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에서 ‘비정규직’이라는 표현이 광범위하게 쓰인 지 20여년. 정부가 신규 일자리 창출과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에 주력하는 사이 비정규직이라는 단어에도 담기 어려운 ‘비정형 노동’이 하루가 멀다하고 생겨나고 있다.
하나의 일자리는 이제 ‘일감’ 단위로 잘게 쪼개진다. 소위 ‘마이크로 노동’이다. 이러한 종류의 노동은 ‘4차 산업혁명’의 핵심이라는 인공지능(AI) 학습데이터 수집 작업에서 쉽게 확인된다. 작업자들은 집에서 컴퓨터 모니터를 들여다보고, 플랫폼 기업의 지시에 따라 마우스 클릭만 몇 번 하면 그만이다. 숙련된 기술이 필요 없는 단순노동이지만 일하는 만큼 돈이 들어온다. 언제 어디서든 할 수 있기에 육아와 병행할 수도 있다. 대신 휴가지에서도 일을 해야 하고, 거의 매일 장시간 노동을 해야 이 일로 생활을 할 수 있다. 회사가 주는 유급휴가나 4대보험 등 사회안전망도 없다.
또 다른 예는 지난해 말 개봉한 켄 로치 감독의 영화 <미안해요, 리키>에 등장한 ‘0시간(제로아워) 계약’ 노동자다. 정해진 노동시간 없이 임시직 계약 후 일한 만큼 급여를 받는 형태다. 늘 시간에 쫓기며 노동을 하지만 최저 생계선을 벗어나지 못하는 영화 속 돌봄노동자 애비의 모습은 이제 ‘규제 샌드박스’ 적용을 받은 대리주부를 통해 한국에도 상륙하게 됐다.
20여년간 두 차례 큰 경제위기를 거치며 우리 사회에는 이런 노동을 하려는 산업예비군들이 수도꼭지를 틀면 쏟아지는 물처럼 꽉 차서 대기 중이다. 한국노동연구원 분석에 따르면 이런 ‘플랫폼노동자’는 지난해 전체 노동인구의 2% 정도지만 그 수는 계속 늘고 있다. 기존 분류법으로 담아낼 수 없는 새로운 노동이 매일 생겨난다고 한다.
경향신문은 이 같은 노동을 ‘녹아내리는 노동’으로 부르고자 한다. 이는 일의 테두리가 사라져 형체를 알아보기 힘든 노동이다. 작업장과 작업장 아닌 공간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생산과 휴식 시간의 경계가 사라지며, 고용주와 노동자 및 소비자의 경계도 흐려진다. 과거 표준적 고용관계 속에서 보호받는 노동의 모습이 분명했다면, 이제는 어떤 것을 노동이라 부를지조차 불분명하다.
자본주의 세계화와 기술 발전이 이를 추동하고 있다. 비용을 수반하는 전통적 고용관계를 벗어나려는 기업의 욕망은 당장 소득이 되는 일거리를 얻으려 줄 선 노동자와 편리함을 좇는 소비자의 양면 시장을 실시간 중개하는 플랫폼 기술로 실현되고 있다. ‘혁신’ 사업가들은 “이제 일자리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일거리”라며 향후 ‘일감 노동’이 표준이 될 것이라고 선언한다. 일자리 통계에 집착하는 정부는 이런 노동의 확산을 굳이 막지 않는다.
노동의 미래를 말할 때 우리는 AI로 상징되는 기술이 일자리를 빼앗아갈 것이란 걱정과, 기계가 인간을 고된 노동에서 해방시킬 것이라는 기대의 양극단 사이에서 길을 잃곤 한다. 하지만 그런 논쟁은 지금 노동자의 실제 삶에는 큰 의미를 갖지 못한다. 26년 전 <노동의 종말>을 예고한 제러미 리프킨의 예언이 그대로 실현되지 않은 것처럼 현실은 두 극단 사이의 어디쯤엔가 있다. 중요한 문제는 변화하는 기술이 노동에 가져오는 눈에 잘 띄지 않는 변화이고, 이로 인해 생겨나는 기존 노동과 복지 제도의 공백이다.
이 시점에 우리 사회는 과학기술의 본질적 역할을 한번쯤 살펴야 한다. 문재인 정부 초반의 ‘4차 산업혁명’ 열기가 다소 잠잠해진 지금, 특정 기술이 삶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혁명인지, 그것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 기술 변화의 속도는 적절하고 그 길만이 유일한 대안인지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노동운동의 미래도 물어야 한다. 노동자들이 각자도생하는 현실 속에서 조직된 노동운동 중심의 노동 안정성을 논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노동자들이 한 작업장에 모여 일하던 시대에 대한 향수에서 벗어나 변화된 현실에 기반한 노동운동을 모색해야 한다.
궁극적으로 ‘기술 혁신’에도 불구하고 자기착취가 일상화하는 세상이 아니라 ‘기술 발전’과 함께 더욱 인간다운 삶과 노동이 가능한 사회를 만드는 데 필요한 ‘내:일’, 즉 ‘미래’와 ‘나의 일’의 조건들을 묻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