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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번째 목소리

“페미니즘은 다양한 소수자와 만나야 한다”

10대 페미 김주연씨
  • 대학원생 김겨울(가명, 27세)
  • 1991년 출생
  • 2000년 전후 3년간 캐나다에서 조기유학
  • 2004~2006년 중학교 시절 ‘페미니스트’ 단어를 처음 접함.
  • 2008년 월드오브워크래프트를 하면서 게임 커뮤니티 ‘인벤’ 활동. 여성 비하 문화가 있어 남성인 척 했음
  • 2010년 대학 입학. 유학시절 경험을 바탕으로 인종차별 반대운동을 하면서 ‘교차성 페미니즘’을 접함
  • 2011년 소셜미디어 ‘텀블러’ 접하고 활동 시작.
  • 2012년 양성애 성적지향을 인지함
  • 2015년 메갈리아 활동 시작. 트위터 활동 시작. 마비노기 영웅전을 하면서 인벤 활동 재개.
  • 2016년 워마드 운동방식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의견 밝힘. 강남역 살인사건을 계기로 열린 '달빛시위' 참가.
  • 2018년 고등학교 시절 기숙사에서 불법촬영을 당한 사실을 수년 만에 알게 됨.
대학원생 김겨울(27)은 2년 전 강남역 살인사건 직후 열린 달빛집회에 나갔다. 하지만 그는 불법촬영 피해자임에도 올해 혜화역에서 진행된 ‘불법촬영 편파수사 규탄집회’에는 나가지 않았다. 혜화역 3차 시위 날에는 광화문광장에서 낙태죄 폐지 촉구 집회에 참가했다.
어린 시절 유학한 경험을 바탕으로 인종차별 반대운동을 해 온 김겨울은 페미니즘이 다양한 소수자성과 만날 때 가치 있다고 믿는다.
그는 메갈리아 활동을 열심히 했지만 워마드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트위터에서 이런 발언을 하면서 소위 ‘래디컬’ 페미니스트로부터 ‘쓰까페미’로 분류됐고 ‘트친’도 많이 잃었다. 온라인에서 논쟁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성별로 나뉜 공간보다 수평적인 공간이 좋다.”

온라인에서 페미니즘 활동을 언제부터 시작했나.
“2011년부터 텀블러에서 인종차별 반대운동을 했다. 텀블러가 우리나라에는 불법촬영물이 유통되는 플랫폼으로 주로 알려져 있지만 차별에 맞서 활동하는 사람도 많다.”
여초 커뮤니티에서도 활동하나.

“해 본 적 없다. 학창시절 여자 친구들과 잘 지내는 게 어려웠던 때문이 아닐까 싶다.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고등학교 3학년 때까지 학교에서 심하게 왕따를 당했다. 지우개를 내 서랍에 넣고 ‘어디 갔는지 모르겠네’ 하다가 내 서랍에서 나오면 ‘도둑X’이라고 하는 식이었다.

어학연수를 다녀오니 아이들 관심사는 온통 아이돌에 쏠려있는데 저는 관심이 없었다. ‘XX년이 왜 지랄이야’ 같은 욕설을 듣는 것도 적응이 안 됐다. 캐나다에선 아이들이 욕을 잘 안 했다. ‘갓 댐(goddam)’이라는 말만 써도 선생님한테 크게 혼이 났다.

대화에 끼지 못하자 계속 표적이 되는 듯 했다. 여성들끼리 있다고 해서 그 공간이 꼭 안전하지는 않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게 됐달까. 그래서 여초 커뮤니티, 혹은 성별로 이분화된 공간에는 거부감을 가지게 된 것 같다. 나이나 성별에 상관없이 사람들이 수평적으로 모인 곳이 좋았다.”

왕따를 당하면서 여성들끼리 있다고
꼭 안전하지는 않다는 걸 알았다.
성별로 이분화된 공간에 거부감을 갖게 됐다.
수평적인 공간을 경험한 적이 있는지.
“관심사 위주의 커뮤니티가 비교적 그런 분위기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싸이월드 ‘고양이여서 다행이야’ 커뮤니티에 가입했다. 구출한 길고양이나 자기 고양이 사진을 올리기도 하고 ‘고양이한테 생일 케이크를 만들어 줬다’고 자랑하기도 하고. 그냥 고양이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인 거니까 굉장히 편안했다.”
여성문제에 눈뜬 건 언제?

