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이파이도 없는 정출연에서 디지털 혁신을?읽음

김우재 낯선 과학자

[주간경향] 1년간 정부출연연구소(이하 정출연)에서 방문연구원으로 일한 경험이 있다. IT 환경이 정말 열악했다. 일단 와이파이가 없다. 국가정보원이 금지해 연구자들은 와이파이 자체를 사용할 수 없다. USB 사용도 금지돼 있다. 그러니 데이터를 옮기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구글, 네이버, 아마존 클라우드 등은 아예 사용이 불가능하고, e메일도 기관 e메일이 아니면 사용 자체가 불가능하다. 카톡도 텔레그램도 모두 막혔고, 메신저 프로그램 대부분이 작동하지 않는다. 국가연구기관이니 인터넷보안이 중요하다는 점을 감안해도, 이건 보안 때문에 연구환경이 완전히 망할 수준이다.

상황이 이러니 클라우드 데이터로 공유되는 국제유전체 컨소시엄 연구나 브레인 커넥톰(connectome) 연구는 꿈도 꿀 수 없다. 젊은 연구원들은 어떻게라도 연구를 해보려고 스마트폰 무제한 데이터를 이용해 컴퓨터에 연결하고, 나이든 연구원들은 아예 첨단 연구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심지어 과학기술 관련 데이터센터가 바로 옆에 있는 상황에서, 오피스 프로그램 설치를 위해 행정실에서 CD롬을 빌려야 하는 코미디가 펼쳐지는 곳, 그게 한국공공연구기관의 실체다. 연구소 행정직원들은 연구소의 주인인 연구원들의 편의 따위는 어디다 내버린 지 오래고, 상위 부처의 눈치나 보며 연구의 효율성을 방해한다. 관료주의가 한국 과학기술의 발목을 잡고 있다.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공공연구기관 적체와 개혁

한국의 연구개발비는 국민총생산 대비 세계 1위다. 2020년 기준 총연구개발비는 93조717억원, 이중 79.1%는 민간부문이 가져가는 예산이다. 나머지 연구비는 대학과 공공연구기관에 배분된다. 2020년 공공연구기관이 사용한 연구비는 11조1186억원, 대학은 8조3534억원이었다. 하지만 2020년 공공연구기관의 연구원 수는 4만1005명으로 11만5924명인 대학에 비해 3분의 1 수준에 불과하다. 뭔가 잘못돼 있다.

2020년 국가연구개발사업 성과분석보고서에 따르면, 공공연구기관의 SCIE 논문 성과는 전체의 17.6%, 대학은 76.7%였고, 국내 및 해외 특허 성과에서도 공공연구기관은 대학에 비해 크게는 두 배 이상 뒤졌다. 오히려 기술료와 사업화 성과에서는 중소기업이 독보적인 성과를 보여 사실상 한국 공공연구기관의 위상은 산업화 시기에 비해 확실히 축소됐다. 공공연구기관의 개혁이 정권이 바뀔 때마다 등장하는 이유다.

원자력연구소라는 상징으로 역사에 기록된 한국 정부출연연구소는 과학기술력을 바탕으로 한국이 지금에 이르게 만든 주역이었다. 1970~1980년대 한국 연구개발의 주역은 정출연이었고, 지금도 한국 연구개발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음이 분명하다. 2000년대로 접어들면서 대학과 민간이 연구개발을 주도하는 상황에서 한국 정부는 정출연 개혁의 시기를 놓쳤다. 그 여파는 20년이 넘도록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정출연은 한국 연구개발지형도 속에서 골칫거리가 된 지 오래다.

이런 상황에서 정출연의 리더십은 정치에 오염됐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정출연 수장 공모엔 수많은 ‘정치과학자’가 몰린다. 정출연 수장이 캠프에 일찌감치 줄 선 인사들의 낙하산이라는 건 과학기술계에선 공공연히 알려진 일이다. 이렇게 정치권의 줄을 타고 임명된 원장들은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거나 연구소의 효율을 깎아내린다. 현장이 원하는 수장이 임명되는 일은 거의 없고, 정치인과 관료들에게 휘둘린 정출연의 연구실적은 갈수록 후퇴하고 있다.

