날 시가 문득 써져요. 기묘하죠? 어느 날 문득 시가 써지는 거예요. 더 신비로운 건 시를 한 번 쓰면 계속 써지는 거예요. 삶이 모여서 고민과 고뇌가 되겠죠. 그러다가 어떤 단어가 생각나면, 글을 씁니다. 지금도 몇 개월 동안에 30편은 써 놨어요. 물론 취할 것도 버릴 것도 있겠죠. 사는 게 글이 되고 시가 되는 겁니다. 아내가 말하면 그 말 갖다 쓰고 딸이 말하면 그걸 갖다 쓰고, 그게 시가 됩니다. 시가 어느 날 느닷없이 와서 몇 달간 쓰고, 또 잊어버리고 놀아요. 시 때문에 고민하고 고뇌한 적이 없습니다. 시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시는 삶을 도와주는 것이고, 삶을 가꿔주는 것이죠. 사람들이 시만 쫓다 보면, 시를 위한 시 문학을 위한 문학을 하게 되는 것이죠. 저는 시가 안 써져도 한 번도 불행한 적이 없었어요. 잘 안 써지면 이런 생각을 하죠. 어느 날에는 시를 정말 잘 쓸 걸? 그러면 언제 또 시가 써 지겠죠. 시가 잘 안 써지더라도 그게 나고, 그 수준이 나에요. 시를 잘 썼다 못 썼다 그게 없어요. 그게 내 삶이기 때문에. 그래서 저는 뼈를 깎거나 피를 말린 적이 없습니다. 늘 시를 쓰면 좋고 행복하죠. 정말 어떻게 좋은 시가 써질 때면 온 세상이 용서가 되고 너그러워져요. 놀랍게도 며칠 안 가지만.(웃음)”
-배움의 중요성을 강조하셨는데, 선생님은 좋은 책을 어떻게 선별하시나요?
“저는 자기 분야에 대한 책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책방에 가면 문학은 15%도 안 됩니다. 다 사람들이 자기 분야에 대해서 글을 쓰고 살죠. 글을 쓰는 사람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자세히 보는 사람입니다. 자세히 보면 생각이 나고 생각이 나면 그걸 쓰면 되죠. 글을 쓰다 보면 자기가 하는 일이 더 자세히 보이고, 자세히 보이면 자기가 하는 일을 더 잘하게 됩니다. 그게 책이 돼서 나오는 거죠. 글이란 삶을 도와주는 것입니다. 남의 글을 읽어도 나를 돕는 것이고 내 글을 써도 나를 돕는 겁니다.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한 전문서적이 필요하고 끊임없이 공부가 돼야 하는 거죠. 삶이 공부가 돼야 합니다. 직장생활 30년 하고 나면 써먹을 게 없잖아요. 그러면 안 되고 살아가는 게 공부가 돼야 합니다. 자기 전공분야에 대한 전문적 공부가 우선 돼야 합니다. 그렇게 책을 읽다 보면 그 분야와 인접해있는 책이 눈에 들어오겠죠. 나중에는 철학을 공부하게 될 거란 생각이 듭니다. 모든 공부가 끝에 가면 철학과 닿게 돼 있어요. 철학이야말로 삶을 풍요롭게 풍부하게 가꿔주는 밑바탕이 됩니다. 철학이 있다, 없다는 결국 바탕이 없다는 소리죠. 결국은 자기 분야 전공을 깊게 공부하다 보면 철학을 공부하게 되고, 다시 전문분야를 강하게 해 주는 겁니다. 첼리스트 장한나씨의 스승이 장한나씨가 마흔 살이 됐을 때 하버드 철학과에 가도록 권유했지요. 가지고 태어난 천재성은 40살까지는 다 써먹으니, 그 이후에는 철학이 필요하다고 했다는 겁니다.”
■ 너는 지금 길이 없는 산 앞에 서 있다
강연을 마무리하겠습니다. 강연을 듣는다는 일은 사실 기분 나쁜 일입니다. ‘지가 알면 얼마나 알겠어’ 하게 되는 거죠. 약간 도움은 되겠지만 자기 삶은 사랑이든, 인생이든, 직장이든 뭐든 자기 스스로 새롭게 개척해 나가는 일이란 생각입니다.
제가 아들, 딸에게 늘 하는 소리가 있습니다. ‘너는 지금 길이 없는 산 앞에 서 있다’는 것이죠. 인생에도 길 없다, 사랑에도 길 없다, 절대 없다, 가보라는 거죠. 길이 없는 산에 들어가서 길을 내면서 가라, 가시덩쿨이 있을 것이고, 절벽이 있을 것이고, 낭떠러지도 있을 겁니다. 호랑이가 나타날 수도 있고 길이 끊길 수도 있습니다. 그 길을 스스로 찾아가는 게 인생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해 봅니다.
젊은 청춘들에게는 이 얘기를 해 주고 싶습니다. (손에 컵을 쥐고) 우리가 손에 이걸 쥐고 있으면 이것만 내 것입니다. (컵을 책상 위에 놓으며) 손에서 딱 놓으면 세상이 다 내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청춘은 세상이 다 내 것이 될 때 청춘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큰 산 같은 사람들이 되세요. 큰 산같이 한 번 커 보세요.
<황경상 기자 yellowpig@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