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하산방…100년 전통 한반도 최초의 필방읽음

엄민용 기자·윤진근 온라인기자
구하산방 입구. 윤진근 온라인 기자 yoon@kyunghyang.com

구하산방 입구. 윤진근 온라인 기자 yoon@kyunghyang.com

서울시는 종로·을지로에 있는 전통 점포 39곳을 ‘오래가게’로 추천하고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지도를 제작했다. 이를 위해 서울시는 전문가의 조언과 평가는 물론 여행전문가, 문화해설사, 외국인, 대학생 등의 현장방문 평가도 진행했다. 서울시가 ‘오래가게’를 추천한 것은 ‘도시 이면에 숨어 있는 오래된 가게의 매력과 이야기를 알려 색다른 서울관광 체험이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에 경향신문은 이들 39곳의 ‘오래가게’를 찾아 가게들이 만들고 품고 키워 온 사람 사는 이야기를 들어봤다. 그 서른여덟 번째 가게는 ‘구하산방’이다. 한편 중구 충무로에 자리한 ‘을지다방’은 장소가 지닌 특성상 주인의 의견을 받아들여 취재를 진행하지 않았다. 이에 <서울 그집 ‘오래가게’>의 연재는 여기서 마친다.

‘구하산방’의 3대 주인장 홍수희 대표. 윤진근 온라인 기자 yoon@kyunghyang.com

‘구하산방’의 3대 주인장 홍수희 대표. 윤진근 온라인 기자 yoon@kyunghyang.com

외국인이 기념품가게 앞에서 문전성시를 이루는 인사동 골목, 그곳에서 작은 유리문 하나 배꼼히 열고 있는 ‘구하산방’에 들어서니 수백 종의 붓과 벼루가 사람을 반긴다. 보는 것만으로 묵향(墨香)이 풍겨 온다.

올해로 104년이 된 구하산방은 ‘한반도 최초의 필방(筆房)’이다. 이전까지는 마을마다 제작자들이 있어 좌판에 놓고 문방사우를 팔았다. 그러다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이 매장을 만들고 상권을 형성했다. 그 첫 ‘매장’이 구하산방이다.

구하산방은 1913년 서울역에서 충무로로 넘어가는 길에 있는 진고개, 말 없이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 살 만큼 땅이 질어 진고개라 불린 그곳에서 문을 열었다. 명동 옛 코스모스백화점 인근, 소공로의 조선호텔 근처, 강남의 반도 연쇄상가, 안국동과 견지동 등을 거쳐 인사동에 자리 잡아 25년째 이어오고 있다. 초대 홍기대 대표와 2대 홍문희 대표에 이어 홍수희 대표가 3대째다. 홍수희 대표가 구하산방에 몸을 담은 것도 벌써 40년이 됐다.

붓을 취급하는 매장은 인사동에만 해도 40여 곳이 있다. 하지만 홍수희 대표는 “다른 매장 붓을 사용하다 구하산방 붓을 쓰면, 다른 매장 제품을 다시는 사지 않는다”고 말한다. 100년 이상 명맥을 이어온 만큼 구하산방 제품은 품질이 뛰어나다. 그래서 구하산방 제품만 사용하는 고객이 많다.

“우스갯소리가 아니라 여기 모르는 사람 중에 크게 된 사람은 없어. 웬만큼 입에 오르내리는 이들은 다 여기를 거쳐 갔다고 보면 돼. 특히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거의 구하산방을 거쳐 갔어. 지금도 화가들이나 학생들이 많이 오지.”

홍수희 대표가 큰 붓을 들어 보이고 있다. 윤진근 온라인 기자 yoon@kyunghyang.com

홍수희 대표가 큰 붓을 들어 보이고 있다. 윤진근 온라인 기자 yoon@kyunghyang.com

기억에 남는 손님이 있을까.

“몇 손님만 얘기하면 다른 분들이 서운하니, 돌아가신 분만 얘기하겠다”는 홍수희 대표는 이당 김은호 선생과 천경자 선생을 꼽았다.

구하산방에는 고종 황제와 순종 황제가 이곳의 제품을 사용했다는 액자가 걸려 있다. 구하산방에서 만든 붓이 궁에 납품됐음을 의미한다. 구하산방은 예나 지금이나 독자적 방식으로 붓을 만든다. 하지만 만드는 곳은 중국이다. 거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붓에 쓰이는 재료를 구하기가 어렵다. 양털만 해도 예전에는 지방 곳곳에서 털을 모아 팔았지만, 최근에는 고기와 함께 구우면 맛이 좋다고 해서 털을 따로 뽑지 않는다. 또 족제비 등은 천연기념물이기에 우리나라에서 포획이 금지돼 있다.

게다가 붓을 만드는 기술진 중 90% 이상이 중국에 있다. 한국에 있는 젊은이들은 밥벌이가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전통 기술을 배우려 하지 않는다. 따라서 OEM 방식으로 중국에서 생산한다. 다만 생산 기술만은 구하산방이 가지고 있는 기술을 전수해 만든다.