“제가 어릴 때부터 ‘메갈’ 이었다(웃음). 엄마가 집안일 시킬 때 ‘너는 여자니까 이런 걸 배워야 돼’라고 하면 그 때마다 ‘왜 내가 하고 (남)동생은 안 해’ 하고 반발했다. 엄마가 처음에는 ‘얘가 어리잖아’라고 했는데 남동생이 더 자라도 집안일은 시키지 않았다.

초등학교에선 아이들 번호를 매기잖나. 남자들은 1번부터 여자들은 16번부터. 남자애들이 여자애들 부르면서 ‘너네는 뒤처진다’고 했던 기억도 생생하다. 4학년 즈음이면 2차 성징이 나타나는데 반에 가슴이 좀 큰 아이가 있으면 남자 아이들이 걔가 지나갈 때 ‘젖소 지나간다’고 했다.

운동회 때는 여자 아이들이 부채춤을 췄는데, 남자들이 도령 옷을 입고 돌아다니면서 여자들이 절하는 대목에서 ‘헴헴’ 하고 서 있곤 했다. 그러면 여자애들은 화가 나서 남자 아이들을 부채로 때리고 그랬다. 그때까지는 여자 아이들 덩치가 더 크니까.”

한국에서 ‘아이스케키’를 정말 많이 당했다.
캐나다에 가니 선생님이 아이스케키는 성추행이라고 했다.
캐나다에선 어땠나.
“분위기가 많이 달랐다. 초등학교 4학년 때까지 아이스케키를 정말 많이 당했는데, 유학을 갔더니 선생님이 아이스케키는 성추행이라고 했다. 같은 반에 한국에서 온 남자아이 한 명이 있었는데, 초등학교 5학년 때 아이스케키를 하니까 선생님이 당장 부모를 불렀다. ‘아이가 문제가 있다. 이런 행동이 나중에 성범죄가 될 수 있다’는 취지로 말했던 걸로 기억한다. 너무 놀랐다. 한국에 있을 때는 내가 남자 아이들을 찾아다니고 때리면서 직접 응징해야 했는데.”

‘개념녀’ 되려고 그렇게 애를 썼다니

페미니즘을 처음 알게 된 건?
“중학교에서 ‘페미니스트’라는 단어를 접했다. 남자 아이들이 여자 아이들의 브래지어 끈을 당기는 식의 장난을 하다가 여자 아이가 화를 내면 ‘너 꼴페미냐’고 했다. 아마 게임 커뮤니티에서 그런 단어를 접한 게 아닌가 싶다. 2004~2006년이니 남자아이들이 한창 스타크래프트를 하던 때다. ‘꼴페미야’ 라고 하면 뭔 지는 모르겠지만 안 좋은 건가 했다.”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나타나는 여성혐오에 어떻게 대응했는지.

“고등학교 때 월드오브워크래프트를 하면서 게임 커뮤니티 ‘인벤’ 활동을 했다. 같은 게임을 하는 사람들이 모였는데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는 글이 많이 올라왔다. 여성 캐릭터에 속옷을 입혀 ‘짤’을 만들어 올린다거나 여성 유저를 비하하고 공격하는 일이 많았다. 여성 유저들은 남성인 척 하거나 아니면 남성이 좋아할 만 한 셀카를 올려 관심을 받는 방식으로 생존 전략을 짜는 것 같았다.

저는 남성인 척 했다. 그러다 보니 나도 모르게 남초 특유의 여혐 문화에 물들었던 것도 같다. 대입 준비로 바빠 게임을 그만뒀다가 대학생이던 2015년 즈음 다시 게임을 시작했더니 성적인 공격이 더 흔해진 걸 느낄 수 있었다. 2010년~2015년 사이에 ‘일베’ 문화 같은 것이 퍼진 게 아닌가 싶었다. ‘캐릭터 보지 먹고 싶다’같은 말은 고등학교 때는 들어본 적 없는 것이었다.”

언제부터 스스로 페미니스트라고 생각?

“고등학교 때 나름대로 책을 찾아보면서 페미니즘을 접하게 되면서다. 그런데 지금 와서 생각하면 나는 페미니스트가 아니라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는 ‘명예남성’ 이었던 것 같다.

