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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목소리

“온건하지만 치열한 언니가 뒤에 있다”

기혼 페미니스트 임정아씨 이야기
  • 기혼 페미니스트 임정아씨(가명, 38세)
  • 1980년 출생
  • 2001년 호주제 폐지 운동 참여, 영페미 활동
  • 2004년 여초커뮤니티 마이클럽·82cook·레몬테라스 활동 시작
  • 2010년 트위터 활동 시작
  • 2011년 결혼
  • 2015년 2월 ‘#나는 페미니스트다’ 선언 참여
  • 2015년 출산, 본격적으로 가정 내 페미니즘 운동 시작
  • 2018년 8월4일 광화문에서 열린 제4차 불법촬영 편파수사 규탄 시위 참석
임정아씨(38‧가명)의 집은 트위터 페미니스트들의 사랑방이다. 매주 목요일 점심이면 그의 거실에 마련된 티 테이블에 20대부터 50대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여성들이 모인다. 전통 차를 공부 하는 것이 목적인 모임이지만 이들에게 가장 뜨거운 화두는 언제나 페미니즘이다.
지난달 18일, 테이블에 30대 여성 3명이 둘러앉았다. 차 한 잔에, 각자의 가정에서 벌어지는 ‘페미니즘 전쟁사’가 조잘조잘 오고갔다. 이들에게 남편과의 싸움은, 자신의 딸에게 ‘살 만한 세상’을 물려주기 위한 ‘투쟁’이다.

임정아씨의 집은 트위터 페미니스트들의 사랑방이다. 20~50대의 다양한 연령대의 여성들은 정아씨의 티 테이블에 모여 앉아 페미니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곤 한다.

“내 딸이 이런 세상을 산다고 생각하니
정신이 번뜩 들더라.”

어떻게 페미니스트가 됐나

“경상도 출신이다. 위로 누나 셋에 막내아들이 하나 있는, 전형적인 ‘아들 바라기’ 집안의 장녀다. 엄마는 딸을 가질 때마다 임신중절을 하며 고통스러워했지만, 아버지는 엄마의 고통에 관심조차 없는 폭력적인 가부장이었다. 딸이라는 이유로 차별받는 것은 일상이었다. 12살 때부터 가사와 육아를 도맡아했다.

여자이기 때문에 받는 모든 차별에 대해, 어릴 때부터 억울하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10대가 되면서 아버지에게 ‘엄마 때리지 마세요’, ‘여자는 조신해야 한다고 하지마세요’라며 대들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나를 ‘별난 애’ 취급했다.”

“대학교 3학년이었던 2001년, 고은광순 선생님과 이유명호 선생님이 주도하는 ‘호주제 폐지를 위한 시민의 모임’에 참여하게 됐다. 호주제의 부당함에 대해 공부하고 호주제 폐지를 요구하는 운동*에 참여하면서, 어릴 때부터 내가 느낀 ‘억울함’은 한국 사회의 모든 여성들이 겪어온 구조적 차별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그 시절 ‘영페미’*들의 활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한국여성민우회 등 여성 단체가 주도하는 시위나 ‘월경 페스티벌’에도 참여했다. 최근 대중화된 생리컵이나 성인용품도 일찍이 접할 수 있는 기회도 됐다. 이렇게 여자도 편하게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됐다. 그리고 이런 세상을 보지 못하게 하는 가부장제라는 ‘시스템’이 작동하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됐다.”

*호주제 폐지 운동

호주제 폐지 운동은 한국 여성운동사에서 전례 없는 수준의 전략과 역량이 총동원된 운동으로 평가받는다. 2000년 9월 한의사인 고은광순씨와 이유명호씨가 중심이 돼 발족한 ‘호주제폐지를 위한 시민연대’는 운동에 불을 지피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 137개 여성·시민회단체가 호주제 폐지 청원, 위헌소송 추진, 서명운동 등을 벌였고, 2005년 3월2일 호주제는 폐지됐다.

