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자리 아닌 일거리···'일정치 않음'을 살다

손제민·정대연·최미랑·심윤지 기자

①일자리보다 일거리

노동의 미래를 모두 알 수는 없다. 다만 현실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변화의 면면들을 들여다보면 우리 사회가 무엇을 준비해야 할지 짐작해볼 수 있다. 경향신문은 이를 위해 ‘노동의 미래’에 가까운 6명의 노동자를 심층면접했다. 이들은 디지털 플랫폼 기술 발전과 결부돼 새롭게 등장한 일을 하거나 과거부터 있었지만 새로운 방식으로 일하는 노동자들이다. 산업시대 표준 고용관계 속에 있지 않아 노동법과 사회복지제도의 보호를 받지 못한다. 틈 날 때마다 노트북을 열고 일감 단위 단순노동을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플랫폼을 이용해 여러 개의 부업을 하는 이도 있다. 국가를 믿고 있을 수 없어 자기계발에 집중하는 사람도 있다. 더 나은 대안이 이들에게 없었다는 점에서 각자의 선택은 100% 자발적으로 보기 어려웠다. 삶의 의지를 불태우면서도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숨기지 못하는 점도 비슷했다.

■‘N잡’ 하는 허 대리

“아버지가 일용직 노동자였는데 하루는 오토바이를 타다 무릎이 깊게 파이는 사고를 당했어요. 당장 병원에 뛰어가도 모자랄 만큼 피가 철철 났는데 집으로 와서 연고를 바르시더라고요. 그때 생각했던 것 같아요. 병원비 몇 푼 아끼려 이렇게 사는 건 아니지 않나….”

어릴 때부터 늘 쪼들렸다. 돈에 휘둘리는 삶이 아니라 돈을 휘두르는 삶을 살고 싶었다. 하지만 200만원 남짓한 월급만으로 삶을 바꾸진 못할 것 같았다. 뭔가 다른 경로가 필요했다. 평범한 회사원이던 그가 취한 선택지는 바로 여러 가지 일을 하는 ‘N잡’이다.

마케터, 유튜버, 작가, 사업가, 컨설턴트…. 유튜버 ‘N잡 하는 허 대리’(활동명·32)의 직업은 총 5개다. 그는 월급 외 수입을 만드는 방법을 콘텐츠로 만들고, 이를 각종 플랫폼을 이용해 판매하는 방식으로 돈을 번다.

낮에는 재능공유 플랫폼 스타트업에서 마케터로 일하고, 밤에는 그 경험을 살려 N잡 관련 유튜브 영상을 만든다. N잡 노하우를 담은 전자책을 재능공유 플랫폼 ‘크몽’에 판매하고, 자신처럼 ‘N잡러’가 되고 싶어하는 직장인을 대상으로 1 대 1 컨설팅도 한다.

처음부터 N잡을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대학 졸업 후 출판 마케팅 업체에 마케터로 취직했다. 첫 연봉이 2800만원이었다. 이듬해 연봉 협상으로 3150만원까지 올렸지만 부모님 용돈과 생활비, 적금을 제하니 “정말 귀여운 규모의 돈”만 수중에 남았다. 부족한 소득은 야근수당으로 메웠다. “야근중독이었어요. 매주 3번 이상 야근을 하면 월 30만~40만원은 더 받으니까 거기 만족하면서 돈과 제 시간을 맞바꿨던 거죠. 인생을 갉아먹는지도 모르고….”

정규직 생활도 안정적이지는 않았다. “처음엔 카드뉴스 제작 업무를 맡는 조건으로 입사했는데 그 일은 3개월밖에 못했어요. 회사 상황에 따라 직무도 계속 바뀌었고, 제 능력을 개조해야 하는 일이 반복됐죠.” 업계 선두였던 회사가 경쟁사의 추격을 받으며 불안감은 더 커졌다. 당장 2~3년 후 회사가 남아있을 것이란 보장도, 회사가 인생을 지켜줄 것이란 기대도 희미해졌다.

유튜브에 월급 외 수익 관련 콘텐츠를 올리는 ‘N잡 하는 허대리’(활동명)가 주말인 지난달 22일 자택에서 영상을 편집하고 있다.   유명종 PD yoopd@kyunghyang.com

유튜브에 월급 외 수익 관련 콘텐츠를 올리는 ‘N잡 하는 허대리’(활동명)가 주말인 지난달 22일 자택에서 영상을 편집하고 있다. 유명종 PD yoopd@kyunghyang.com

2017년 12월, 직장을 그만뒀다. 그후 2년간 프리랜서 생활을 했다. ‘카드뉴스 만들기’를 주제로 1시간30분 분량의 강의를 만들어 재능공유 플랫폼에 올렸다. “그 전까지는 제 능력이 판매될 것이란 생각을 못했어요. 그때 정산받은 돈이 딱 5만원. 내 손으로 그 돈을 벌어보니 10만원을 어떻게 버는지 알겠더라고요.”