남자 아이돌을 좋아하는 친구들을 보면서 ‘왜 저딴 애들한테 목을 매지?’ 하고 생각했다. ‘저들은 깨어있지 않으니 내가 계몽해야 한다’고도 믿었다. 아이돌을 좋아할 수도 있는 거고 내가 뭐라고 할 일은 아닌데. ‘나’와 ‘저들’을 나누고 ‘나는 다른 여자와 달라’라고 구분하면서 혐오했던 거다.”

나는 페미니스트가 아니라
페미니스트를 자처한 명예남성이었다.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것 같나.

“여성혐오에 기반한 말들이 쏟아지던 때였다. 당시 미국 드라마 ‘섹스앤더시티’가 유행이었다. 여기 나오는 여주인공들이 브런치를 먹고, 성에 대해 거침없이 말하지 않나. ‘브런치 먹으면 된장녀’로 비하하고, 아닌 사람은 ‘개념녀’로 대비하기 시작했다. ‘섹스앤더시티’에서 주인공이 스타벅스에 자주 간다. 이화여대 앞에 스타벅스 1호점이 생겼을 때 ‘애들이 섹스앤더시티 보고 허영심 채우러 스타벅스에 간다’는 말이 남초 커뮤니티에 굉장히 많이 돌았다.

나도 ‘여자가 자기 능력 키워서 독립적으로 살지 못하고 누군가에게 나약하게 의존하는 것은 옳지 않다, 여성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일이다’라고 생각했다. 고3 때는 ‘미수다 루저 발언*’ 사건이 있었다. 당시 나는 그 (발언을 한) 여성이 잘못했다, ‘무개념이다’라고 생각했다.”

*미수다 루저 발언

2009년 KBS ‘미녀들의 수다’에서 각 대학 ‘캠퍼스퀸’을 섭외했다며 여대생의 대학생활을 주제로 한 토크쇼를 방영했다. 서울 한 대학 출신 여성 출연자 이모씨는 이 방송에서 “키 작은 남자와 사귈 수 있느냐”는 질문을 받자 “외모가 중요해진 오늘날 키는 경쟁력이다. 키 작은 남자는 루저라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이 발언은 즉각 논란이 됐고 이씨가 재학 중인 대학에까지 항의 전화가 빗발치는 등 비난이 쇄도하고 온라인에서 사생활 파헤치기와 희화화가 계속됐다. 이씨는 결국 본인 실명 싸이월드 미니홈피에 “물의를 일으키게 된 점 죄송하다. 대본대로 말했을 뿐이다”라고 해명했으나 남성들의 분노는 가라앉지 않았다.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이후 여성이 국내 모 기업에 취업했으나 ‘루저 발언’ 사실이 알려져 채용이 취소됐다거나 결국 이민을 갔다는 등의 풍문이 돌았다.

페미니스트로서 어떤 실천을 했나.

“기숙학교에 다녀서 집회는 참가하기 어려웠고 당시엔 나갈 만 한 집회도 많이 없었다. 여성의 꾸미기를 비판했던 기억이 난다. 여학생은 반바지 교복을 입을 수가 있었는데 후배들이 밑단을 올려서 바지를 짧게 만들어 입곤 했다. 나와 친구들은 그게 ‘값싸 보인다’고 했다.

당시에 나는 스스로를 페미로 생각했고 친구들은 아니었는데 결론은 똑같았다. 저는 페미니스트 논리를 빌려와 여성성 혐오를 한 것이고 친구들은 당시 여초 커뮤니티에서 돌던 여성성 혐오를 한 것이었다.”

내가 생각한
‘자주적이고 독립적인 여성’의 상(像)은
남성들이 만들어 낸 ‘개념녀’라는 걸
한참 뒤 깨달았다.
여성성을 혐오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지금과 달리 당시에 여초 커뮤니티에서는 ‘자연미인 추구’가 유행이었다. 성적 좋은 아이들이 모여 있어서인지 학교에서도 아이들이 화장하는 학생에 대한 큰 거부감이 있었다. 고등학교 졸업 선물로 집안에서 성형수술비를 대 주는 문화가 있었는데 동시에 성형한 여성에 대한 비하도 심했다. ‘성괴(성형괴물)’라는 말이 막 생겨났고 ‘화떡녀(화장 떡칠한 여자)’도 유행했고 청소년을 가리킨 ‘룸나무(룸살롱 꿈나무)’라는 말도 그즈음 생겨났다.

