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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단층 주택들이 거리를 수놓은 카리브해 인근 카르타헤나는 아름다운 풍광 덕에 관광 명소로 꼽히는 콜롬비아의 대도시다. 카르타헤나는 평화를 상징하는 도시이기도 하다. 후안 마누엘 산토스 대통령은 2016년 이곳에서 세계에서 가장 오랜 내전 중 하나로 꼽히는 콜롬비아무장혁명군(FARC)과 내전을 끝내는 평화협정에 서명했다. 52년 만이었다.
반군은 총을 버리고 숲에서 나왔다. 정부군과 FARC 사이에 끼어 일상화된 폭력에 시달리던 국민들은 환호했다. 하지만 전쟁의 상처는 그렇게 빨리 아물 리 없다.긴 내전은 주민들에게 깊은 상처와 가난을 남겼다. 나쁜 치안 탓에 주민들은 늘 불안에 떤다. 아이들은 길거리에서 마음껏 뛰놀 수도 없다.
카르타헤나에는 오랜 내전과 지긋지긋한 가난에 시달리는 아이들에게 춤을 가르치는 무용 학교가 있다.
‘엘콜레히오 델쿠에르포(몸의 학교)’.
전문 무용수들로 구성된 몸의학교는 학교이자 동시에 정식 공연을 하는 무용단이다. 이들은 카르타헤나의 대표적인 빈민가인 폰테수엘라와 아로스바르토 등을 방문해 아이들에게 현대무용을 가르친다.
몸의학교의 설립자는 1997년 카르타헤나 출신 유명 무용가 '알바로 레스트로포'다. 미국 뉴욕에서 현대무용가로 데뷔한 후, 전 세계 40여개국에서 공연을 펼치며 남미를 대표하는 무용가로 이름을 날렸던 그는 1991년 자신의 고향이었던 카르타헤나로 돌아왔다. 동료 무용수이며 프랑스 앙제 국립무용학교 교장을 지냈던 마리 프랑스 들뢰방까지 콜롬비아로 데려와 6년 만인 1997년 몸의 학교를 세웠다.
알바로는 전세계를 누비며 공연하는 와중에도 내전에 시달리는 아이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했다고 한다. 전쟁으로 지치고 세상으로부터 스스로를 단절시킨 아이들을 몸을 통해 세상과 연결시키는 작업을 하기 위해 몸의 학교를 세웠다고 설명했다.
카르타헤나 폰테수엘라, 마을 교회 건물에서 전문 무용수를 꿈꾸는 '파일럿 우노' 반 학생들의 연습이 진행된다. 17명의 학생들이 춤에 매진한다. 난도 높은 동작이 이어지는 중에도 아이들의 표정은 진지하면서 즐겁다. 선생님 지시를 듣지 않거나 산만하게 떠드는 아이들은 없었다. 최소 3~4년간 기초동작과 감수성 훈련을 마치고 고난도 동작을 배운다. 한눈을 팔면 스르륵 동작들이 지나가버린다.
크리스티앙이 마르셀라 뒤에서 어깨를 짚고 껑충뛰어르더니 오른 다리를 마르셀라 어깨에 걸쳐맨다. 아나는 펠리페쪽으로 몸을 홱돌리고 긴 다리를 쭉 들어올린 채 펠리페에게 안긴다. 펠리페의 오른손이 아나의 허리에 살포시 올려졌다. 성적으로 예민한 사춘기 남녀 간 신체접촉에도 쭈뼛거리는 기색은 찾아볼 수 없었다.
크리스티앙은 “길거리에서 배웠던 춤들하고 다르게 이곳에서는 다른 사람과 함께 춤을 출 때 몸의 어느 부분을 접촉할 수 있고 없는지를 알려줬어요”라고 말한다.
몸의 학교는 춤을 추기 전 먼저 상대 몸을 인식하고 배려하는 법을 가르친다. 아나는 “우리 눈이 뒤에도 달린 게 아니잖아요. 선생님들은 공간을 쓸 때 꼭 내 눈이 돌아갈 수 있는 데서 비어있는 곳을 사용하라고 하셨어요”라고 말한다. 쌍둥이 자매 다나와 카밀라는 친구들과 얘기하는 법이 달라졌다.
“예전 같으면 친구들하고 얘기할 때도 관심을 끌려고 몸을 확 잡아 챈다든지 안 좋은 말을 섞어서 했는데 이제는 그러지 않아요. 남의 몸을 함부로 만지면 안 된다는 걸 알게 됐거든요.”
폭력과 가난 속에 살아온 아이들은 몸의 소중함을 알지 못하고, 폭력의 악순환에 쉽게 빠져든다. 그 아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건 자아존중이다. 자기가 바로 서야 다른 사람을 존중할 수 있다. 교장 알바로는 “그런 존중감이 생기면 결국 폭력을 용납하지 않게 된다”고 말했다.
몸의학교 학생 다나는 몸의 학교 선생님들이 누차 강조하는 “생각하는 무용수가 돼라”는 말을 언급했다. 그 얘기를 듣고서 마약과 범죄에 빠지는 아이들을 도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알바로 교장의 꿈이 아이들을 통해 다음 세대로 이어져가고 있는 셈이다.
다나의 쌍둥이 자매 카밀라가 말을 이었다. “무용수는 생각 없이 몸만 움직이는 사람들이 아니에요. 생각을 하고, 철학을 가지고 사회문제에 목소리를 낼 수 있어요. 몸의 학교 선생님들은 항상 ‘무용수도 생각하면서 춤을 춰야 된다’고 가르쳐요.”
평화를 말하는 시대에 몸의 학교는 여전히 필요할까. 설립자인 알바로는 “평화? 그랬으면 좋겠다”라며 헛웃음을 지었다. FARC 반군이 떠난 자리를 군소 무장단체들이 차지하면서 몇몇 지역에서 혼란이 오히려 더 심해졌다고 한다. 차라리 강력한 FARC가 군림했던 시절이 나았다는 주민들도 적지 않다.
지난달 17일 치러진 콜롬비아 대선 결선투표에서는 반군 출신들의 정치 참여를 금지시키는 등 평화협정을 개정하겠다고 공약한 이반 두케가 당선됐다.
알바로는 “남북정상회담을 감동적으로 지켜봤다”면서 “하지만 콜롬비아에서 평화는 아직 먼 얘기”라고 했다. 또한 전쟁이 끝난다 해도, 몸의 학교의 가치는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그는 믿는다.
“어린 아이들이 자라면서 감수성과 자신을 존중하는 법을 배우는 일은 어디에서나 필요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