사용자 후기가 쌓이자 소득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기업과 공공기관의 카드뉴스 제작 의뢰와 강의 제안이 들어왔다. 직장만 다녔을 땐 하루 10시간 일해야 20만원을 겨우 벌었지만, N잡을 하고 나서는 두 시간에 30만원을 버는 일도 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N잡이란 선택지는 전문성을 갖춘 소수의 이야기가 아닐까. 그는 “먹고살기 위한 재능은 그렇게 뛰어나지 않아도 괜찮다. 유튜브가 생기면서 전문 지식을 얻을 수 있는 길도 많아졌다”고 했다. 오히려 그는 “노동자 스스로 ‘200만원의 감옥’에 갇혀있는 게 문제”라고 했다.

허 대리는 6개월 전 풀타임 프리랜서 생활을 접고 한 재능공유 플랫폼에서 정규직 마케터 일도 시작했다. 200만원의 월급만으로 경제적 자유를 누리기 어려웠던 것과 마찬가지로, N잡 생활만으로도 경제적 안정을 찾기는 어려웠다. “프리랜서로 다음달에도 이만큼 벌 수 있을까 고민하다 보니 창의적인 생각을 못하게 되더라고요.”

유튜브에 월급 외 수익 관련 콘텐츠를 올리는 ‘N잡 하는 허대리’(활동명)의 책장. 허대리는 주로 책이나 유튜브를 통해 N잡 콘텐츠 제작을 위한 마케팅 지식을 습득한다고 했다.  유명종 PD yoopd@kyunghyang.com

유튜브에 월급 외 수익 관련 콘텐츠를 올리는 ‘N잡 하는 허대리’(활동명)의 책장. 허대리는 주로 책이나 유튜브를 통해 N잡 콘텐츠 제작을 위한 마케팅 지식을 습득한다고 했다. 유명종 PD yoopd@kyunghyang.com

허 대리 사례는 정규직과 비정규직, 노동자와 자영업자, 취업과 실업 상태의 경계가 점점 흐려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정규직에 더해 N잡을 시작하고부터 그는 경제적으로 자유로워졌고 심리적으로 여유로워졌다. 회사에서 일하거나 운동하는 시간을 제외한 나머지 시간은 전부 N잡 관련 콘텐츠 준비에 쓴다.

끊임없이 자기계발을 해야 하는 삶이 불안하진 않을까. “불안하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죠. 그런데 다른 대안이 있는 것도 아니지 않나요.”

■“국가요? 노조요? 기댈 것은 ‘자기계발’뿐” 프리랜서 IT 개발 노동자

10년차 프리랜서 IT 개발자 설승훈씨(35·가명)는 국가가 나를 위해 뭔가 해줄 거라는 기대를 하지 않는다. 첫 직장에서의 ‘강렬한’ 경험 때문이다. 직원 20명 규모 시스템통합(SI) 업체에서 “1년 내내 매일 야근을 하며 추석 당일 딱 하루 쉬었다”. 그러고도 실제 노동시간에 상관없이 계약한 돈만 지급받는 ‘포괄임금제’여서 연장근로수당 한 푼 받지 못했다. 계약된 연봉이 1800만원이었지만 이마저도 마지막 석 달치는 끝내 떼였다. 너무 힘들어 1년 만에 다른 회사로 옮겼다. “못 받은 급여를 받기 위해 이리저리 뛰었지만 정부는 아무 역할을 하지 않았어요. 제가 10년 전 당한 일이 지금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는 두 번째 직장까지 총 4년간의 정규직 노동자 생활을 버린 뒤 지금까지 6년 넘게 시스템유지관리(SM) 프리랜서로 일한다. 설씨는 IT 업계의 전통적 다단계 하도급 구조 아래 놓여 있다. ‘갑’인 발주사가 프로젝트를 발주하면 ‘을’인 수행사가 ‘병·정·무’에 해당하는 인력파견업체로부터 개발자를 구한다. 개발자는 업계에서 ‘보도방’이라 불리는 파견업체와 용역계약을 맺고 발주사 일을 수행한다. 그에 따르면 “가만히 앉아 수수료만 떼먹는” 업체들은 IT 대기업 출신 임원들의 ‘은퇴 후 보장’을 위해 세워진 경우가 많다. 그는 “병·정·무 중 어디와 계약하느냐에 따라 월 수입이 100만원은 족히 차이 난다”며 “개발자가 받는 돈이 발주사가 지급하는 돈의 절반에도 못 미치기도 한다”고 말했다.

