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28세 때 논설위원 입사 이어령

정리 | 박주연 기자

칼럼 ‘여적’ 맡아 암울한 세상과 소통…날 키운 건 8할이 ‘경향’

경향신문은 창간 70주년을 맞아 ‘특별한 재회’를 마련했다. ‘경향’의 한지붕 아래서 신문을 제작하며 고락을 함께한 경향사람들과의 지면을 통한 만남이다. 이들은 경향신문 70년의 토대이자 밑동이 된 언론인들이다. 20대 논설위원이었던 이어령은 단평 칼럼 ‘여적’을 통해 세상과의 창을 열었고, 현역 최고령 문인으로 건재한 작가 최일남은 예리한 문체로 시대를 담아내며 활자를 누볐다. 초대 편집국장인 횡보 염상섭을 비롯해 ‘불놀이’의 시인 주요한, 시인 구상, 소설가 김동리 등 한국 문단의 중심에 섰던 작가 출신의 기자들과 데스크, ‘한국 언론의 사표’로 불린 언론인 송건호가 경향신문 70년을 만든 사람들이다.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은 이승만 정권과 박정희 군사정부가 가장 두려워하며 눈엣가시로 여긴 경향신문에서 ‘여적’과 에세이를 쓸 때가 인생의 최고 전성기였다고 회고했다. 경향신문 파리특파원이기도 했던 이 전 장관이 지난해 12월24일 서울 종로구 평창동 자택에서 책을 읽고 있다. 박주연 기자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은 이승만 정권과 박정희 군사정부가 가장 두려워하며 눈엣가시로 여긴 경향신문에서 ‘여적’과 에세이를 쓸 때가 인생의 최고 전성기였다고 회고했다. 경향신문 파리특파원이기도 했던 이 전 장관이 지난해 12월24일 서울 종로구 평창동 자택에서 책을 읽고 있다. 박주연 기자

내가 경향신문에 처음 출근한 것은 1962년이다. 당시 경향신문 이준구 사장이 ‘여적(餘滴)’의 새 필자로 나를 영입했다. 직책은 논설위원이었다. 당시 경향신문은 대표적 야당지로, 자유당 독재정권을 향한 날선 비판을 멈추지 않았다. 이승만 정부가 가장 두려워한 존재였다.

이전까지 주요한 선생이 담당해온 ‘여적’은 국민의 가슴에 민주화의 횃불을 밝혀온 단평 칼럼난이었다. 특히 부정선거라는 다수의 폭정(暴政)은 혁명을 불러올 것이라며 자유당 독재를 통렬하게 꾸짖은 필화사건으로 경향신문이 폐간당하면서, 이 나라 자유언론의 험난한 역사를 증거했다. ‘여적’의 경고대로 자유당 정권은 이듬해 4·19 혁명으로 무너졌다. 작은 칼럼 하나가 지닌 혜안과 파괴력이 세상을 바꾼 셈이다. 이 같은 전통을 지닌 ‘여적’ 집필을 맡게 됐으니, 내 마음가짐도 남달랐다. 어떤 외압이 와도 ‘여적’의 이름과 전통에 누가 되지 않도록 곡필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내가 중앙일간지 논설위원으로 칼럼을 연재한 것이 경향신문이 처음은 아니었다. 앞서 서울신문과 한국일보의 논설위원을 거쳤다. 시작은 서울신문이었다. 4·19 당시 분노한 시민들은 8·15 광복 이후 정부·여당의 기관지 역할을 해온 서울신문의 태평로 사옥을 불태웠다. 직후 서울신문 사장으로 영입된 석천(昔泉) 오종식 선생께서 신문 논조를 개혁하기 위해 나를 특채했다. 오 선생은 내가 4년 전 한국일보에 발표해 문단에 일대 파란을 일으킨 ‘우상의 파괴’에 깊은 인상을 받았던 것 같다. ‘우상의 파괴’는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당대 문인들에 대한 신랄한 비판 글이었다. 평단에 데뷔한 지 얼마 안 된 26세의 새내기를 논설위원으로 발탁한다는 것은 상식 밖의 일이라, 반발도 컸다. 나는 ‘삼각주’라는 고정란을 만들어 칼럼니스트로서 첫발을 내디뎠다. 평판을 얻자 한국일보 장기영 사장이 스카우트를 해 간판 칼럼이던 ‘메아리’의 집필자가 됐다. 5·16 이후인 1962년에는 경향신문으로 옮겨 ‘여적’을 쓰게 됐다.

1963년 경향신문에 연재한 글을 묶어 대한민국 최초의 베스트셀러가 된 이어령의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외국어로도 번역돼 각광을 받았다.

1963년 경향신문에 연재한 글을 묶어 대한민국 최초의 베스트셀러가 된 이어령의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외국어로도 번역돼 각광을 받았다.

