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달력은 넘기기도 전에 글자가 빼곡했다. 한해를 보내는 막달엔 이런저런 송년 모임들로 넘쳐난다.
연말은 가장 사람들과 많이 만나는 시기인 동시에 관계 고민도 늘어나는 시기다. 카카오톡 메신저 저 아래 어딘가 묵혀져 있던 단체 카톡방들엔 하나둘 송년회 장소와 날짜를 공지하는 알림이 뜬다. 방을 나올 수도 없고 숫자만 지우기도 민망해 빨간 숫자가 쌓여가는 만큼 마음도 무거워진다. 그런 만큼 정작 가족이나 친구 등 친밀한 사람들과는 괜찮은 관계를 맺고 있는지 스스로 되물어보면 또 한번 착잡해지기 마련이다.
“수영이나 테니스 같은 건 노력하면 시간이 지날 수록 개선이 되는데, 인간관계는 좀 어떤가요? 노력하는 만큼 조금씩 나아지는 것 같으세요?” 지난 11일 저녁, 문요한 작가는 강의실에 모인 사람들을 한번 죽 둘러보며 물었다. 사람 사이의 거리에 관한 책 <관계를 읽는 시간>을 펴낸 정신과 의사 문 작가는 12월 인생수업 <너와 나의 건강한 거리>에서 질문 7개를 던졌다. ①나는 왜 이렇게 관계 맺고 있는가 ②그게 당신이 미안해야 할 일인가 ③ 그게 나를 위해서라고? ④ 왜 솔직히 이야기 못하는가? ⑤ 원하는 것을 이야기할 수 있는가? ⑥ 무례한 사람에게 어떻게 할 것인가? ⑦ 스스로 기쁠 수 있는가? 모두 너와 나의 경계를 규정하는 질문들이다.
■거리가 왜 중요한가?
문 작가는 건강한 ‘성인’ 대 ‘성인의 관계를 맺는 기본은 ‘거리’라고 말한다. “사람에겐 누구나 자아를 두르고 있는 ‘경계’가 있죠. 그게 약한 (타인 중심적) 사람과 강한 (자기 중심적) 사람은 결과적으로 모두 건강한 거리 획득엔 실패한 겁니다.” 고개를 갸웃했다. 대개 ‘타인 중심적’인 사람이 좋은 사람이라고 여기지 않는가. “만약 자아의 경계가 희미한 사람이 친구를 맛집에 데려갔는데 ‘맛없다’는 말을 들으면 크게 실망하고 자기 취향 자체를 부정하기도 합니다. 자기가 미안할 상황도 아닌데 ‘미안하다’는 말을 연발할 수도 있고요. 반대로 경계가 강한 사람은 ‘너는 입맛이 왜 그렇게 이상해’라고 할 겁니다.” 문 작가는 경계가 강한 사람 뿐 아니라 경계가 약한 사람도 자기 중심적인 본질은 같다고 지적했다. 그는 “남의 진심엔 상관 없이 남의 눈에 비치는 자신만 신경 쓰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결국 대상도 나도 행복해지기 힘든 관계다.
어릴 때 적절한 관심과 애정을 받지 못하고 성장한 사람은 다른 사람과의 경계를 잘 찾지 못한다. 문 작가는 이런 사람은 인간 관계에서 나만 옳다고 여기며 남을 지배하려는 태도, 반대로 갈등이 생기면 무조건 상대에게 맞춰주며 순응하려는 태도, 남에게 도움이 돼야만 내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고 돌보려는 태도. 관계를 단절하고 자신을 무조건 방어하려는 태도로 나타난다고 정리했다. 이런 태도는 일관되지 않고 상대에 따라, 상황에 따라 복합적이다. 직장에서는 ‘OK맨’이지만 집에서는 독단적 ‘폭군’이 되는 식이다.
건강한 거리란 ‘나’는 나대로 존재하면서 ‘너’ 또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때 가능하다. 문 작가는 이를 ‘마음을 헤아리는 마음(mind-mindness)’라고 불렀다. “상대가 나와 다르다는 걸 인정해야 비로소 상대에 대한 관심이 생깁니다. 그것이 진짜 관심이죠. 우리는 내가 바라는 걸 상대가 해주길 바라죠. 그런데 반대로 나는 상대방이 나를 그 자체로 좋아해주길 바랍니다.” 가족에게 사소한 문제로 화를 내고 ‘만약 업무로 만난 사람이라면 내가 이렇게 했을까?’라고 가슴 찔린 기억이 떠올랐다. 적정한 거리를 함부로 넘어가 저지른 실수다.
■거리를 두면 진심이 오간다
건강한 거리 두기는 ‘너’의 진심과 ‘나’의 진심이 통하도록 물꼬를 튼다. 우리는 상대를 위한다며 자기중심적인 행동을 하고,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실망한다. “제가 한번 아내가 아파서 곰탕을 사갔어요. 그런데 아내가 속이 안 좋아서 먹지 못하자 실망했죠. 나는 아내를 위한다고 한 일인데 아내가 응하지 않았으니까요. 그리고 저는 계속 ‘한 입만 먹어보라’고 권했고요.”
