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정치·낙태죄·웹하드 카르텔…아직 바꿀 게 많은 세상, 여성의 목소리는 멈추지 않는다

이유진 기자

색으로 보는 ‘싸우는 여자들’

‘혐오정치 중단(STOP)’ ‘낙태죄를 폐지하라’ ‘웹하드 카르텔 밝혀내라’ ‘#미투(MeToo) #위드유(WithYou)’ ‘동일노동·동일임금’….
정치적 권리, 노동할 권리, 몸에 대한 권리 등 여성의 권리는 투쟁의 역사를 통해 만들어졌다. 여성들은 지금도 가정에서, 일터에서, 거리에서 각자 당면한 문제에 맞서 싸우고 있다.
여성의 구호는 언어에만 그치지 않는다. 색을 입고 더 선명해진 구호는 끊임없이 세상에 균열을 낸다. 지난 5년, ‘싸우는 여자’들은 어떤 색으로 거리를 물들였을까.

참정권부터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까지

2018년 3월4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세계 여성의날 기념 한국여성대회’ 참석자들이 ‘미투’ ‘위드유’ 고깔모자를 쓰고 있다. 정지윤 기자

2018년 3월4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세계 여성의날 기념 한국여성대회’ 참석자들이 ‘미투’ ‘위드유’ 고깔모자를 쓰고 있다. 정지윤 기자

세계여성의날을 앞두고 열리는 여성계 가장 큰 행사인 ‘한국여성대회’에는 보라색 손팻말이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지난 5일 서울 종로구 보신각 앞에서 열린 제37회 한국여성대회도 어김없이 보랏빛으로 물들었다. 참석자들이 손에 쥔 팻말에는 ‘모두의 내일을 위해, 오늘 페미니즘’이란 문구가 쓰였다. 2020년 7월28일 서울시청 광장에 모인 여성들도 보라색 우산을 들었다. 한국성폭력상담소와 한국여성의전화 등 8개 여성단체 관계자들로, 고(故)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성추문 의혹에 대해 국가인권위원회의 직권조사를 촉구하는 자리였다.

보라색은 전 세계 여성운동 현장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정확한 유래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역사는 100년 이상 거슬러 올라간다. 20세기 초 영국에서 일어난 여성 참정권 운동을 다룬 영화 <서프러제트>(아래 사진)에는 여성들이 보라색 꽃을 주고받는 모습이 등장한다. 초창기 서프러제트 운동가들은 참정권 운동의 상징으로 흰색, 녹색, 그리고 보라색을 앞세웠다. 흰색은 순수, 녹색은 희망, 보라색은 정의·존엄을 상징했다. 보라색은 훗날 여성운동을 상징하는 색으로 남았다. 일각에선 빨강을 여성, 파랑을 남성에 비유해 보라색을 남녀를 아우르는 ‘성평등’의 색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혐오정치·낙태죄·웹하드 카르텔…아직 바꿀 게 많은 세상, 여성의 목소리는 멈추지 않는다

각성하는 ‘분노’…“여성은 출산 기계가 아니다”

2018년 12월22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불법촬영 범죄와 법원의 편파 판결을 규탄하는 집회 참가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연합뉴스

2018년 12월22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불법촬영 범죄와 법원의 편파 판결을 규탄하는 집회 참가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연합뉴스

2018년 5월19일 오후 3시 서울 종로구 혜화역 2번 출구 일대는 붉은색 옷을 입은 여성들로 가득 찼다. 익명의 여성단체 ‘불편한 용기’ 주최로 열린 ‘불법촬영 편파 수사 규탄 시위’였다. 웹하드 카르텔 등 불법촬영 범죄를 규탄한 이날 시위에는 경찰 추산 1만명, 주최 측 추산 1만2000명이 모였다.

‘여성’이라는 단일 의제로는 국내 최대 규모의 집회였다. 시위는 2018년 12월22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6차시위’까지 약 7개월간 이어졌다. 시위 참가자들이 붉은색 옷을 통일해 입어 ‘붉은 시위’라는 별칭으로도 불렸다. 주최 측은 옷 색깔을 통일한 이유에 대해 “빨강은 분노의 상징”이라고 밝혔다.