*영페미

2) 1990년대 중반 온라인을 기반으로 등장해 2000년대까지 두각을 나타낸 대한민국 페미니스트들을 지칭하는 말. 온라인 커뮤니티인 ‘언니네트워크’, 스스로 여성임을 자각하고 여성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축제의 장을 만든 ‘월경페스티벌’, 운동권 내 성폭력 타파를 목표로 한 ‘100인 위원회’, 영상을 통한 여성 읽기를 시도한 ‘여성영상집단’ 등이 대표적이다.

그 후 페미니스트로서의 ‘변곡점’이 있다면 무엇인가?
“2011년 결혼을 했다. 나는 사실 그때만 해도 ‘착하고 성실한 남자’를 만난다면, 괜찮은(가부장적이거나 성차별적이지 않은) 결혼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이전까지 내가 페미니즘에서 배운 것은 ‘여성도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누려야 한다’는 주장과 논리였다. 하지만 성별에 따른 권력관계는 구조적으로 작동되고 있다는 것, 그래서 아무리 착하고 성실한 남자라 해도 무의식적인 성차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딸을 낳고 모든 것이 달라졌다.”
출산 이후 페미니스트로서의 삶이 달라진 것인가?

“그렇다. 2015년 메갈리아의 ‘미러링’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딸을 낳고 6개월 뒤 메갈리아가 세상에 나왔다. 미러링은 그동안의 한국 남성들이 해 온 언행을 새롭게 자각한 계기였다. 불평등한 가사 분담부터 여성에게만 가혹한 외모 지적까지 한국 사회에는 여성혐오가 손을 뻗치지 않은 영역이 없었다. 전에는 몰랐던 남편의 맨스플레인*, 가스라이팅*의 실체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내가 낳은 아이가 ‘딸’ 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여태껏 그런 사회에서 살아왔으니 앞으로도 참고 살아갈 수도 있었다. 그런데 내 딸이 이런 세상을 앞으로 살아간다고 생각하니 정신이 번뜩 들더라. 내가 자란 가부장적이고 성차별적인 가정을 딸에게 물려줄 수는 없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페미니스트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때부터 남편을 상대로 페미니즘 투쟁을 시작했다.”

*맨스플레인

남자(man)와 설명하다(explain)을 결합한 단어로 남자가 여자에게 잘난 척하며 아랫사람 대하듯 설명해주는 것을 뜻한다. 2010년 뉴욕타임스는 ‘올해의 단어’로 선정했다.

*가스라이팅(gaslighting)

타인의 상황이나 심리를 교묘하게 조작해 현실감과 판단력을 잃게 만드는 행위. 정신적으로 황폐화된 상대에게 지배력을 행사해 결국 파국으로 몰고 가는 것을 의미하는 심리학 용어다. 위력에 의한 성폭력, 데이트 폭력이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뒤늦게 알게 된 남편의 모습은 어떤 것인가.

“어느 날 남편이 부엌에서 냉장고를 열더니 ‘뭐가 이리 많아?’라고 툴툴대며 짜증을 냈다. 남편은 의식하지 못했지만, 그건 나에게 ‘가정주부로서 집안일을 제대로 안 하고 있다’고 꾸짖는 것이다. 전에는 남편의 그런 행동에 별다른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했다. 그런데 미러링을 해보니 이상해졌다. 내가 퇴근하는 남편에게 ‘오늘 일 제대로 했냐?’고 간섭하는 것은 ‘비상식적’인 상황이지 않은가. 그런데 왜 남편의 말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을까. 남편은 주부의 업무도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가스라이팅’을 한 것이다.