설씨는 발주처로 출퇴근하며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정규직과 똑같은 패턴으로 일하지만 ‘근로자’가 아닌 ‘개인사업자’이기 때문에 업체로부터 4대보험 지원을 받지 못한다. IT 업체 대부분이 직원들의 신기술 교육을 지원하지만 설씨에게는 그런 기회가 없다.

그렇지만 그는 “회사가 시키는 일이 아니라 내가 하고 싶은 일을 골라 할 수 있고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생활에 만족한다. 직장생활 마지막 해에 받은 연봉이 3000만원 수준이었지만 프리랜서 첫해에 5400만원으로 뛰었다. 2019년에는 8000만원가량 됐다. 밥 먹듯 하던 야근도 사라졌다.

늦은 밤 서울 구로구 가산디지털단지의 한 게임업체 건물에 불이 켜져있다. 경향신문 자료화면

늦은 밤 서울 구로구 가산디지털단지의 한 게임업체 건물에 불이 켜져있다. 경향신문 자료화면

설씨 주변 개발자들 중에는 ‘자유로운 생활’을 갈구하면서도 일이 끊길 거란 두려움에 ‘프리 선언’을 망설이는 경우가 많다. 프리랜서로 일하더라도 파견업체와의 계약 종료 기간이 다가올 때마다 불안에 떤다. 설씨는 “희소한 기술을 가진 소수 개발자는 업체를 골라 가지만 그렇지 못한 대부분은 당장의 생계 때문에 저임금 일자리만 반복해 옮겨다니게 된다. 나이가 많으면 발주처에서 꺼리기 때문에 연차가 쌓일수록 더 힘들어진다”고 했다.

‘평생 머물 것처럼 일하고 당장 떠날 것처럼 준비하라.’ 양극화된 시장에서 설씨가 택한 생존 방법은 업계 트렌드에 맞춰 끊임없이 ‘자기계발’을 하는 것이다. 그는 프리랜서로 나온 뒤 스스로 주 노동시간을 42시간으로 통제하고 퇴근 후 소프트웨어공학 특수대학원을 다녔다. 수시로 개발자 커뮤니티를 통해 알게 된 세미나, 스터디에 참석한다. 설씨는 “더 많은 시간을 일해 연봉을 좀 더 받는 것보다 그 시간에 자신에게 투자해야 더 높은 미래 연봉을 확보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의 삶에서 자기계발만큼 중요한 것은 ‘여유’다. 집에서 먼 강남·판교로는 연봉을 더 줘도 갈 생각이 없다. 배드민턴, 볼링, 스킨스쿠버, 여행 등 취미생활이 보장되지 않는 일자리는 가지 않는다. 설씨는 프리랜서 기간 중 2~3개월씩 두 번 일을 쉬었지만 해외여행 같은 여가생활을 위해서였다.

설씨는 늘어나는 IT 인력중개 플랫폼은 “중개수수료 장사를 하는 IT 업계의 ‘알바몬’”이라며 “일감을 찾는 개발자들을 더 싸게 써먹기 위한 목적으로 프로젝트를 발주하는 경우가 많아 시장 단가를 더 떨어뜨릴 것”이라고 했다. 최근 IT 업계의 노동조합 설립 흐름에 대해서는 “의미는 있지만 개발자들이 대체로 내향적이라…”며 말끝을 흐렸다. 그는 “언젠가 개발자를 귀하게 여기는 플랫폼 업체에서 일하고 싶다”고 했다.

■일과 휴식의 경계가 사라진 크라우드소싱 일감 노동자

문재인 대통령이 인공지능(AI) 기술 진흥과 관련한 연설을 한 지 두 달 뒤인 12월 어느 오후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AI 국가전략을 내놓을 때 박은정씨(38·가명)는 여느 때처럼 집에서 컴퓨터 화면을 들여다보며 일을 하던 중이었다.

“일에 대한 뿌듯함은 없어요. 작업을 많이 하니까 크라우드웍스에서는 계속 검수를 맡기고 (연구자·언론) 인터뷰 요청도 해와요. 이런 것은 보통 우수 작업자에게 요청하니까, 그건 뿌듯하기는 한데, 일 자체에 대한 뿌듯함은 없어요.”