‘쟤네는 저렇게 해서까지 예뻐지려 하는데 우린 그러지 말자’였다. 커뮤니티에서는 앞섶 파인 옷 입은 사진을 올리면 ‘싸 보인다’ ‘창녀 같다’ ‘남자들에게 관심 받으려고 안달났냐’ ‘관심종자다’라고 비난하는 문화가 여초 커뮤니티에 있었다. 자연 곱슬머리인 학생에게 ‘본분에 안 맞게 파마한다’는 말이 돌았고 이목구비가 뚜렷한 아이를 두고는 ‘성형했다’는 말이 나왔다.

대학 커뮤니티에서는 ‘더치페이’가 화두였다. 성재기씨가 더치페이 안 하는 여성은 ‘창녀랑 뭐가 다르냐’는 말을 한 게 퍼져서다. 더치페이 안 하는 여성? 지금은 저는 ‘아니, 돈이 없으면 그럴 수도 있지’라고 생각하는데 당시에는 ‘저건 옳지 않다. 왜 독립적으로 살지 않냐’고 생각했던 것 같다. 스스로 ‘자주적이고 독립적인 여성’이라고 생각한 이미지가 사실은 남성들이 만들어 낸, ‘된장녀’와 대비한 ‘개념녀’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건 나중의 일이다.”

나는 남성이 만든 기준에 저항하고
동시에 순응하는 이중 억압에 놓여 있었다
어떤 계기로 생각을 바꾸게 됐나.

“나는 페미니스트고 자립적이고 독립적이니까 이러이러해야 한다, ‘화떡녀’와 나는 다르다라는 강박 속에 살았다. 화장을 하기 시작한 게 3년이 채 안 된다. ‘나는 화장하지 않아도 예쁘다’, ‘나는 자연미인이다’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우울증이 심하게 왔다. 살이 많이 빠지고 건강이 나빠졌다. 나를 괴롭힌 게 무엇인지 정리해 보기 시작했다. 남성이 만든 온갖 기준에 저항하면서 동시에 순응하는 이중적 억압 구조 속에 내가 놓여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고 나서 텀블러를 통해 페미니즘을 다시 접했다. 당시 텀블러에는 ‘내가 뭘 하든 니가 뭔 상관이냐’ 하는 조류가 있었다. 해방감을 느꼈다.

트위터에서는 (이런 흐름을) ‘리버럴’이라고 부르지만, 내가 푹 빠졌던 것은 자유주의라기보다는 당시 텀블러를 휩쓸던 ‘교차성 페미니즘’이었다. 사람들이 논문 링크를 올리고 책을 추천해 주면 열심히 읽었다. 벨 훅스의 책은 거의 다 읽었다.

그러면서 왜 내가 스스로를 독자적, 독립적이라 생각하면서도 남성들이 만든 행동 규준에 나를 맞추려고 했는지 깨달은 것 같다. 그 때 내 화두는 쭉 ‘나는 왜 여성성을 혐오했는가’였다. ”

‘김치녀’라는 말이 너무 이상했다.
외국에서 한국인을 차별하려 쓰는 ‘김치’를
왜 남성들이 다시 여성을 차별하는 데 쓸까
인종차별 반대운동을 하게 된 건 어떤 계기?

“12살부터 14살까지 캐나다에서 살았다. 인종차별을 많이 당했는데 당시에는 자각하지 못했다. 워낙 어렸고 한국에서 그런 경험을 해본 적이 없었으니까. 나를 보면서 눈을 찢는 시늉을 한다든지, 밥을 먹고 있으면 와서 ‘너는 왜 쌀만 먹어?’ 라고 말하곤 했다.

20대가 되어서 해외 블로깅 사이트를 찾다가 텀블러를 알게 됐다. 사회운동 하는 사람들과 그곳에서 교류했다. 영어를 할 수 있어서 가능했다. 특히 아시아계 미국인들과 많이 어울렸다.”

인종차별 반대운동이 페미니즘과는 어떻게 연결 됐나.

“2012년부터 한국에서 ‘김치녀’라는 말이 유행했다. 너무 이상하게 느꼈다. ‘제 살 깎아먹기’같았다. 외국에서 한국인을 차별하는 데 쓰는 ‘김치’라는 말을, 왜 국내에서 남성들이 다시 여성을 차별하는 데 쓸까. 왜 남자들은 굳이 ‘김치’라는 말을 써서 스스로를 비하할까.