문 작가는 상대의 진심을 듣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기술로 ‘질문하기’를 들었다. 곰탕을 사기 전 ‘지금 속은 어때?’ ‘뭐가 필요해?’라 물었다면 둘 다 좋은 결과가 나왔을 것이다. 문 작가는 재미있는 예로 질문의 ‘위력’을 설명했다. 미국의 한 은행에 강도가 들어 직원에게 총을 들이대고 1000만원을 내놓으라고 했다. 직원은 순순히 돈을 줬을까? 아니면 위험해도 비상벨을 눌렀을까? 직원은 물었다. “1000만원이 왜 필요하세요?” 당황한 강도는 자신의 어려운 사정을 설명했고 그 사이 다른 직원이 비상벨을 눌러 경찰을 불렀다.
“부모들은 늘 자녀의 건강과 행복을 말합니다. 그런데 정작 ‘넌 뭘 할 때 행복해?’라고 묻지는 않아요.” 그가 만난 한 중년 여성에게 남편과 함께 산 30년 동안 듣고 싶었지만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말은 “오늘 뭐했어?”라는 질문이었다.
■솔직하면 멀어질까 두렵다고?
‘너’의 진심을 알았다면, ‘나’의 진심도 전달할 줄 알아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솔직하게 진심을 말하면 상대가 멀어질 거라고 두려워한다. 문 작가는 “솔직해서 다른 사람을 상처주는 것이 아니라 솔직하게 표현하는 방식이 상처를 주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옷이 잘 어울리지 않는 것 같은데 노란색은 어떨까?’라고 말하는 것과, ‘그거 입으니까 더 뚱뚱해보여. 넌 안목이 왜 그 모양이야’라고 말하는 것은 다르다. 타인을 존중하는 방식으로 솔직한 마음을 표현하면 그것이 설령 불편한 말이라 해도 거리가 영영 멀어지는 경우는 없다.
외려 내 진심을 표현해야 상대방도 관계 속에서 변화한다. 상대방의 어떤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감정만 말하지 말고 원하는 것을 정확히 말해야 한다. ‘나는 엄마가 연락 없이 집에 찾아오면 불편해. 미리 연락하고 왔으면 좋겠어’. ‘나는 표현을 해줘야 사랑받는다고 느껴. 선물을 해주면 좋겠어’ 같은 방식으로 말하는 법을 연습해보자. 이렇게 여러 차례 말했지만 바뀌려 노력도 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그 관계는 재고해 보라고 문 작가는 조언했다.
■관계 밖에서 홀로 행복해지기
문 작가는 마지막으로 “타인과의 관계에서 행복감을 느끼려면 역설적으로 관계 없이도 스스로 만족하는 방법을 익혀야 한다”고 말했다. 이를 ‘오티움(otium·여가)’이라고 했다. 개인이 흠뻑 빠져 즐길 수 있는 취미, 오롯이 행복감을 느끼는 일을 말한다. 스스로 행복할 줄 아는 사람은 타인과의 관계에 지나치게 많은 것을 바라지 않는다. 상대가 행여 기대를 충족시켜주지 못하더라도 크게 실망하지 않는다. 오티움이 타인과 건강한 ‘거리’를 지켜주는 역할을 하는 셈이다. 또 오티움을 공유하는 사람들과 어울리다 보면 인간관계의 폭도 넓어진다.
강의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곱아든 손으로 스마트폰을 꺼냈다. 조금 망설이다가 엄마에게 “엄마 오늘 뭐했어?”라고 카카오톡 메시지를 적어보냈다. 그 말을 적으려고 보니 대화창 위로 한참 “엄마 내 계좌번호” “택배 경비실” “ㅇㅇ” 같은 단답형 일방형 요구만 가득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엄마가 사진 몇 장을 보내왔다. 낮에 공원을 산책하며 본 새, 나무 따위를 찍은 사진들이었다. 혼자 버스 정류장에서 웃음이 나왔다.
조금 부끄러워도 먼저 질문하면 소중한 사람들의 진심을 어루만질 수 있다는 메시지가 강하게 남았다. 새해 다짐 같은 것을 잘 만들지 않는 편이지만 내년 다짐에 쓰고 싶은 것이 생겼다. “하루에 한번, 소중한 사람에게 작은 질문하기”
■2019년 1월 인생수업 알림
2018년 한해 인생수업 강좌에 많은 관심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2019년에도 인생수업 강좌는 이어집니다.
2019년 새해를 밝힐 1월 인생수업 주제는 <인생에 정리가 필요한 까닭>입니다. 하나 둘 물건이 쌓여갈 수록 마음은 무거워지는데, 정리 좀 해보자고 산 미니멀리즘 책마저 구석에 자리를 차지할 뿐입니다. 한때 트렌드가 아닌 진짜 내 삶을 정리하는 방법, 정리컨설턴트이자 <이대로는 안되겠다 싶은 순간 정리를 시작했다> 저자 윤선현씨와 함께 10년 정리의 노하우를 알아봅니다.
-일시: 2019년 1월 14일(월) 오후 7시~8시30분
-장소: 서울 중구 경향신문사 12층 강의실(지하철 1·2호선 시청역 도보 10분, 5호선 서대문역 도보 7분)
-참가비용 및 인원: 1인 2만원, 30명 안팎
-신청방법: all.khan.co.kr/apply/ 또는 facebook.com/khanclass/ 참조
<김지원 기자 deepdeep@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