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에서 시간을 보낸 아이들은

더 도움 없이 말하고 표현하고, 움직이고,

만질 수 있게 될 것이다.

선생님들은 ‘조금 더 독립적인 사람’이 되도록

끝없이 독려한다….

코르크 길을 따라 걷는 아이들

스코틀랜드에서 가장 큰 도시 글래스고, 도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벨라하우스톤 공원의 나무와 잔디 위로 봄날 오전의 햇살이 부서졌다. 드넓은 잔디밭을 가로질러 공원을 나서면 울창한 나무 사이로 지붕이 야트막하고 몸체가 구불구불하게 뻗은 건물이 나타난다.

이곳의 이름은 헤이즐우드 학교.
2세부터 18세까지의 장애아들이 다니는 특수학교다.

헤이즐우드 학교 너도밤나무반 리아(오른쪽)가 걷기 전담 교사 샤론과 함께 학교 밖에서 지팡이를 이용해 걷는 연습을 하고 있다.

“도로 쪽으로 나가보자.
차 소리가 어디서 들리는지 생각해볼까?”
“되도록 길 가운데로 걷도록 연습해보자.”

빨간 카디건에 까만 바지를 입은 15살 리아가 학교 쪽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눈을 꼭 감고, 오른손에 든 지팡이로는 발이 움직이는 쪽 땅을 더듬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 리아가 바깥에서 걷는 것을 지도해주는 이동 전담 선생님 샤론이 반 발짝 뒤를 따르며 끊임없이 속삭였다.

리아는 귀로 소리를 듣고 지팡이로 땅의 굴곡을 느껴가며 위치를 가늠해야 했지만 한 번도 길을 잃거나 휘청이지 않았다. 리아가 앞을 보지 못하는 아이라는 사실을 순간순간 잊어버릴 정도였다.

리아는 선천적으로 눈이 보이지 않지만 지팡이만 있으면 꽤 능숙하게 걸어다닌다.

이날 리아가 스쿨버스에서 내린 것은 오전 8시50분. 스쿨버스는 휠체어를 내릴 수 있도록 돼 있고 보조교사들도 버스에 함께 타지만 리아는 혼자 지팡이로 계단을 짚어가며 가뿐하게 버스에서 내렸다.

학교는 눈이 보이지 않는 아이들도
얼마든지 자유롭게 다니도록
설계돼 있다.

계단이나 턱이 없는 것은 기본이다. 학교 정문을 열고 들어가면 복도를 가득 메운 짙은 베이지색 코르크 벽이 눈에 먼저 들어온다.

헤이즐우드 내부
헤이즐우드 내부
헤이즐우드 내부
헤이즐우드 내부
헤이즐우드 내부
헤이즐우드 내부
헤이즐우드 내부

아이들이 벽에 부딪히더라도 다치지 않게 벽을 푹신한 코르크 소재로 만들었다.

눈을 감고 손이 자연스럽게 닿는 위치를 더듬어보면 가로로 길게 홈이 파여 있다. 벽의 가로줄이 어느 순간 끊겼다면, 바로 옆에 교실이 있다는 뜻이다.

바깥으로 나가는 길 주변에는 벽에 타일을 붙여 소재를 다르게 했다.

벽을 만지면서 걸으면 바깥으로 나가는 문이 어디 쯤에서 나오는지 알 수 있다.

입구 부근에는 창문을 크게 내어 최대한 빛이 들어오게한다.

아이들은 약한 시력을 뚫고 들어오는 빛으로 문의 위치를 가늠할 수 있다. 자신감을 갖고 혼자서 학교를 돌아다닐 수 있도록 하는 장치들이다.

“학교에 온 지 얼마 안 된 아이들은
코르크 길을 따라 걷지만,
학교에 익숙해진 아이들은
지팡이만 있으면 쉽게 다닐 수 있어요.”

리아는 이제 학교 안에서는 지팡이 없이도 교실까지 찾아갈 수 있다.

교실 문이 나오는 부분에서는 복도가 약간 넓어지는데, 좁은 공간에서 넓은 공간으로 이동할 때 발소리의 울림이 달라진다는 것만 알면 찾아갈 수 있다.

“자, 모두들 대답해 봐요.
어젯밤에는 뭘 했나요?”
“음악을 들으면서 춤을 췄어요.
맛있는 걸 먹었고요.”
너도밤나무반 아이들이 교실에 모여 전날 밤 뭘 했는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매일 아이들은 오늘은 몇 월 몇 일 무슨 요일인지, 오늘의 날씨는 어떤지,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이야기하며 일과를 시작한다. 교사들은 모든 대화를 수화로 통역한다.

전교생이 59명인 학교에
직원만 60명이다.

한 반 아이들은 6명씩이고 보통 교사 1명과 보조교사 2~3명이 함께 아이들을 챙긴다. 장애의 유형도, 필요한 것도 제각각인 아이들을 교사 한두 명이 챙기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이들의 감각을 깨우는
감각의 방

학교는 아이들의 감각을
깨우는 시설로 가득하다.

‘감각의 방’에 들어서자 영화 <겨울왕국>의 주제가인 ‘렛잇고’가 흘러나왔다. 깜깜한 방 안에는 누르면 소리가 나고 빛이 흘러나오는 감각판, 소리가 나는 은박지, 거울로 만들어진 공간이 들어 있다.