‘4차 산업혁명’의 중심에 AI가 있다면, 박씨는 그 ‘혁명’의 완수 과정에 없어선 안되는 사람이다. 박씨는 AI 학습데이터 수집 및 가공을 하는 플랫폼인 크라우드웍스의 일감 노동을 주업으로 한다. 이날 그가 집에서 한 일은 모니터에 띄워둔 사진파일 위 글자들에 테두리를 치고, 그 문자들을 자판으로 다시 입력하는 것이다. 여러 모양의 문자 입력 데이터가 쌓이면서 AI의 문자인식능력(OCR)이 고도화된다.

박씨가 일 자체에 보람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단조로운 속성에서 비롯된다. 그럼에도 이 일을 1년간 해온 것은 싱글맘으로 육아를 하면서도 일정 수준 소득을 얻는 직업으로 이만한 일이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예전 직장보다 주관적 만족도도 더 높다. “시간에 구애받지 않아서 좋아요. 원래 사무직종에서 일했는데, 나인투식스잖아요. 하지만 아이를 돌보려면 평일에도 시간을 빼야 할 일이 있는데 회사 눈치도 보이고 해서 재택근무를 알아보다 이 일을 하게 됐어요.”

크라우드웍스 전업 작업자 박은정씨(가명)가 지난달 17일 서울 방배동의 한 까페에서 노트북을 펴고 작업을 하고 있다. 유명종 PD yoopd@kyunghyang.com

크라우드웍스 전업 작업자 박은정씨(가명)가 지난달 17일 서울 방배동의 한 까페에서 노트북을 펴고 작업을 하고 있다. 유명종 PD yoopd@kyunghyang.com

쉬운 편에 속해 단가가 싼 OCR 업무를 위주로 해도 하루 종일 하면 월 250만원은 번다고 한다. 근무는 아이가 등교한 직후인 오전 9시쯤 식탁에서 시작한다. 아이가 하교한 뒤 밥을 챙겨주며 잠시 휴식을 취하고, 대개 이튿날 오전 1시까지 일한다. 식사 외출 약속이 있는 경우를 제외하곤 줄곧 일하기 때문에 하루 평균 노동시간이 12시간은 넘는다. 외출할 때도, 휴가지에 갈 때도 컴퓨터를 챙겨가는 것을 잊지 않는다.

“한 프로젝트당 작업량은 정해져 있고, 이 일을 하려는 작업자는 엄청나게 많아요. 프로젝트가 언제 열리고 언제 닫힐지 모르니까. 밖에서 사람 만나고 있을 때도 ‘작업이 밀려 있고, 검수도 빨리해야 하는데’ 이런 생각을 해요. 내가 안 하면 다른 사람이 해버릴 수 있으니까요.” 처음 일을 시작할 때까지만 해도 OCR은 박씨처럼 ‘숙련된 소수’만 하던 작업이었지만 최근 크라우드웍스가 ‘꿀알바’로 입소문을 타고부터 작업자들이 늘어났다. 일감 경쟁은 더 치열해졌다.

박은정씨가 크라우드웍스에서 주로 하는 한국어 광학문자인식(OCR) 작업 화면. 그는 우수작업자로 인정받아 다른 작업자들의 작업을 검수하는 작업도 맡고 있다. 유명종 PD yoopd@kyunghyang.com

박은정씨가 크라우드웍스에서 주로 하는 한국어 광학문자인식(OCR) 작업 화면. 그는 우수작업자로 인정받아 다른 작업자들의 작업을 검수하는 작업도 맡고 있다. 유명종 PD yoopd@kyunghyang.com

박씨는 크라우드웍스를 직장으로 여긴다. 구체적인 업무 지시도 내려오고, 자신의 작업이 검수를 통과하지 못할 경우 돈을 못 받거나 다시 해야 하는 등 종속성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크라우드웍스 측 생각은 다르다. 회사는 이들을 ‘사업자’로 보거나 ‘일하는 소비자’라는 의미를 가진 ‘태스크슈머(Task-sumer)’로 본다. 박씨는 근로소득세를 내지 않고 사업소득세를 낸다. 하지만 사업자 등록증이 있는 법적 의미의 사업자도 아니다.

그런 점에서 아쉬운 점이 있다. 직장 노동자들이 누리는 4대보험, 유급휴가, 퇴직금 등 복지를 누리지 못하고 은행 대출도 제한된다. “대출을 받기 위해 은행을 방문했을 때 4대보험이 없고 소득증명원이 없어서 대출을 받지 못했어요. 그럴 때 일은 하고 있지만 일에 대한 정당한 취급을 받지 못한다고 느껴요. 회사 복지를 누릴 수도 없고요. 회사에서는 가끔 동료 여직원들과 커피를 마시거나 맛집에 갈 때가 있는데 제게는 그런 즐거움도 없죠.”