당시 경향신문 사옥은 서울 소공동에 위치했다. 논설위원실에는 훗날 한국 언론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인물이 여러 명 있었다. 주필은 박상일씨였다. 그때는 거친 갱지 위에 줄이 쳐진 원고지와 펜대를 사용했다. 펜대에 펜촉을 끼운 후 잉크를 찍어 칼럼을 썼다. 나는 마감시간 10분을 겨우 남겨놓고서야 ‘여적’을 쓰기 시작했다. 그 전까지는 빈둥대며 남들이 바둑 두는 것을 기웃거리거나 담배를 피우면서 딴짓을 했다. 마감시간까지 어떤 사건이 터질지 모르는 데다, 발등에 불이 떨어져야 뇌기능이 빠르게 회전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오늘을 사는 세대’ ‘흙 속에 저 바람 속에-이것이 한국이다’ 등과 같은 에세이도 매일 연재했으니 항상 마감시간에 쫓겼다. 윤전기가 돌아가고 있는 와중에 식자공이 내 앞에 대기하고 있다가 원고지를 한 장씩 쓸 때마다 받아들고 뛰었다.

칼럼이 인기를 끌면서 1964년엔 세계일주 기회도 생겼다. 이준구 사장이 일종의 포상으로 비행기 티켓을 끊어줬다. 덕분에 해외여행이 자유롭지 않던 시절 각국을 돌아다니며 ‘바람이 불어오는 곳-이것이 서양이다’라는 에세이를 썼다. 경향신문에 연재된 모든 에세이에는 백인수 화백의 뛰어난 삽화가 곁들여졌다. 경향신문에 연재한 에세이가 모두 책으로 출간되면서 베스트셀러, 밀리언셀러, 스테디셀러의 기록을 세우게 된 것은 개인의 명예가 아니라 선배·동료들의 피와 땀의 결실이라고 생각한다.

불행하게도 그 시기는 군사정부의 강압통치가 팽배할 때였다. 정부는 삼엄한 감시와 통제로 언론에 재갈을 물리려 했다. 그런 혹독한 시대에 ‘여적’과 같은 칼럼을 쓰는 일은 살얼음판을 걷듯, 높이 걸린 외줄 위에서 곡예를 타듯, 어렵고 아슬아슬했다. 그럼에도 경향신문은 비판적 논조를 유지했다. 군사정부는 1964년 6·3 계엄 선포 후 경향신문 사장과 기자들을 반공법 위반 혐의로 기소했다. ‘여적’에 실린 글 역시 도마에 올라 송건호 논설위원과 함께 고초를 겪었다. ‘여적’에 실린 100편이 넘는 글이 중앙정보부의 조사대상에 올라 연일 불려가 신문을 받게 된 것이다. 당시 송 논설위원과 내가 아침마다 불려가 취조를 받은 곳은 명보극장 뒤에 있었던 허름한 양옥집이었다. 저명인사·사상범 등은 여기서 신문을 당했다. 덩치가 산만 한 요원이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앉은 철제의자는 삐거덕거리고, 옆방에서는 구타 소리와 비명이 들려왔다.

눈엣가시 같은 경향신문 강탈이 목적이었던 그들은 내게 “이준구 사장이 시켜서 썼다”고 말하기를 강요했다. 나는 “여보쇼. 나 살자고 사장이 시켜서 썼다고 하면 글쓰는 사람이 뭐가 되겠소. 나더러 영혼을 팔라는 것이오? 그러면 나는 평생을 마음의 감옥에 갇혀 살 텐데, 말 같지 않은 소리 집어치우시오”라며 버텼다.

점심으로 그들은 자장면을 시켜줬다. 하지만 한 가닥도 목구멍으로 넘길 수 없었다. 반면 까장까장한 성격의 충청도 양반이던 송 논설위원의 두둑한 배짱은 놀라웠다. 어느 날 취조관은 “저쪽 방의 송건호는 사람도 아니야. 아무리 내로라하는 사람도 여기만 오면 밥을 못 먹고 벌벌 떠는데, 송건호는 한 그릇을 후딱 다 비우더니 ‘한 그릇 더 주시오’라고 하네”라고 말했다. 그곳에서 나와 좀 걷다보면 명동성당의 성모마리아상을 만나게 되는데, 그때마다 마음이 울컥하며 속울음이 터졌다. ‘여적’은 물론 경향신문 전체가 난파를 당한 후, 나는 창간하는 중앙일보에서 ‘분수대’라는 칼럼난을 만들어 새 둥지를 틀었다. 그런 뒤 다시 조선일보로 옮겨 ‘만물상’을 집필했다.