남편이 ‘식비가 왜 이렇게 많이 드느냐, 이런 육아용품이 다 필요하긴 한 것이냐’고 한 적도 있다. 나를 과소비하는 사람, 생활비를 축내는 사람으로 취급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주부로서 생활비를 관리하고 필요한 물건을 구매하는 총 책임자이다. 이제는 이런 말이 명백한 ‘가스라이팅’이라는 것을 알지만 예전에는 ‘내가 정말 그런가?’하고 주눅이 들었다. 남편이 업무를 위해 돈을 쓰는 것을 ‘축낸다’고 표현하지 않듯이, 남편도 나에게 그런식으로 말하면 안 된다는 것을 몰랐다. 페미니즘을 공부한 적이 있고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소개하면서도, 미러링을 접하기 전에는 가부장제가 강요하는 여성상을 그냥 받아들이고 이 기준에 맞지 않는 나의 행동을 스스로 질책하고 있었다.”

그렇게 남편과의 싸움이 시작된 것인가?

“그렇다. 미러링은 싸움에 필요한 언어가 되기도 했다. 남편에게 ‘내가 당신 월급 가지고 뭐라고 한 적 있냐?’며 맞받아치기 시작했다.

처음 미러링으로 남편의 성차별적 발언을 받아치기 시작했을 때 남편은 무척 당황했다. ‘왜 자기를 한남충 취급하며 욕을 하냐’는 것이다. 그러면 나는 ‘당신을 욕하는 게 아니라 당신이 나에게 했던 말들이 얼마나 말이 되지 않는지를 얘기해주는 거야’라고 답했다. 그렇게 일일이 반박한지 1년쯤 지나니 남편이 변하기 시작했다. 남편이 그러더라. ‘이제 보니까 너만 유난인 게 아니라 여자들 모두가 느끼는 아픔이었네.’”

“격변적인 운동은 젊은 피가,
온건하지만 치열한 운동은 우리가”

그렇게 남편도 페미니스트로 ‘각성’한 건가?
“남편이 완전히 각성하려면 아직 멀었다. 이건 평생 가는 싸움이다. 남편에게 나와 이혼하기 싫으면 페미니즘 책을 읽고 공부하라고 했다. 미러링만으로는 남편의 언행을 완전히 고칠 수 없고, 딸을 위해서는 남편의 변화가 절실했다. 기혼 페미니스트들이 이렇게 치열하게 산다.(웃음) 여기 전부다 마음속에 이혼 소장 하나씩 써뒀다. (테이블에 모여 앉은 다른 여성들을 가리키며) 안 바뀌면 언제든지 갈라선다는 생각으로 남편과 싸우고 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싸워나갔나?

“남편에게 아이를 맡기고 집을 나갔다. 아무리 말해도 변하지 않으니, 가사와 육아에 파업을 선언하고 나가는 것밖에 답이 없다고 생각했다. 아이가 ‘가지 말라’며 울 때, 나도 같이 울었다. 마음이 아팠지만 가정의 페미니즘을 이루지 못하면 모두 행복할 수 없다고 생각해서 결국 나갔다. 남편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다 하겠다’고 했다. 한 달 뒤 집으로 돌아가며 각서를 써달라고 했다.

‘일주일에 한번 페미니즘 도서 읽겠다.

하루에 최소 30분은 아내와 대화하겠다.

아내와 아이에게 짜증을 내거나 소리를 지르지 않겠다.

잘못한 이후에는 반드시 사과하겠다.’

각서를 받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 후로도 남편이 약속을 지키지 않아 몇 번 더 집을 나왔다. 싸움을 하기 보다는 집을 나서서 감정이 가라앉고, 각자 생각할 시간이 생긴다. 출산 후 몇 년간 지속됐던 우울감과 스트레스도 해소됐다. 돌아와 대화를 나누면 더 나은 결론이 생겼다.

이렇게 과격한 방법을 쓰고 나서야, 남편이 나를 사람으로 보는 것 같다. 나 역시 이제 남편이 사람으로 보인다. 적이 아니라, 같이 사는 동지로 보인다. 이렇게 되기까지 3년이 걸렸다.”