동시에 ‘갓양녀’ ‘백마’ 이런 말도 돌아다녔다. ‘오늘의유머’나 ‘MLB파크’ 같은 남초 커뮤니티에는 ‘우리도 다 우크라이나에 가서 김태희 같은 여자들하고 결혼하자’ ‘왜 우리가 똥양녀(동양녀)랑 결혼해야 되나’ 같은 글들이 올라왔다.

인종차별에 대해 배우면서 같은 ‘공격’에도 여성이 더 취약하다는 걸 배웠다. 전족도 원래 한족이 만주족에게 점령을 당하니 자신의 문화적 정체성을 부각하기 위해서 여자들에게 더 가혹하게 강요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미국에서는 같은 흑인이라도 남자보다 여자의 피부가 더 밝아야 한다고 여기는 경향이 있다. 이런 사례들을 보면서 인종차별과 페미니즘이 ‘교차하는’ 지점에 대해 많이 생각했다.”

양성애자는 ‘박쥐’라는 비난을 들었다

스스로 퀴어라고 인지한 것은 언제인가.
“스무살 넘어서야 양성애자임을 자각했다. 원래 여자 아이돌이 좋았다. 친구들과 얘기하다 누군가 ‘여자 아이돌이 좋지만 키스하고 싶고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지지하는 것’이라고 했다. 거기서 ‘아니, 키스할 수도 있지’라고 했다가 레즈비언으로 몰렸다. 열 두 살 사춘기가 시작될 때 여성에 대한 성애를 많이 느꼈는데 그제야 기억이 났다. 어릴 땐 그냥 그런가보다 했는데….”
성소수자가 되니 달라진 점은.
“양성애자는 레즈비언 커뮤니티에서도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처음으로 찾아갔던 퀴어 커뮤니티에서 ‘양성애자 꺼져라’ ‘박쥐다’ 이런 비난을 들었다. 이걸 어떻게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메갈리아 활동을 했다고 했는데.
“2015년에 메르스 갤러리(메갈리아)가 나왔다. 정말 시원했다. 처음에는 메갈리아를 열심히 ‘달리다가’ 트위터를 하게 됐다. 인종차별 반대운동을 하다 보니, 해외 Kpop 팬들이 한국인을 대상화하는 일이 워낙 잦아서 피로감을 느꼈다. 메갈리아를 하면서 국내 페미니즘에 더 집중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트위터를 시작했다. 메갈리아에서 워마드가 갈라질 때는 워마드에 동의하지 않았다.”
왜 동의하지 않았나.

“메갈리아에서는 트랜스젠더 여성도 얘기하고 기혼자도 자유롭게 얘기했다. 그러다 게이 커뮤니티에서의 여성혐오가 심각하다는 문제가 제기됐고, ‘게이도 한남이다’ ‘똥꼬충’ 같은 단어가 통용되기 시작했다. 저는 ‘그런 워딩은 쓰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게이의 여성 혐오를 폭로한 분은 여성이 아니라 그 커뮤니티 안에 있던 게이일 텐데, 게이 여혐에 문제의식을 갖고 폭로하는 사람까지 싸잡아 다 여혐이라고 하면 그 사람은 뭐가 되느냐는 생각을 했다. 실제로 2017년 여름 게이 여혐 공론화 해시태그가 돌았는데, 그 운동을 시작한 사람은 젠더 퀴어 남성이었다.

그런데도 ‘게이는 안 된다’고 배척하는 게 이해가 안 됐다. 옛 트친 중 한 분은 ‘나는 게이들에게 많은 기대를 했는데 그들도 한남이었다니’라고 했다. 게이 커뮤니티 내 여혐 문제를 공론화하는 데 기여한 사람은 젠더 퀴어 남성이었는데 그 분의 기여는 싹 다 지워져버렸다. 이후 트친을 많이 잃었다. 제 계정을 차단하는 사람도 많았다.”

“생물학적 여성이 아니어도 불법촬영의 피해자가 된다.”

트위터에서 페미니즘으로 ‘단결’ 하던 시절도 있었나.

“메르스 갤러리가 생긴 이후, 트위터에 워마드가 많이 들어오기 전까지는 그랬다고 생각한다. 매우 짧은 기간이었지만. 강남역 살인사건 때 희생된 여성을 추모하러 나온 사람들을 조롱하려고 일베 남성이 분홍색 코끼리 인형을 입고 나온 ‘핑크 코끼리 사건’이 있었다. 그 때는 이 핑크코끼리를 조롱하는 데 모두가 대동단결했다. 좋은 시절로 기억한다.

