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도 경력…단절이 아닌 그 시간들을 ‘인증’해 드립니다

강은 기자

지자체 최초로

‘경력인정서’ 발급 조례 만든

서울 성동구의 실험

육아도 경력…단절이 아닌 그 시간들을 ‘인증’해 드립니다

지난해 11월4일, ‘경력단절’이란 용어를 ‘경력보유’로 바꾸고 육아 경험도 경력으로 인정해 구청장이 ‘경력인정서’를 발급하는 조례가 서울 성동구에서 제정됐다. 필수적인 돌봄노동의 사회적 가치를 강조하고 여성의 경력단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취지였다.

육아와 가사, 간병 등 무급 돌봄노동을 행정기관이 나서서 경력으로 인정하는 사례는 성동구가 처음이다.

조례 제정 이후 성동구에서 경력인정서 1호 발급자가 나왔다. 네 살, 여섯 살 아이를 둔 김소영씨(38)가 그 주인공이다. 김씨는 엄마이자 8년차 문화예술기획자다. “출산 이후 미혼인 동료들보다 뒤처지는 느낌”에 자신감을 상실했던 김씨는 코로나19로 회사가 어려워지면서 퇴사를 결심했다. 그러나 일을 영영 그만두고 싶진 않았다.

김씨는 “엄마로서의 삶도 중요하지만 ‘나’ 자신을 잃지 않고 싶었다”고 말했다. 마침 성동구에서 재취업 교육을 제공하고 육아에 대한 경력인정서도 발급한다는 소식을 듣게 됐다. 한 달가량 교육에 참석하며 매일 과제도 빠짐없이 제출했다. 김씨는 교육이 끝나갈 무렵 경력인정 신청서를 제출해 약 3개월의 기간을 경력으로 인정받았다. “인정서를 받으니까 내가 그동안 정말 쉰 게 아니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이전에는 정말 자신이 없었는데 마음가짐이 달라진 거예요.” 그는 지난 2월 새 회사에 취업했다.

성동구 경력인정서 정책은 어떻게 탄생했을까. 아이디어가 나오고 구체화되고 실행되기까지, 다양한 여성들의 노력이 있었다. 모두 경력단절을 경험했거나 그것을 ‘내가 겪을지도 모를 일’로 느껴본 이들이다. 한 뼘 나은 세상을 꿈꾸며 각자가 할 일을 해냈던 여성들을 만나 정책이 만들어지기까지 과정을 들어봤다.

임경지 성동구 청년정책전문관
“이것은 왜 경력이 아니란 말인가”

임경지 청년정책전문관(34)은 지난해 6월 성동구 임기제 공무원으로 입사했다. 참신한 아이디어를 중시하는 정원오 성동구청장이 구정연구기획단 기능을 강화하기 위해 처음 뽑은 보직이었다. 임 전문관은 코로나19로 기혼 유자녀 여성의 고용률이 감소하는 상황에서 도움이 될 만한 정책이 무엇일지 고민했다. 그는 행정기관 차원에서 ‘경력단절’이라는 용어를 ‘경력보유’로 바꿔 부르는 게 문제를 푸는 실마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흔히 사용되는 ‘경단녀’라는 말이 비하 섞인 말로 사용되면서 여성 스스로 주눅들고 위축될 수 있다고 봤다.

정 구청장은 “캠페인에 그치지 말고 조례를 만들자”고 얘기했다. 조례안이 완성되려면 용어 변경 이상의 구체적인 사업 계획이 필요했다. 임 전문관은 고민했다. ‘돌봄 때문에 경력이 단절된다면 무엇을 바꿔야 할까?’ ‘돌봄은 왜 경력이 아닐까?’ ‘돌봄을 경력으로 인정한다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은 경력인정서 정책 아이디어로 이어졌다.

최인성 전 더블유플랜트 대표
“돌봄은 기획자 일과 비슷해”

최인성 전 더블유플랜트 대표

최인성 전 더블유플랜트 대표

최인성
“육아, 기획자 일과 비슷
돌봄으로 인한 공백은
공백이 아니란 것을
말하고 싶었다”

임 전문관은 “입법 예고 기간 당사자 여성들이 찬성의견서를 제출해 준 게 조례안이 통과되는 데 큰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대표적인 곳이 지속 가능한 일과 삶을 고민하는 여성들의 멤버십 커뮤니티인 ‘창고살롱’을 운영하는 스타트업 ‘더블유플랜트(W Plant)’였다. 당시 대표 최인성씨(36)는 찬성의견서를 제출하며 “돌봄은 기획자 일과 비슷하다”고 적었다. 한 사람을 키워내기 위해서는 목표를 세우고, 전략을 수립하고, 여러 선택 중 우선순위를 매기는 등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하다는 의미였다.

이는 최씨 본인의 경험에서 길어 올린 통찰이었다. 그는 언론매체 오마이뉴스에서 10년 가까이 기자로 일하면서 아이 둘을 낳았고 일과 육아 사이에서 갈팡질팡했다. 동료들과 엄마의 서사를 담은 웹진 ‘마더티브’를 발간해 모성 신화에 가려진 여성들의 삶을 끊임없이 이야기했다. “아이를 낳은 걸 후회한 적은 없지만 아이를 키우는 게 이렇게 힘든 일이라는 걸 왜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는지 너무 원망스러웠어요. 돌봄노동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정말 많은 역량이 필요해요. 돌봄으로 인한 공백은 공백이 아니라는 점을 얘기하고 싶었습니다.”