이런 ‘결핍’이 아쉽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더 나은 대안이 있는 것도 아니다. 다행히 아직 젊고, 건강한 눈과 손이 있는 한 지금 일을 계속할 수 있다. 하지만 AI가 더 고도화되면 단순 작업 수요가 줄어들 수 있는데, 박씨의 소득원이 지속될 수 있을까. 그 문제는 깊이 생각해보지 않은 듯했다. “AI가 계속 발전하면 당연히 더 업무가 늘어나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회사에서도 그렇게 얘기하고요. 제 나이 60세 때까지는 이 일이 있을 거라고 막연히 생각하는데….”

■자기착취 일상화된 웹창작노동자

“내 자신이 용납이 안되었던 거죠. 나는 왜 이렇게밖에 못할까.” 돌이켜보면 벼랑 끝에 선 지난 4년이었다. 이 일을 선택한 이상 스스로를 최대치로 몰아붙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에밀리(39·가명)는 웹소설(온라인 플랫폼에 연재되는 장르문학) 창작자다. 웹툰·웹소설 창작자들은 대부분 출판사나 에이전시(기획사)를 통해 플랫폼과 계약을 맺고 일한다. 만화잡지나 동호인 커뮤니티 등을 통해 소수만 ‘데뷔’하던 과거와 비교하면 포털 사이트를 필두로 다양한 플랫폼이 열리면서 기회의 문이 넓어졌다. 대신 경쟁도 그만큼 치열하다.

에밀리는 한 플랫폼에 무료 연재한 소설이 출판 제안을 받으며 데뷔했다. 어릴 적부터 가져온 작가의 꿈을 이룬 셈이다. 갑상샘암 치료와 육아 문제가 겹쳐 7년간 다니던 직장을 관둔 후에 선택한 길이었다.

“회사에 다니면 병가 내기도 쉽지 않잖아요. 프리랜서가 되면 병원은 쉽게 갈 줄 알았는데… 착각이었어요.” 오전 9시부터 자정까지 엉덩이를 거의 떼지 못한 날이 부지기수였다. 아이들이 어린이집과 학교에서 돌아오면 잠깐 밥을 챙겨주는 게 휴식의 전부였다. “하루 7000~8000자를 써도 스스로 용납이 안됐어요. ‘1만자는 써야지. 너 이럴 시간이 없어. 빨리 완결을 내서 뭐라도 수입을 얻어야 되는 거라고’ 하고 스스로를 쪼았거든요.”

2018년 한국콘텐츠진흥원 실태조사 결과를 보면 웹툰 작가들은 하루 평균 10.7시간, 주 5.7일을 일했다. 하루 12시간 이상 작업에 매달리는 사람이 두 명 중 한 명이었다. “쉬면 바로 조회수가 떨어져요. 한번 잊히면 끝장이거든요. 쉴 수가 없어요.” 일단 연재를 시작하면 바로바로 다음 회차를 내놓아야 수익이 생긴다. ‘진도가 안 나간다’ ‘성의가 없다’…. 독자는 댓글로 압박하고 플랫폼은 조회수로 압박한다.

픽사베이

픽사베이

창작자는 플랫폼이 떼가고 남은 수익(기본 수수료 약 30%)을 출판사·기획사와 나눠 갖는다. 작품을 잘 보이는 데 노출시키기 위해서는 수수료를 수익의 50%까지 내기도 한다. 건물주가 목 좋은 곳에 높은 임대료를 매기는 것과 마찬가지다.

책이 출간된 2018년, 에밀리는 이전 회사에서 받던 월급 정도의 수입을 거둬들일 수 있었다. 하지만 “잊혀진 옛 노래처럼” 작품 인기가 식자 수입이 월 40만~50만원으로 줄었다. “진짜 힘든 게, 브레이크가 없다는 거예요. 소득이 불안정하니까 ‘벌 수 있을 때 벌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가 없어요.”

급기야 지난 4월 위기가 닥쳤다. 몇 달 치 국민연금과 건강보험료를 납부하지 못하게 되면서다. 200만원 넘게 쌓여가는 체납액을 두고 혼자 끙끙 앓다 마침내 털어놓자 20대 초반부터 작가의 꿈을 지지하고 응원해주던 남편의 마음도 무너져내렸다. “당신 그렇게 밤낮으로 일하는데…. 차라리 우리 가게에 와서 일해.”