디지털 강국의 길

지난 9월 23일 윤석열 대통령을 따라 해외순방에 나선 이종호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은 “대한민국, 디지털을 통한 세계질서 주도 구상을 제시하다!”라는 자긍심 넘치는 페이스북 포스팅을 올렸다. 대통령과 장관이 뉴욕 실리콘앨리에서 ‘디지털 비전 포럼’에 참석해 “디지털 혁신의 세계 모범국가 대한민국의 디지털 비전을 전 세계와 공유하고 자유, 인권, 연대라는 인류 보편의 가치를 지키기 위한 새로운 질서를 제안”했다는 것이다. ‘좋아요’가 겨우 49개 달린 이 포스팅의 내용처럼 한국이 디지털 분야의 리더로 세계를 선도할 수 있다면 정말 좋을 것이다. 그런데 정출연에 와이파이부터 설치하면 좋겠다. 정출연 와이파이도 없이 디지털 혁신을 말하는 건 누가 봐도 코미디다.

미중의 패권경쟁으로 매일 세계질서가 빠르게 변하고 있다. 중국의 전기차가 세계시장을 석권하고 있고, 한국은 대중국 무역적자를 내기 시작했다. 미국은 ‘근린궁핍화 정책’을 실시해 우방국의 경제조차 악화시켜 자국의 경제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미국과 중국이 패권경쟁의 핵심으로 삼는 건 첨단과학기술이다. 미국은 이미 오래전부터 과학기술 인재들을 통해 기술력을 확보해왔고, 중국이 엄청난 과학기술 인재를 흡수하기 시작한 이후, 미국이 중국을 경계하기 시작한 것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최근 미국 국무부는 조직을 개편하고 데이터 과학자를 대거 채용하면서 디지털 정책국을 신설했다. 과학기술의 시대, 과학기술 인재 없이 정부조직은 절대로 움직일 수 없다.

반도체 분야의 최고 전문가인 이종호 장관은 미중 패권의 엄중한 시기에 중책을 맡았다. 디지털 혁신을 선포하기 전에 과기부부터 내부 조직을 디지털화하고 관료주의를 걷어내려 노력해야 한다. 장관은 국정원장부터 찾아가 연구를 못 하겠다고 따져야 한다. 정출연이 새로 태어날 수 있도록 채찍과 당근을 들어 매일 밤샘 토론을 해야 한다. 메타버스니, NFT니 하는 허상을 좇지 말고, 튼튼하고 안정적이며 유연한 기반 위에서 한국의 연구개발이 도약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각종 행사에 찾아가 아무 의미 없는 연설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윤 대통령은 토론토에서 인공지능의 세계적 석학들을 만나 인공지능의 현재를 진단하고 바람직한 발전방안을 논했다. 잘한 일이다. 그는 “다양성이 인정되고 관용이 높은 사회적 분위기, 결과에 연연하지 않는 꾸준한 정부의 지원, 끈기 있는 연구자의 노력이 캐나다가 인공지능 강국으로 도약할 수 있었던 이유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대통령이 그 행사에 참여한 한국 민간기업의 전문가들이 도약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주면 좋겠다. 진심이다. 그리고 진심으로 대통령이 그가 말한 다양성과 관용이라는 단어의 뜻을 이해하고 있길 바란다. 비속어 따위로 시간을 낭비하기엔 한국이 처한 상황이 너무 심각하다. 지금부터 열심히 국가의 연구개발을 재정비해야 한다. 제발 부탁이다. “육첩방은 남의 나라”여도, 우리는 “눈물과 위안으로” 서로 “악수”해야만 한다(윤동주의 1942년작 ‘쉽게 씌어진 시’에서 인용). 그것만이 살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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