빨간색은 여성에 대한 억압을 상징하면서 여성의 각성도 상징한다. 여성이 ‘출산 기계’로 전락한 세상을 그린 마거릿 애트우드의 디스토피아 소설 <시녀 이야기>에서 시녀 계급은 하얀 가리개(보닛)와 붉은 망토를 착용한다(아래 사진). 이들은 철저히 출산용으로만 관리되는 여성들로, 붉은 망토는 ‘걸어 다니는 자궁’을 뜻한다.

반면 여성혐오에 대한 각성은 ‘빨간 약’에 비유됐다. 영화 <매트릭스> 주인공 네오가 빨간색 약을 먹고 매트릭스 바깥의 진짜 세상을 마주한 데서 따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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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불의에 침묵하지 않겠다 #미투

2018년 11월10일 서울 종로구 다시세운광장에서 시위 참가자들이 미투 운동 지지 퍼포먼스를 벌이고 있다. 미투운동과함께하는시민행동 제공

2018년 11월10일 서울 종로구 다시세운광장에서 시위 참가자들이 미투 운동 지지 퍼포먼스를 벌이고 있다. 미투운동과함께하는시민행동 제공

“마이 보디, 마이 초이스(My body, my choice)!” 2019년 3월9일 서울 종로구 보신각에서 검은색 옷을 입은 여성들은 이렇게 외쳤다. 여성모임 ‘비웨이브(BWAVE)’가 주최한 ‘임신중단 전면 합법화 시위’는 2016년 10월부터 이날까지 총 19회 진행됐다. 2017년 9월27일 출범한 ‘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 역시 집회를 열 때마다 참가자들의 의상을 검은색으로 통일했다.

한국판 ‘검은 시위’는 폴란드 검은 시위(아래 사진)와 같은 맥락을 띤다. 폴란드에서는 2016년 보수 집권당 ‘법과정의당’이 임신중단(낙태)을 전면 금지하는 법안을 마련하자 10만명이 넘는 여성이 검은 옷을 입고 거리로 나왔다. 거센 반발에 부딪쳐 법안은 하원에서 부결됐다.

여성운동사에 한 획을 그은 ‘미투(MeToo·나도 고발한다)’ 운동의 상징색도 검정이다. 미투 운동은 2017년 10월 할리우드 거물 제작자 하비 와인스타인의 성범죄가 고발되면서 시작됐다. 한국에서도 정계, 문화예술계 , 학계 등 분야를 막론하고 성폭력 피해자의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2018년 국내 여성의날 행진은 성폭력 피해자와 연대한다는 의미로 검은색 옷을 입고 흰 장미를 든 채 진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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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사이드·유리천장…여전히 변화가 필요해

지난 2월27일 서울 중구 서울파이낸스센터 앞에서 열린 ‘2022 여성혐오 대선 규탄 시위 집회’ 참가자들이 손팻말을 들고 있다. 한수빈 기자

지난 2월27일 서울 중구 서울파이낸스센터 앞에서 열린 ‘2022 여성혐오 대선 규탄 시위 집회’ 참가자들이 손팻말을 들고 있다. 한수빈 기자

지난달 27일 서울 광화문에서 ‘여성혐오 대선 규탄’ 집회가 열렸다. ‘하얀 시위’로도 불린 이날 시위에는 여성 250여명이 흰옷을 입고 등장했다. 주최 측은 흰색 옷이 ‘페미사이드(여성 살해)’로 세상을 떠난 여성들을 기리는 ‘상복’을 의미한다고 밝혔다. 이들은 “여성 참정권이 생긴 지 74년이 됐지만 여전히 혐오를 선동하는 정치권을 바꾸기 위해 거리로 나왔다”고 했고, 청와대 사랑채 앞까지 약 2㎞를 행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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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1월7일 미국 최초의 여성 부통령이자 흑인 부통령이 된 카멀라 해리스가 대선 승리 연설을 위해 연단에 서자 언론은 그의 옷차림에 주목했다. 해리스는 하얀색 정장에 하얀 푸시 보 블라우스(pussy-bow blouse)를 받쳐 입었다(사진). 뉴욕타임스는 이 의상에 여성 참정권과 유리천장을 깨기 위한 투쟁의 의미가 담겼다고 해석했다. 이날 연설의 한 대목은 이랬다. “100년 전에는 수정헌법 19조(성별에 따른 투표권 차별 금지)를, 55년 전엔 투표권(여성 차별 불법화한 민권법)을 위해 싸운 여성들이 있었다면 2020년에는 목소리를 낼 권리를 지키기 위해 투표한 새로운 세대의 여성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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