이것을 페미니즘 ‘운동’이라고 볼 수 있을까?
“그렇다. ‘남편을 어떻게 변화시킬까’ ‘우리 가정을 어떻게 더 평등하게 만들까’ 기혼 페미니스트들의 가장 큰 고민이다.”
기혼 페미니스트들의 이러한 운동 중요한 이유 무엇인가?

“세상이 변하기 위해서는 급진적인 혁명도 필요하지만 천천히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가는 사람들의 노력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후자의 역할을 기혼 여성들이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격변적인 운동은 젊은 피가 하고, 온건하지만 치열한 우리의 싸움이 뒤에서 같이 가야 한다. 우리의 운동은 다음 세대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 우리가 만든 평등한 가정에서 아이들이 자라고 있다. 10~20대 페미니스트들이 우리를 보면 답답한 부분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혼 페미니스트와 기혼 페미니스트의 연대는 반드시 필요하다. 각자가 집에서 남편 한 명씩 붙잡고 제대로 (성평등) 교육시키면 사회 전체로는 큰 변화다. 그렇게 만드는 느린 변화도 병행돼야 확실한 변화가 가능하다.

“‘나는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
을 전제로 말하던 때가 있었다.”

온라인에서의 페미니즘 궤적을 쫓자면 어떤 식인가?
“인터넷을 막 시작하던 2000년대 초중반 ‘마이클럽’, ‘82cook’, ‘레몬테라스’ 등 여초 커뮤니티에서 주로 활동했다. 연애를 하다가 남자친구가 나를 멸시하는 말을 하면, 커뮤니티 게시판에 글을 올렸다. 지금은 ‘여성 혐오’의 맥락에서 논란이 되는 말들이다. 당시 여초 커뮤니티에는 그 전 세대부터 페미니즘 활동한 사람들이 있었다. ‘네 잘못이 아니고 남자가 여자를 무시해서 생기는 일’이라고 답을 해줬다. 인터넷에서의 여성들과 연대하기 시작한 것도 그 즈음이었다. 인터넷 바깥 세상에서는 이런 고민을 토로하면 ‘그냥 네가 참아’라고 말하는 사람들밖에 없었을 때였다. 온라인에서 위로와 연대의 공간을 찾았다.”
당시 여초 커뮤니티에서 경험한 페미니즘 활동 중 기억에 남는 것이 있나?
“2004~2005년쯤 ‘마이클럽’에서 있었던 일이다. ‘김항문’이라는 닉네임으로 여성 생식기 사진을 계속적으로 올리며 분탕질을 하는 유저가 있었다. 커뮤니티 회원이었던 40대 여성이 이 사람을 고소했고, IP(아이피) 추적에 나선 회원도 있었다. 결국 이 사람은 미국에서 체류 중인 남성 유학생으로 밝혀졌다. 국외에 있어 당장 처벌은 못했다. 하지만 한국에 들어오면 음란물 유포 혐의로 처벌받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여자들끼리 이뤄낸 통쾌한 승리였다.”

임정아씨가 소장 중인 페미니즘 도서들

세월이 흐르면서 여초 커뮤니티 안에서 느낀 변화는 없나?
“2000년대 초중반만 해도 여자를 ‘가정의 꽃’, ‘윤활제’라고 언급하는 글이 주로 올라왔다. 기혼 여성이 남편에 대한 불만을 남기면 ‘참고 살라’는 댓글이 많았다. ‘어떻게 하면 개념녀가 될까’, ‘어떻게 하면 남자들한테 사랑받을 수 있을까’ 이런 이야기들도 많았다. 그런데 2010년부터 ‘여자의 경제력이 중요하다’는 이야기가 더 많이 나오기 시작했다. ‘참고 살아라’보다 ‘참지 말고 이혼해’라는 댓글이 더 많아졌다.
트위터에서의 페미니즘은 언제부터?
“2010년 ‘진보적이지만 이해받지 못해 외로운 사람들이 모여 있다’고 추천을 받아서 2010년 트위터를 시작했다.(웃음) 2015년에 ‘#나는 페미니스트다’ 선언이 나왔을 무렵 나도 동참했었다. 재밌었다.”
어떤 점이 재미있었나?
“2000년대만 해도 여성들이 성평등을 얘기할 때 보통 먼저 ‘나는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이라는 전제를 깔고 의견을 내놨다. 그렇게 해야 ‘개념녀’인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페미니스트’ 선언이 이어지면서 너도나도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했다. ‘남성들이 이상한 사람으로 낙인찍지 않을까’하는 걱정은 없었다. 그것보다는 ‘사회가 여성을 더 존중해야 한다’고 외치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 이후로 ‘#나는 메갈이다’ 선언도 이어졌던 것으로 알고 있다. 여성들이 더 이상 남자들의 시선에 개의치 않고 살아가겠다는 외침의 시작이었던 것 같다.