트위터에 워마드가 늘면서 예전처럼 한 마음으로 한 이슈에 대해 ‘까는’ 일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강남역 살인사건 때만 해도 시위에 성별과 관련 없이 모든 페미니스트가 다 참여했다. 언젠가부터 ‘생물학적 여성만 올 수 있습니다’ 같은 슬로건이 올라오기 시작했고 예전처럼 모두가 한 마음이 되어 어떤 의제에 ‘단결’하던 모습은 많이 사라진 것 같다. 서로 비판하는 일이 잦아지고 ‘쓰까’라는 말도 등장했다.”

트위터에 워마드가 늘면서
서로 비판하는 일이 잦아지고 ‘쓰까’라는 말도 등장했다
강남역 살인사건 ‘달빛시위’는 어떤 경험이었나.

“페미니즘 의제로 열린 시위에 직접 참가한 것이 그 때가 처음이었다. 굉장한 단결감과 안정감을 느꼈다. 포스트잇이 붙은 강남역 10번 출구에서부터 행진을 하면서 참가자들이 보여준 연대에 취했다. 그 때는 집회 참가자 중에 남성도 있고 여성도 있었다. 바깥에서 남성들이 사진을 찍으려 하면 참가자들이 달려가 싸우며 막곤 했다.

그런데 훼방을 놓으러 온 남자들은 집회 참가자 중에서도 여성만 욕을 했다. 남성들이 다가가면 오히려 도망을 갔다. 참 찌질하다고 생각했다. 남성들은 여성에게 겁을 잘 먹지 않는다. 남성의 위협에만 반응을 한다. 본인들은 ‘성별 권력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지만 역설적으로 이런 행동이 젠더 권력이 있다는 걸 더 잘 보여주는 것 아닌가.”

혜화역 시위에는 왜 참가하지 않았나.

“저는 불법촬영 피해자다. 고등학교 기숙사에서 옷 갈아입는 장면이 고스란히 찍혀서 불법 유통된 걸 최근에 알았다. 하지만 젠더 퀴어이기 때문에 혜화역 시위에는 한 번도 나가지 않았다. 생물학적 여성이 아닌 사람도 불법촬영의 피해자가 된다.

성기 재건술을 받지 않은 트랜스젠더 여성도 여성으로 패싱되기(보이기) 때문에 여성 화장실에 간다. 여성처럼 보이는데 남성 성기가 있기 때문에 불법촬영이 찍히고 유통된다. 반대로 성기재건술을 받지 않고 남성처럼 보이는 트랜스젠더 남성은 남자 화장실을 가기 때문에 몰카에 찍히지 않는다. 이런 예외 케이스도 있는데 ‘생물학적 여성’을 기준으로 누군가를 배제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앞으로도 이 시위에는 참여하지 않을 생각이다.”

운동 방법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인가.
“7월 7일 3차 ‘불법촬영 편파수사 규탄시위’가 있던 날 저는 광화문광장에서 열리는 낙태죄 폐지 시위에 나갔다. 혜화역 시위는 ‘운동권’을 배제한다고 한다. 단체는 참가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런데 저는 오히려 낙태죄 폐지 시위에 여러 단체들이 ‘연대’ 했기 때문에 편안함을 느꼈다. 행동력 있는 시민단체들과 함께하니 든든한 느낌이었다.”
‘재기해’를 ‘종현해’와 같이 놓고 쓴다면
우리가 왜 ‘재기해’를 썼는지
성찰하지 않는 것이다.
3차 집회 이후 ‘재기해’ 구호가 도마에 올랐다. 워마드에서 ‘종현해’ ‘주혁해’ 등 표현을 썼다는 보도도 나와서 논란이 됐다.

“저는 재기해와 민기해(제자들에게 상습적 성폭력을 저지른 혐의로 경찰 수사를 받던 중 스스로 목숨을 끊은 배우 고 조민기씨 이름을 빗대 조롱하는 말) 같은 단어는 ‘종현해’ ‘주혁해’와는 질적으로 다르다고 생각한다. 샤이니의 종현은 여성이슈에 경청하는 태도를 보이는 사람이었다.