에밀리는 결국 심리상담까지 받게 돼 연재를 중단하기로 했다. 스스로 능력 부족을 끊임없이 책망한 시간이었다. 지금은 플랫폼 연재 대신 출간 준비만 한다. “가족 도움으로 건보료를 갚을 수 없었다면 이런 선택도 하지 못했겠죠. 돈 문제가 해결되니까 그제야 비로소 다시 글이 써지더라고요.”

에밀리는 스스로를 ‘노동자’로 여긴다. 그의 일상은 업계 규칙의 절대적인 영향하에 돌아갔다. 하지만 ‘개인사업자’로 분류되고 출판사·플랫폼과 1 대 1 계약을 하는 상황에서 노동권을 보장받는 것은 불가능하다. 무료 연재 등으로 인한 ‘무료 노동’을 보상받을 방법도 없다.

업계의 불공정한 관행에 대항하고 창작자들의 노동 현실을 알리기 위해 일부 창작자들이 2018년 12월 노조(전국여성노동조합 디지털콘텐츠창작노동자지회)를 만들었다. 장기적으로는 프리랜서의 근로자성을 인정받아 창작자들도 노동법의 보호를 받도록 하는 게 지회의 목표다.

“사회가 이(콘텐츠 창작업계) 안에서 일하는 사람들 목소리에 좀 귀를 기울여줬으면 좋겠어요. ‘너는 좋아하는 일을 하잖아’ ‘너는 법상 노동자가 아니잖아’라고만 하지 말고요.”

■직접고용 고민 중인 대리주부 가사 노동자

이동희씨(52)는 가사 노동자와 소비자를 중개하는 플랫폼 ‘대리주부’에 등록된 ‘매니저’다. 고교 2학년 때 부모를 여읜 4녀 중 장녀로 살림과 돌봄이 몸에 밴 베테랑 가사 노동자에게 매니저란 호칭은 자신의 노동에 자부심을 안겨주는 요인 중 하나다.

대리주부가 지난 12월 가사 노동자 1000명을 직접고용하는 대신 0시간 계약 금지, 휴게시간 보장 등 근로기준법 규제를 면제받는 ‘규제 샌드박스’ 적용 대상에 선정됐을 때 이씨에겐 안도감까지 더해졌다. 자신의 노동이 보호받을 수 있다는 기대 때문이다. 남편이 2년 뒤 직장에서 정년퇴직해도 자신의 노동만으로 소득뿐 아니라 건강보험 등 가족 복지를 보장받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씨는 아직 직접고용을 택할지 최종 결정하진 못했다.

지난달 20일 오전 서울 서대문구 한 주택에서 만난 이씨는 자신의 등급이 ‘마스터 매니저’에서 ‘스타 매니저’로 떨어진 것을 납득하지 못하고 있었다. “고객들이 매긴 별점이 원래 5점(만점)이었는데, 지금은 제가 좀 쉬고 있어서 그런지 4.87점 정도로 떨어졌어요. 항상 별 다섯개가 차있었는데 좀 아쉬워요. 그래서 스타 매니저로 내려간 것 같아요.”

가사 노동자와 소비자를 중개하는 플랫폼 ‘대리주부’에서 일감을 얻는 이동희 매니저가 지난달 20일 한 고객의 방을 청소하고 있다.  최유진 PD yujinchoi@kyunghyang.com

가사 노동자와 소비자를 중개하는 플랫폼 ‘대리주부’에서 일감을 얻는 이동희 매니저가 지난달 20일 한 고객의 방을 청소하고 있다. 최유진 PD yujinchoi@kyunghyang.com

대리주부 가사 노동자는 ‘홈 매니저’에서 출발해 일을 잘하면 ‘스타 매니저’ ‘마스터 매니저’로 올라선다. 고객들의 별점으로 등급이 결정되고, 등급에 따라 건당 수입이 2000~5000원까지 차이가 난다. 남들보다 일 욕심이 많았던 이씨는 마스터 매니저가 되기 위해 지난 4년간 주말도 없이 일했다. 원래부터 좋은 편이 아니었던 건강은 악화됐고, 그는 노동시간을 대폭 줄였다. 이씨는 회사 담당자에게 등급 회복을 문의했고 “조만간 올려주겠다”고 약속을 받았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등급은 올라가지 않았다. 인터뷰 후 이씨가 회사 측에 문의하자 회사는 1년5개월여 전 한 소비자가 부여한 낮은 별점 때문에 승급해줄 수 없다고 말을 바꿨다. 이씨에게 조만간 등급을 올려주겠다고 말한 관계자는 퇴사한 상태였다. “등급 하락에 대한 설명이 계속 바뀌어요. 1년도 더 된 후기 하나 때문에 전체 평점이 낮아지는 것도 불합리한 것 같아요.”