“‘그냥 저런 남자들은 내버려두자’는
생각들이 남자들을 괴물로 키웠다.”

‘영페미’ 시대를 겪은 정아씨의 ‘#나는 페미니스트다’ 선언은 젊은 1020 페미니스트의 경험과는 조금 달랐을 것 같다.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나는 20대 초중반 페미니스트들이 오히려 저희 세대보다 더 똑똑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선배 페미니스트 모임에서 많이 듣고 배우긴 했지만, 우리 세대 여성들 대부분은 사실 온순한 여성들로만 키워졌다. 내가 대학에 갈 때만 해도 여자는 공부를 잘 해도 서울에 있는 대학 대신 지방 국립대를 보내는 경우가 있었다. 시대가 그랬기 때문에 ‘여성 인권’을 생각하는 것이 어려웠다.”

“호주제 폐지 운동에 참여했을 때 호주제를 왜 폐지해야하는지, 여성의 인권이란 무엇인지, 가부장제의 문제점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는 지금처럼 분노가 일지는 않았다. 여전히 ‘남자 중에 좋은 남자도 많을 거야. 일부 이상한 남자들이 문제인 거야’라는 생각을 버리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일상 곳곳에 물든 여성혐오와 성차별을 느낀다. ‘아무리 좋은 남자라도 가부장의 권력을 누리고 있으며, 아무리 똑똑하고 능력 있는 여자도 억압받는 여성의 삶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나 역시 10대~20대 페미니스트처럼 새로운 페미니즘을 접하고 있는 것이다.”

왜 이전에는 몰랐을까?

“앞선 세대의 페미니스트들은 일상의 여성 혐오까지 건드리지 못했던 것 같다. 남자들은 설거지를 하지 않으며, 여성의 외모를 서슴없이 평가하는 것에 일일이 태클을 걸지 못했다. ‘저런 남자들은 내버려 두자’는 생각들이 남성들을 괴물로 키워버렸다. 굉장히 한스럽다.”

“일상에서의 불평등 문제를 지적할 언어 자체가 없었던 시절이다. 대학 새내기였던 스무살 초반 쯤 ‘된장녀’ 얘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스타벅스 커피 마시면 ‘된장녀’라고 하더니, 나중에는 찻집 가서 차만 마셔도 ‘된장녀’라고 했다. 그런데 ‘된장녀’라는 말은 있어도 ‘된장녀라고 여성을 비하하는 단어를 사용하는 한국 남성’을 이르는 말은 없었다. ‘된장녀’의 정의가 얼마나 허구적이며 잘못됐는지 알고 있었지만 딱히 반박할 언어를 갖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10년이 넘도록 ‘된장녀’를 내버려뒀다. 지금처럼 받아칠 언어가 있었더라면, 맞설 언어가 있었더라면 더 빨리 인식하고 싸웠을 텐데 말이다.”

‘남자 중에 좋은 남자도 많을 거야’라는 생각 깨졌던 순간들 중 기억에 남는 것 있나?