반면 고 성재기씨는 여성혐오를 여과 없이 드러냈고 남성 커뮤니티에서 확대 재생산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고 조민기씨는 그가 목숨을 끊으면서 ‘사람을 죽인 미투’라는 말이 나왔고 결과적으로 성폭력 생존자들의 발언권을 제한시키는 효과가 생겼다.

제가 메갈리아 초창기에 열심히 활동했기 때문에 ‘재기해’가 어떤 배경에서 나왔는지 기억한다. 당시 성재기라는 사람이 남성 커뮤니티에서 가지는 위상을 떨어뜨리자는 목적이 강했다. 이것을 희화화해 여성혐오를 일삼는 사람을 조롱하고, 그 죽음의 무게감을 떨어뜨려 순교자가 되지 못하게 하자는 목적이 뚜렷했다. 만약 ‘종현해’와 ‘주혁해’를 ‘재기해’ 혹은 ‘민기해’와 같이 놓고 쓴다면 애초에 왜 우리가 ‘재기해’같은 단어를 썼는지에 대한 성찰이 없는 것 같다.”

더 많은 여성들의 목소리가 듣고 싶다

기혼 여성을 배제하는 흐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

“아주 잘못됐다고 생각한다. 기혼 여성만의 의제가 있을 수는 있다. 경력단절이라든가, 아들을 어떻게 페미니스트로 키울 것인가 라든가, 시댁에 갔을 때 어떻게 내 권리를 주장할 수 있을까 등등. 하지만 저는 결혼한 사람을 비난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어떤 이유에서 결혼을 했든 여전히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 안 되는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는 아이가 없는 사람에 대한 낙인도 존재하고, 이혼한 여성에 대한 낙인도 존재한다. 이런 차별이 다 있는데 ‘결혼한 게 잘못이다’라고 해 버리면 개인에게 너무 큰 희생을 요구하는 것이다. 있는 병폐를 해결하지 않고 ‘해결하기 전에 너네가 희생해서 먼저 세상을 바꾸라’고 하는 것 아닌가.”

이주민이어서가 아니라,
여성이어서가 아니라
이주민 여성이어서 받는 차별이 있다.
다른 소수자들과 연대하면 여성 의제는 뒤로 밀린다는 주장도 있다.

“저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게 더 다양한 여성의 목소리를 듣는 기회라고 생각한다. 영국에서 이런 사건이 있었다. 어떤 장애인 여성이 줄을 서 있는데 직원이 와서 ‘너는 화장을 했고 예쁜 옷도 입었으니 진짜 장애인이 아니다. 일반인 줄에 가서 서라’고 했다. 여기에는 ‘장애인 여성은 꾸미지 못할 것’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비슷한 상황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어떤 비장애인 여성한테 ‘너는 꾸며야 해’가 억압이 된다면, 어떤 장애인 여성한테는 ‘어디서 장애인이 꾸미냐, 그건 사치다’ 같은 다른 종류의 억압이 작용할 수 있다.

다른 예로 결혼 이주 여성은 한국인 여성이 받는 차별과는 또 다른 일들을 겪는다. 물론 한국 여성이 가정폭력에서 자유롭다는 것은 아니다. 모두가 가정폭력을 겪어도 이주여성은 더 심할 수 있다. 한 예가 이주 여성에게 도망가지 못하게 하려고 한국어를 못 배우게 하는 것이다. 이건 ‘이주민이어서’ 받는 억압도 아니고 ‘여성이어서’ 받는 억압도 아니고 정확히 ‘이주민 여성이어서’ 받게 되는 차별이다.

저는 이런 억압의 구조가 어떻게 다르게 작용하는가를 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오히려 다른 처지에 있는 다른 여성의 목소리를 더 들어 보고 싶다.”

김겨울씨는 페미니즘을 공부하면서 이를 거울삼아 끊임없이 자신의 삶을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는 사람인 것 같았다. 그에게 자신의 페미니즘을 상징하는 무언가를 사진으로 찍어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김겨울은 아끼는 문구 두 개를 손글씨로 써서 보내왔다.
“나의 페미니즘은 교차적일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망할 것이다”
-페미니스트 플라비아 조던

“내 페미니즘은 교차적일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망할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누가 처음 썼는지는 알 수 없는 다분히 언어유희적인 문구였다.
“너의 자매들을 지지하라,
시스(젠더)터만 지지하지 말고.”

“시스(젠더)가 아닌 여성 자매들 역시 지지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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