국미애 서울시여성가족재단 연구원
“정책 실효성 높이는 게 중요”

조례가 통과됐으나 풀어야 할 과제는 남아 있었다. 새로운 정책이 만들어지다 보니 세밀하게 다듬어야 할 부분이 많았다. 서울시여성가족재단 국미애 박사(47)의 조언이 큰 도움이 됐다.

국 박사는 대학생 시절 총여학생회 활동을 하며 ‘그 많던 잘난 여학생들은 어디로 갔을까’ 물음을 품고 살았다. 여성학을 공부하기 위해 대학원에 진학했고, 아르바이트 하던 일터에서 고객에게 성희롱을 당한 경험을 계기로 ‘여성의 노동’이 주 연구 분야가 됐다.

국 박사는 성동구 경력인정서 정책을 전해 들었을 때 오히려 “우려가 더 컸다”고 말했다. “분명 좋은 취지이지만 자칫 잘못하면 돌봄은 여성의 일이라는 고정관념을 굳어지게 만드는 부작용이 생길 수도 있다”는 게 국 박사의 생각이었다.

정책의 실효성을 높이는 것도 중요하다고 봤다. “구청이 경력인정 기간의 범위를 적절히 제한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5년, 10년 장기 경력단절까지 인정하면 이를 기업이 수용하기 힘들기 때문이죠.”

성동구는 경력인정 범위를 최대 24개월로 제한한다. 미취업 상황에서 무급 돌봄노동 기간이 1개월 이상인 경력보유 여성에게 발급되는데, 성동구에 거주하거나 성동구 소재 기업에 취업을 희망할 경우 별도의 경력인정 프로그램을 수료하고 일정 자격의 검증을 거쳐야 한다. 지난 2월에는 남성도 돌봄노동 경력을 인정받을 수 있도록 조례 개정안을 냈다.

노유진 위커넥트 이사
“양육자의 역량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노유진 위커넥트 이사

노유진 위커넥트 이사

노유진
“시간관리 능력, 공감능력, 위임능력…이런 게 양육자의 역량”

본격적인 사업 진행을 맡은 건 스타트업 ‘위커넥트’의 공동대표 노유진 이사(32)였다. 위커넥트는 경력보유 여성 구직자들을 기업과 연결하는 플랫폼이다. 창업 초기부터 ‘경력보유’라는 용어를 적극적으로 사용했다. 노 이사는 성동구의 여성 재취업 프로그램인 ‘커리어 리스타트 챌린지’를 확대해 여성이 경력인정 신청서를 작성하는 데 필요한 교육을 기획·진행했다.

“양육자가 기를 수 있는 전문 역량 12가지가 있다는 외국의 한 소셜벤처 창업자 얘기가 인상 깊었어요. 남을 믿고 일을 맡길 수 있는 ‘위임능력’, 자투리 시간을 잘 활용하는 ‘시간관리 능력’, 표정이나 행동으로 타인의 욕구를 읽어내는 ‘공감능력’ 이런 것들이죠.”

노 이사는 지난 1월 이전 회사 동료들과 ‘결혼이주여성’의 분투기를 담은 책(<거기까지 가서 그렇게까지>)을 냈다. 2015년 결혼하면서 남편의 직장이 있는 세종으로 거처를 옮겼던 경험은 삶의 환경을 완전히 바꿔놨다는 점에서 ‘이사’가 아닌 ‘이주’였다. “세종에서 직장을 못 구해서 4개월 정도 단절을 겪으면서 전문성이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그는 “출산 계획이 있지만 이후에도 일과 돌봄을 원하는 방식으로 해내고 싶다”고 말했다.

성동구의 ‘경력인정서’는 성공한 정책이 될 수 있을까. 아직은 알 수 없다. 임 전문관은 말했다. “이 ‘종이 한 장’이 누군가에게 가능성이 됐으면 좋겠어요. 한두 분씩 좋은 사례가 쌓여서, 그래서 한 2000명이 이 증명서를 받는다면, 그때는 변화가 일어날 수 있지 않을까요.”


청년 남성단체 ‘행동하는 보통 남자들’이 여성의날에 보낸 연대 메시지


육아도 경력…단절이 아닌 그 시간들을 ‘인증’해 드립니다

“우리의 연대가 혐오를 이긴다. 차별·갈등은 가고 평등과 포용의 세상을 기대하고 기도하며 기다리겠다!”
유호준·1995년생·회사원

“여성이 안전하면 우리 모두가 안전합니다. 함께 연대하여 평등과 포용의 가치를 지켜 나갑시다.”
김태환·1994년생·대학원생

“가까운 사람들을 위해 행동하는 용기가 다른 이에게도 확장될 수 있다고 굳게 믿습니다.”
정재현·1996년생·대학생

“트랜스젠더 남성도 곁에 있습니다. 함께 연대하겠습니다. 혐오가 가득한 세상, 함께 싸워 나갑시다.”
김정현·1990년생·활동가

“어려운 시기입니다. 하지만 언젠가 차별과 혐오를 이겨내고, 폭력 없는 세상을 함께 만들 것을 믿습니다.”
김연웅·1995년생·청년단체 대표

“더 이상 숨지 않겠습니다. 곁에서 함께하겠습니다. 성평등한 세상 같이 만들겠습니다.”
고선도·1998년생·제조업 직장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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