“유명한 ‘#○○계 내 성폭력’ 해시태그 운동에 앞서서 엠네스티 한국지부 이사장 출신인 고은태 교수의 성희롱 파문이 있었다. 고은태씨는 진보적인 내용의 트윗을 많이 올리는 ‘파워 트위터리안’이었고 나 역시 몇 년 동안 그의 글을 읽었다. 인권단체 출신답게 인권 감수성이 높았고, 점잖았으며, 센스가 있다고 평가했다. 성희롱 폭로가 처음 나왔을 때 설마 그 사람이 그랬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며칠 뒤 피해자에게 굉장히 미안해졌다. 내가 봤을 때 ‘그럴 리가 없는 사람’이라고 해서 ‘그렇지 않다’고 단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 역시 남들에게 존경받던, 누가 봐도 멀쩡한 남자들로부터 많은 성희롱을 당했었으니까.”

“이후 ‘#○○계 내 성폭력’ 해시태그 운동을 거치면서 트위터에서 활동하던 ‘진보 남성’들이 많이 사라졌다. 자신이 속한 분야에서 폭로가 나오면 가해자를 두둔하려고 헛소리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 사람들은 여자들과 같은 공기를 마시지 않는구나’ 이런 느낌이었다. 정말 믿을 건 여자들밖에 없다. 우리끼리 껴안고, 손을 잡아야 된다는 생각이 강해졌다. 남자에 대한 인류애가 사라졌다.”

“남성들도 세월이 지나면 같이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래디컬 페미니스트와 다른 페미니스트 간 갈등이 심해지고 있는 것 같다.

“나는 스스로를 어떤 페미니스트라고 규정하지 않는다. 나는 페미니스트다.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은 ‘탈코르셋’을 주장하며 머리를 짧게 자르고, 브라를 벗어 던지고, 화장을 하지 말자고 한다. 그런데 나는 머리가 짧고 주로 노브라지만 화장하는 걸 즐긴다. 그럼 나는 무엇일까?”

“내가 볼 때는 두 페미니스트의 갈등이 시작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1년도 안됐다.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이 기혼 여성과 남자 어린이들을 공격하기 시작한 이후였던 것 같다. 기혼 여성을 ‘가부장제의 부역자’라고 정의하고 ‘X빨러’라는 비속어로 비난했다. 한국의 남자 아이들에게 ‘한남유충’이라는 수식어도 붙였다.

거친 표현이 문제가 아니다. 같이 손잡고 나아가야 할 여성들을 공격하기 위해 사용한 표현이라는 것이 문제다. 페미니스트끼리도 지향점과 방법론, 각자의 상황이 다를 수 있다. 래디컬 페미니스트가 기혼 여성들은 ‘가부장제에 속해 있다’고 비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남자 아이를 키우는 상황에서의 페미니즘이라는 새로운 주제를 다뤄볼 수 있다. 그러나 일부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은 대화보다 미러링으로 만든 비속어로 기혼 여성들을 공격했다. 미러링은 남성들과 ‘좋은 말’로 대화할 수 없는 상황을 해결하기 위한 ‘전략’이었다. 그런데 이야기를 충분히 듣고 대화할 수 있는 여성들을 공격했다는 점이 래디컬 페미니스트와 그렇지 않은 페미니스트간의 갈등을 생긴 것이 아닌가 싶다.”

래디컬 페미니스트 중에서는 워마드 이용자도 있는데, 이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워마드의 성소수자 혐오에는 동의를 하지 않는다. 실제 남성 성소수자 중에 여성 혐오가 심한 사람이 있는 것으로 안다. 이런 이유로 워마드에서 활동하는 여성들이 남성 성소수자들에게 분노를 느끼는 것에 대해서는 심정적으로 이해한다.

“혁명은 불을 질러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을 한다. 워마드는 그런 역할을 한다. 물론 워마드가 하는 강도 높은 미러링 전략은 정치적으로 옳은 방식은 아니다. 그런데 정치적으로 올바른 방식은 먹히지 않았다.”