1972년 소설가 김은국씨(오른쪽)와 대화하는 이어령 당시 경향신문 논설위원

1972년 소설가 김은국씨(오른쪽)와 대화하는 이어령 당시 경향신문 논설위원

경향신문으로 다시 돌아와 ‘여적’ 집필을 맡은 것은 1971년이다. 또 다른 에세이 ‘저 물레에서 운명의 실이-이것이 여성이다’와 ‘내일의 한국인을 위한 에세이-아들이여 이 산하를’도 연재했다. 그러나 언론환경은 나빠지기만 했다. 내가 ‘문학사상’의 창간 주간을 맡게 된 1972년 10월 군사정부는 유신체제를 선포했다. 언론은 사전검열을 받아야 했다. ‘여적’도 제멋대로 첨삭이 돼 너덜너덜해진 상태로 나갔다. 차라리 붓을 꺾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당시 김경래 편집국장에게 “파리 특파원으로 보내달라”고 했다. 1973년 2월 현장 기자 경력이 전무한 첫 해외 특파원이 됐다. 숨이 탁탁 조여오는 한국땅을 벗어나려면 그 길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특파원 자격으로 6개월간 파리에 머무는 동안 개선문 뒤쪽 ‘아카시아길’로 불렸던 골목길의 작은 독신용 아파트에 거주했다.

특파원 생활 동안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프랑수아 모리아크를 비롯해 외젠 이오네스코, 콘스탄틴 버질 게오르규, 가브리엘 마르셀 등 많은 세계적 작가들과 대담을 나눠 기사화했다. 재독음악가 윤이상도 인터뷰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작가는 <25시>를 쓴 루마니아 망명작가이자 사제였던 게오르규다. 파리 시암가 16번지에 자리잡은 그의 아파트에서 이뤄진 인터뷰에서 그는 기계와 기술의 노예가 된 서구문명의 한계를 지적했다. 그러면서 기술사회 붕괴 후 도래할 정신적 부흥은 아시아로부터 비쳐올 것이라며 한국과 같은 땅에서 그 빛이 비치리라는 것을 느낀다고 했다. 게오르규는 내 초청으로 두 차례 한국을 방문했다. 84세의 노철학자였던 마르셀은 기력은 쇠약했지만 자존심이 강한 분이었다. 어느 날 가쁜 숨을 내쉬며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계단을 오르는 그를 부축하려다가 핀잔을 듣기도 했다.

1973년 이어령 경향신문 파리특파원(왼쪽)이 당시 84세의 노철학자 가브리엘 마르셀과 인터뷰하고 있다.

1973년 이어령 경향신문 파리특파원(왼쪽)이 당시 84세의 노철학자 가브리엘 마르셀과 인터뷰하고 있다.

파리 생활은 아무도 나를 알아보지 못한다는 점에서 좋았다. 한국에선 20대부터 문학평론가로, 작가로, 칼럼니스트로 주목을 끈 탓에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팬레터가 신문사와 집으로 쌓였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파리에서는 낯선 이방인일 뿐이었다. 그런 어느 날 문제가 생겼다. 세수도 안 한 얼굴로 아무렇게나 입고 슬리퍼를 신은 채 지하철 역사 계단을 내려가는데, 저만치에서 한국인으로 보이는 젊은이들이 “저기, 이어령 선생 아니야?”라며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순간 꾀를 냈다. 일부러 지하철 표지판을 보며 “고치라 트로카데로데스네(こちらTrocaderoですね·이쪽이 트로카데로구나)”라고 일본어로 말한 것이다. 그러나 성공한 줄 알았던 잔꾀는 금방 발각나고 말았다. 얼마 후 주프랑스 한국대사관에서 한국인 유학생들과 특파원들을 초청해 불고기파티를 열었는데, 그 자리에 그날 만난 학생들이 있었던 것이다.

파리를 방문한 김종필 당시 국무총리를 대사관저에서 만나기도 했다. 대사가 나를 경향신문 특파원으로 소개하자 김 총리는 “특파원은 무슨 특파원이오? 한국 살 만합니다. 돌아오세요”라고 말했다. 내가 유신체제가 싫어 도망친 것을 그는 이미 꿰뚫고 있었던 것이다.

특파원 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후 나는 경향신문을 그만두는 동시에 언론인으로서의 삶에도 마침표를 찍었다. 그러나 경향신문은 나의 십수년간의 언론인으로서의 삶에서 가장 긴 시간을 보낸 곳이자, 두 번을 거친 곳이고, 마지막을 함께한 신문사다. 무엇보다 내 젊음과 글쓰기의 도장이 돼주고, 명성을 안겨줌으로써 황금기를 맞게 한 곳이다. 나를 키운 8할은 경향신문이다.

참다운 저항은 진영논리에 빠지지 않는 자유로움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어느덧 70돌을 맞은 경향신문이 저널리즘과 아카데미즘이 어우러진 다양성을 지닌 신문, 열려 있는 신문으로 전성기 때의 영광을 지켜나가기 바란다. 지금까지 잘해왔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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