한쪽에는 물 온도가 언제나 36도로 유지되는 수영장이 있다. 지체장애가 있는 아이들이 물에 들어갈 수 있도록 휠체어를 매달 수 있는 리프트 시설도 갖췄다.트램플린으로 재활훈련을 하는 방, 마사지를 받는 교실도 있다. 화장실은 모두 남녀 구분이 없고, 휠체어가 들어갈 수 있는 시설을 갖췄다. 공립학교라 학비는 무료다.

‘특수학교'라고 하자
반대를 멈췄다.

학교 근처에는 서른 가구 정도가 사는 작은 마을이 있다. 주민들은 처음에 학교가 들어선다는 소식에 조금 반대했다고 한다. 학교가 들어설 부지 바로 옆에 너무 큰 도로가 있어 등하교길이 위험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 학교가 특수학교라는 걸 몰랐어요. 특수학교라는 걸 알고 나서는 반대가 완전히 사라졌죠.” 이 마을에서 33년을 살았다는 로다(77)가 말했다.

학교 인근의 마을 주민인 로다(지역 33년 거주)와 캐롤라인(지역 26년 거주)

주민들은 종종 학교를 찾는다. 크리스마스나 학기말 콘서트 때에는 학교가 주민들을 초대한다.

“작년 크리스마스 행사에도 갔었어요. 학교에서는 긴 테이블을 놓고 기부받은 물품을 팔고, 게임에 참여하거나 선물을 받을 수 있는 티켓도 팔아요. 그런 걸 사면서 자연스럽게 펀드레이징에 참여하게 돼요. 학교에 가면 즐거워요. 아이들이 노래를 정말 잘하거든요. 노래할 때는 언제나 웃고 있더라고요.”

한국에서 지역주민들이
특수학교 건설을 반대했다고 말하자
그녀들의 표정이 굳었다.
“끔찍하네.”

“학교에 가보기 전에 그 학교는 ‘슬픈 곳’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거기서 봉사활동을 오래 해보니 전혀 아니었어요. 안에 있다 보면 아이들에게 장애가 있다는 것도 잊게 돼요. 그냥 똑같은 사람이거든요.” 캐롤라인이 말했다.

보조기구를 착용한 7살 윌리엄이
선생님과 함께 걷기 연습을 하고 있다.

학교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아이들이 자립해 살아가도록
하는 것이다.

아이들이 최대한 많은 것을 경험해보고, 졸업해 사회에 나가서는 독립적으로 살 수 있도록 하는 게 목표다. 건물부터 교육과정까지 학교의 모든 요소가 여기에 맞춰졌다.

앞이 보이지 않는 스코트는 낯선 것을 만지거나 먹는 걸 무서워한다. 앞에 뭐가 있는지 알 수가 없기 때문에 무서워하는 게 당연하다. 선생님들은 스코트가 이것저것 시도해보도록 가르친다. 맛있는 냄새를 맡게 해 주고, 이것저것 만져보라며 용기를 북돋워준다.

언젠가
홀로 서야 할
아이들을 위해
헤이즐우드 학교 학생 캐머런(13)이 인근 쇼핑몰에서 물건을 사는 연습을 하고 있다.

헤이즐우드에서 보내는 몇 년은 아이들이 홀로서야 할 미래를 준비하는 시간이다. 아이들은 상태에 따라 상급학교에 올라가기도 하고, 직업을 찾기도 한다.

발달장애가 있는 홀리(14)는 매주 한 번씩 슈퍼마켓에 가서 물건을 사는 연습을 한다. 금요일에는 지역 푸드뱅크에서 커피를 포장하고 음식을 나눠주는 자원봉사를 한다. “친구들이 움직이는 걸 도와주고 돌봐주는 걸 좋아해요. 친구 마이클과 아담을 웃게 만들면 저도 기분이 좋아져요.”

미래의 꿈을 묻자 홀리는 “지금처럼 남을 돕는 일을 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했다.

5월 30일 학교에서 열린 졸업식에 참석한 헤이즐우드 학교 학생 홀리(14).

“우리는 일단 ‘벽 가까이 서 있으라’고
조언하면서 용기를 북돋워주는 거죠.
처음에는 가까이 서 있어야 두렵지 않겠지만,
익숙해지면 점점 떨어져 서 있을 수 있겠죠.”

홀로서는 연습을 한 아이들은 나중에 학교를 떠나도 자기만의 인생을 살아나갈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곳 아이들은 대부분 보호자가 필요하다. 어른이 되더라도 도움받고 의존할 사람이 필요한 아이들이 훨씬 더 많다.

하지만 이곳에서 시간을 보낸 아이들은 조금이라도 더 도움 없이 말하고, 표현하고, 움직이고, 만질 수 있게 될 것이다. 좋아하는 일을 찾고, 친구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방법을 터득할 수도 있다. 선생님들은 아이들이 ‘조금 더 독립적인 사람’이 되도록 끝없이 독려한다.

“남에게 많이 의존해야 하는 아이들이지만,
자기 인생을 스스로 살 권리는
누구에게나 있는 거잖아요.”

교감선생님 빈센트가 몇 번이고 강조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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