“워마드 활동가나 트위터의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이 어떤 삶을 살아 왔는지 알고 있다. 학창시절, 성적이라는 명확한 수치로 남학생들을 앞섰지만 사회에 나와서는 남성들보다 좋은 일자리를 갖지 못한다. 게다가 불법촬영, 성폭력의 위협 속에서 일상을 산다. 우리는 ‘학생이 화장을 하면 큰 일이 나는’ 세대였는데, 이 친구들은 어릴 때부터 꾸미지 않으면 욕을 먹는 세대다. 이들이 살아가는 세상을 보면 이전 세대 페미니스트들이 세상을 온건하고 부드럽게 설득해온 전략은 효과적이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올바른 페미니즘, 잘못된 페미니즘 따로 있다고 생각하나
“잘못된 페미니즘이라면 이미 페미니즘이 아닐 것이다. 다만 페미니스트 각자의 삶에서 다양한 노선을 만들 수는 있다. 노선이 다르다고 함부로 판단하거나 비난하지 않고, 서로 지지하고 응원하고 지켜봐주는 태도가 필요하다.”
앞으로 페미니즘 어떻게 가야되나

“남성들도 시간이 지나면 (페미니즘에서) 같이 가야한다고 생각한다. 남성들도 더 이상 남자라는 이유만으로 여성과 아이들을 포함한 약자를 해치지 않기를 바란다. 여성을 함부로 대하는 것이 ‘남자다움’으로 칭송받는 세상은 병든 세상이다. 세상의 절반을 구성하는 여성들과 인간 대 인간으로 소통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남성들도 페미니스트가 돼야 한다. ‘가부장’과 ‘맨박스’*에서 벗어나서 사람다운 행복을 누리며 살 수 있기를 바란다.”

*맨박스

남성 페미니스트 토니 포터가 쓴 <맨박스>(2016·한빛비즈)에서 유래한 말. 가부장제가 강요한 남자다움에 대한 강박을 의미한다.

“언니가 함께 싸워줄 테니까”

혜화역에서 열린 불법촬영 편파수사 규탄 시위 나갔나?

“가고 싶었다. 그런데 아이를 데리고 갈 수가 없었다. 혜화역 시위에 주로 참가하는 래디컬 페미니스트 사이에는 기혼 여성을 혐오하고 배제하는 분위기가 있다. 남성들에게는 ‘맘충’이라 불리고 같은 페미니스트들 사이에서는 ‘가부장제 부역자’라고 불리는 게 우리다.”

“그렇지만 만일 기혼 여성을 배제하고, 운동권을 배제하는 방법으로 페미니즘의 세력이 확장될 수 있다면, 나는 그 전략을 유지해야 한다고 본다. 일단 페미니즘 세력을 키운 뒤 의견의 다양성을 꾀하는 것도 좋다고 생각한다.”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은 주류 페미니즘에서 외면 받고 있다는 이야기들을 한다.
“내가 알기로는 래디컬 페미니스트 대부분이 10대~20대인 것으로 알고 있다. 1020 여성들이 페미니즘 운동 시작한 것은 3년 안팎이다. ‘왜 이렇게 세상이 빨리 바뀌지 않냐’는 글을 본 적이 있다. 조바심을 내기보다는, 연대하며 기다리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언니들은 언제든지 싸워줄 것이다. 기혼이든 비혼이든, 1020이든 3040이든, 어떤 정체성을 가졌든 같이 손잡고 가야 될 이들은 우리 여성, 페미니스트라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다.“

임정아씨는 이제 더 이상 딸에게 여아용 팬티를 입히지 않는다. 가격이 비슷한 남아용 팬티의 사이즈가 훨씬 넉넉해 아이도 편안함을 느끼기 때문이다. 정아씨가 원래 딸에게 입히던 파란색 팬티가 새로 구입한 남아용 팬티들보다 훨씬 작고 불편한 모양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여자 팬티는 너무 불편하더라”

래디컬 페미니스트에게 배운 게 있다면?