대리주부가 플랫폼 기업으로 전환되기 전에는 노동자들이 회사 측에 고충을 상담하는 것이 용이했다. 하지만 이제는 본사 직원이 줄어든 탓인지 더 어렵게 느껴진다. 정해진 4시간으로는 청소할 엄두가 나지 않는 집, ‘애완견 기피’ 표시를 했지만 가보니 온 집 안에 동물 털이 가득해 난감해 하다가 그냥 참고 일을 해야 했던 집, 유리를 깨뜨려 개인 비용으로 보상해줘야 했던 집…. 고객과의 사이에 생긴 여러 문제들도 점점 더 이씨 본인이 현장에서 해결하게 됐다.

인터뷰 후 이씨를 고민에 빠뜨리는 일이 또 생겼다. 한 사측 관계자로부터 “직접고용에 따른 퇴직금을 건당 급여의 10%를 떼서 마련하겠다”는 말을 들은 것이다. 이씨가 어느 한 집에서 가사노동 4시간을 하고 5만원을 받는다면 이 가운데 5000원을 퇴직금 명목으로 떼어 적립했다가 퇴직 때 돌려준다는 얘기다. “4대 보험도 아니고, 퇴직금을 원래 받던 급여에서 떼는 경우도 있나요? 일 잘하는 사람들을 붙잡아 두려는 방편인지 모르겠어요.”

이에 대해 대리주부를 운영하는 홈스토리생활 관계자는 “퇴직금은 급여와는 별도로 적립된다”며 “4대 보험료가 나가면 직접고용 후 기존에 받던 것보다 실수령액이 줄어들 수 있는데, 그것을 받아들일지는 매니저가 결정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대리주부 플랫폼에 등록돼 활발하게 가사노동을 하는 인원은 약 9000명 정도다. 이들은 한자리에 모일 기회도 없고, 단체로 의사표시를 할 길도 없는 ‘모래알’이다. 사측이 1 대 1로 공지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씨는 조만간 결정될 직접고용을 앞두고 어떤 선택을 할지 “같은 일을 하는 몇몇 언니들”과도 상의하고 있다. 그가 어떤 선택을 하든 플랫폼 경제 시대의 노동자 권리 보호와 관련해 적지 않은 의미를 가지게 될 것이다.

■목숨 걸고 탔지만 공정한 분배 받지 못하는 배달 노동자

아이디어 컨설팅 연구소 대표. 음식배달 경력 7년차인 유상석씨(52) 명함에 적힌 직함이다. 유씨는 매일 새로운 사업 아이디어를 공개하는 개인 유튜브 채널을 운영 중이다.

고교 3학년 때인 1986년 한 건축설계사무소 실습생으로 취업한 그는 10년간 이곳에서 일한 뒤 안정적인 직장을 그만뒀다. 작은 사무소였지만 4대 보험에 가입된 정규직이었고, 나올 때는 퇴직금도 받았다. 퇴직 후 그는 자칭 ‘국내 최초 아이디어 컨설턴트’로 활동하며 언론도 탔다. 중간에 한 대기업에 들어가기도 했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유씨는 “직장생활이 안정적일 수는 있지만 아이디어를 만드는 사람으로서는 기업의 조직 형태가 사람을 죽인다”고 했다.

지난달 20일 서울 송파구 문정동에서 배달 노동자 유상석씨(52)가 오토바이를 타고 음식을 배달하고 있다. 이준헌 기자 ifwedont@

지난달 20일 서울 송파구 문정동에서 배달 노동자 유상석씨(52)가 오토바이를 타고 음식을 배달하고 있다. 이준헌 기자 ifwedont@

외환위기 여파 속에 많은 사업이 그랬듯 유씨의 사업은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다. 2012년 겨울 그는 가족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거주지가 있는 서울 송파구에서 야식집 배달 일을 시작했다. 평생 처음 타본 오토바이였다. 일한 지 며칠 지나지 않아 2차선에서 유턴하던 택시와 부딪히는 큰 사고가 났다. 하지만 유씨는 어떤 보상도 받지 못했다. 당시 야식집 사장은 다친 그를 찾아와 카드 단말기만 챙겨갔다.

6개월쯤 뒤 배달대행업체가 생기자 유씨 같은 배달 노동자가 일하는 방식도 바뀌었다. 한 식당에 속해 그곳 음식만 배달하는 게 아니라, 대행업체와 계약한 식당들에 주문이 들어오면 ‘바로고’, ‘부릉’, ‘생각대로’ 등 스마트폰 음식배달대행 애플리케이션에 뜬 ‘콜’을 받아 음식을 배달했다.