구하산방 매장 전경. 윤진근 온라인 기자 yoon@kyunghyang.com

구하산방 매장 전경. 윤진근 온라인 기자 yoon@kyunghyang.com

홍수희 대표는 장인이기보다는 ‘장인에게 잔소리하는 사람’이다. 홍수희 대표가 보는 붓에는 나름의 기준이 있다. 홍수희 대표가 직접 검수하지 않으면 판매하지 않는다. 그리고 고객을 입체적으로 보고 가장 적합한 붓을 자신이 추천한다. 추사 김정희 선생이 썼다는, 쥐수염으로 만든 붓이라도 사용자에게 맞지 않으면 쥐수염 붓 특유의 날카롭고 힘 있는 필치가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붓마다 나오는 글씨가 다 달라. 따라서 ‘어떤 붓이 좋아요’라고 묻는 것은 적절치 않아. 붓마다 저마다의 특징이 있는데, 이것을 모르면 아무리 잘 만들어도 고객에 안 맞는 거야. 그래서 손님이 오면 그 사람에게 맞는 붓을 선택해 줘야 해.”

채식주의자에게는 아무리 맛 좋은 고기라도 불편할 뿐이다. 이 때문에 홍수희 대표는 고객의 취향과 성향에 맞는 도구를 골라준다. 선대 대표들로부터 배운 지식과 홍 대표 본인이 손님들을 상대하며 쌓은 경험이 더해진 결과다.

고객은 자신에게 꼭 맞는 붓을 찾을 때까지 수십 년이 걸리기도 한다. 그만큼 많은 붓을 써 보는 것이 중요하다. 길이, 두께, 털에 따라 붓의 종류는 수백 종에 이른다. 구하산방에서 취급하는 붓만 500여 종류다. 벼루나 먹도 사람에 따라 맞는 것이 따로 있기는 마찬가지다.

붓의 종류가 다양하니 붓을 만드는 재료 또한 다양하다. 홍수희 대표는 “살아서 움직이는 모든 동물의 털을 재료로 쓸 수 있다”고 말했다. 쥐·양·소·말 등 어떤 동물의 털이든 붓의 재료가 된다. 족제비의 털로도 붓을 만들 수 있다. 청설모 털로 만든 붓은 캘리그래피를 하는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다. 다만 동물별로 붓털에 쓰이는 부위가 다르다. 쥐는 수염을, 소는 귀를, 말은 갈기와 꼬리털을 쓴다.

사람의 머리털로도 붓을 만든다. 아이가 태어나서 처음 자르게 되는 머리카락인 ‘배냇머리’로 붓을 만드는 것. 따라서 일생에 한 번밖에 만들지 못하는 붓이다.

‘구하산방’은 여기를 봐도 붓, 저기를 봐도 붓, 붓 천지다. 윤진근 온라인 기자 yoon@kyunghyang.com

‘구하산방’은 여기를 봐도 붓, 저기를 봐도 붓, 붓 천지다. 윤진근 온라인 기자 yoon@kyunghyang.com

‘구하산방’은 여기를 봐도 붓, 저기를 봐도 붓, 붓 천지다. 윤진근 온라인 기자 yoon@kyunghyang.com

‘구하산방’은 여기를 봐도 붓, 저기를 봐도 붓, 붓 천지다. 윤진근 온라인 기자 yoon@kyunghyang.com

붓 외에 캘리그래피 등에 쓰이는 다양한 색깔의 염료들도 보인다. 윤진근 온라인 기자 yoon@kyunghyang.com

붓 외에 캘리그래피 등에 쓰이는 다양한 색깔의 염료들도 보인다. 윤진근 온라인 기자 yoon@kyunghyang.com

이렇듯 붓에 관한 한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듯한 홍수희 대표는 “구하산방은 평범한 필방이 아니다”고 말했다. 구하산방은 이 나라 묵객(墨客)들의 ‘어머니의 품’ 같은 곳이라는 얘기다.

“이 가게는 붓만 파는 데가 아냐. 과거 화백이며 서예가들이 모이는 장소이기도 했어. 전화도 없던 시절, 서로 여기서 쪽지를 주고받았지. 이렇게 된 것이 아쉬워. 100년을 넘긴 곳이거든. 이거, 돈 버는 장사 아냐.”

한편 구하산방이 위치한 인사동에는 갤러리가 많다. 바로 맞은편에 위치한 ‘한국관광협회갤러리’는 한국 작가들의 작품을 전시하며, 작품 교체 주기가 빠르면 1주일 정도여서 자주 들르기에 좋다. ‘갤러리루벤’에서는 동양화가들의 전시회가 특히 많이 열린다. ‘선화방’에서도 수준 높은 그림을 감상할 수 있다.

■구하산방은?

개업연도 : 1913년 / 주소 : 종로구 인사동5길 11 / 대표재화 금액 : 붓 2만원부터 / 체험 요소 : 전통 붓 등 구경 / 영업시간 : 매일 오전 9시~오후 8시 / 주변 관광지 : 인사동 문화의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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