“옷에 대해 많이 배웠다.(웃음) 여성용 팬티가 아닌 남성용 팬티를 사라는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여성용 팬티만 불편하게 나온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래서 지금 남자 팬티로 싹 바꿨다. 편하다. 정말 편하다. 왜 이렇게 좋은 옷을 지금까지 남자만 입고 살았는지 억울할 정도다.”

“남편도 금방 납득했다. 우리 딸 팬티를 보고 놀란 것이다. 3~4살짜리 어린아이들이 신체적으로 남녀 차이가 얼마나 있을까. 그런데도 남자아이들의 팬티는 넉넉한 사이즈에 통풍도 잘 되고 입기도 편하게 나오는데, 같은 나이의 여자 아이의 팬티는 손바닥만한 크기에 레이스까지 달려 있어서 입으면 따갑다. 내가 보여주겠다. (정아씨는 딸에게 입히던 여아 팬티와, 지금 입히는 남아 팬티를 비교해 보여줬다. 실제로 여아용 팬티는 엉덩이를 덮어주는 부분이 작았다) 나는 그래서 이제 삼각 팬티가 아닌 드로즈를 입힌다. 여아용 옷은 작고, 비싸고, 불편했다. 최근에는 나도 남자 옷을 사고 있다.”

“여성들은 불편하더라도 예쁜 모습을 유지하도록 강요받는다. 나는 살이 잘 붙고 가슴이 커서 남자들의 눈치를 보느라고 항상 몸을 움츠리고 다니는 버릇이 있었다. 결국 척추측만증이 생겼다. 나는 내 몸에 대한 자유로움을 못 느끼고 자랐지만, 요즘 친구들은 ‘탈코르셋’을 한다. 한 반에 3~4명만 ‘탈코’를 해도 10대 여성들 사이에서는 언제든 합류할 수 있는 분위기가 형성된다. 이들에게 배울 점이다.”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의 운동에서 우려되는 지점이 있다면?
“화장하는 것이 ‘탈코르셋’인 사람도 있다. 여성 장애인들은 ‘장애인이 무슨 치마야’ ‘장애인이 무슨 화장이야’ 이런 편견 때문에 오히려 꾸미지 못하는 억압 속에서 살아왔다. 그 사람에게는 치마를 입고 화장을 하는 게 ‘탈코르셋’일 수 있다. 사람마다 그렇게 페미니즘 노선이 다르다. 가정에서 페미니즘 싸움을 하고 있는 기혼 여성들을 가부장제 부역자라고 하는 게 문제인 이유다.”

임정아씨는 지난 4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불법촬영 편파수사 규탄 시위’에 처음으로 참석했다.

혜화역 시위에 바라는 게 있다면

“파이가 커졌으면 좋겠다. 자격 제한을 넓혀야 한다는 것이다. 남성 중심적인 사회에 대한 반동이나 저항의 의미로 여성에게만 참여를 허용하는 것은 일리가 있다. 안전상의 문제도 이해할 수 있다. 실제로 내가 참여한 그 어떤 시위보다 쾌적하고, 안전했고, 청결했다. 하지만 젠더퀴어와 기혼 여성에 대한 배제는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남자 아이조차 시위에 데려와서는 안 된다고 하는데, 그 남자아이에게 페미니즘 가르치지 않으면 딸들을 페미니스트로 만들어도 소용이 없다.”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은 ‘비혼과 비출산이 답’이라고 한다. 이 또한 하나의 노선이다. 하지만 모두가 결혼을 하지 않고 아이를 낳지 하지 않는다면 다음 세대는 없다. 이 세대는 다음 세상 위한 길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페미니스트가 아닌 사람들을 페미니스트로 만들어 다음 세대를 위한 길을 닦아야 한다.”

(앞서 혜화역 시위에는 참여하지 않았던 임정아씨는 지난 8월4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열린 제4차 ‘불법촬영 편파수사 규탄 집회’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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