이 같은 방식이 시장에 자리 잡으면서 수입이 다소 증가하고 일거리 찾기가 수월해지는 등 긍정적 효과도 있었다. 하지만 수입 증가는 배달량과 노동시간이 증가하는 등 노동 강도가 높아진 데 따른 것이었다. 예전엔 식당이 부담했던 비용도 배달 노동자가 부담하게 됐다. 지난 11월 민주노총 서비스연맹 정책연구원이 고용노동부 용역을 받아 작성한 ‘플랫폼 노동 보호와 조직화 방안 연구보고서’를 보면, 배달 노동자의 월평균 근무일수는 25.4일, 하루 평균 노동시간은 14.1시간에 달했다. 수수료, 프로그램비, 보험료 등 명목으로 업체에 떼이거나, 법적으로 ‘근로자’가 아닌 ‘개인사업자’로서 이동비용, 통신비, 오토바이 유지비 등에 쓰는 돈이 월평균 151만원이나 됐다.

영화 <미안해요 리키>의 한 장면. 영화사 진진 제공

영화 <미안해요 리키>의 한 장면. 영화사 진진 제공

“건당 받는 돈은 7년 동안 2700원에서 3000원으로 고작 300원 올랐습니다. 더 많은 수입을 올리기 위해 콜을 한꺼번에 여러 개 받게 되고 그만큼 사고 위험은 높아지죠.” 유씨는 대행업체의 업무 지시를 받지만 ‘근로자’가 아니기 때문에 업체로부터 4대 보험 지원도 받지 못한다. 용역계약서도 써본 적이 없다. 2013~2018년 ‘배달의민족’, ‘요기요’, ‘배달통’ 등 국내 배달주문중개 앱 시장규모는 10배인 3조원으로 성장했지만, 최소 10만명으로 추정되는 배달 노동자 보호는 사각지대로 남아 있다. “배달 노동자들이 없었다면 배민은 4조8000억원에 매각될 만큼 성장할 수 없었을 겁니다. 배민 정규직들이 연말 12일간 휴가를 가 있던 그 시간에도 라이더들은 ‘목숨 걸고’ 달렸어요. 그런데 수건 한 장 안 돌아왔어요.”

1년 전 유씨는 배달 노동자 노동조합인 ‘라이더유니온’에 가입했다. 그는 “흩어져 일하는 특성상 단결이 쉽지 않다”고 했다. 유씨가 플랫폼 노동의 확산을 부정적으로만 보는 것은 아니다. 그 역시 일생의 꿈인 ‘발명가’로서의 재기를 준비하는 데 있어 노동시간 자율성이 여러 면에서 유리할 것 같아 라이더를 선택했다. 얼마 전에는 AI 학습데이터 가공 플랫폼 기업 크라우드웍스 교육도 받고 왔다. “오토바이를 타고 돈을 버는 것보다 노트북을 들고 다니며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일하면 내 시간을 더 가질 수 있지 않겠어요. 다만 장기근속이 사라지고 투잡, 쓰리잡을 하는 ‘긱 노동자’가 늘어나는 상황에서 사회보장제도도 이에 맞춰 바뀌어야 합니다.”

유씨의 새해 목표는 생계만을 위한 배달노동을 줄이는 대신 ‘마케팅 강의 500시간’을 달성해 라이더를 하며 목격한 외식업 성공 노하우를 널리 알리는 것이다.

※이상의 심층면접자 6명은 디지털 기술과 관련돼 있으면서 고용관계가 명확한 전통적 노동자상과는 거리가 먼 노동을 하는 사람들이다. 플랫폼 배달노동자와 가사노동자는 특정 장소에서 노무를 제공하는 ‘장소 기반 플랫폼노동자’의 사례다. 기존 오프라인 인력중개업체를 통하던 작업지시가 플랫폼을 통해 이뤄지기 때문에 노동자성이 강하고 플랫폼 종속성이 높은 점이 특징이다. 크라우드소싱 일감 노동자와 N잡러 허대리, 웹창작노동자는 노동 전 과정이 온라인상에서 이뤄지는 ‘웹 기반 플랫폼노동자’ 사례다. 장소 기반 플랫폼노동자에 비해 자영업자나 프리랜서로서의 정체성이 강하고 노동시간이나 장소의 제약이 적다. 프리랜서 정보기술(IT) 개발자는 플랫폼을 이용하진 않지만 전통적 하도급 구조하에서 일감 단위 노동을 한다는 점에서 포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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