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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에 한 아이씩’
이곳에선 교사를 ‘선생님’ 이라 부르지 않는다.
대신 조언자라는 뜻의 어드바이저라고 부른다
어드바이저는 일종의 학급인 어드바이저리를 이룬다.
졸업할 때까지 바뀌지 않는 어드바이저리는
모두가 가족이라고 말할 정도로 끈끈하다.
여기가 두번째 집이나 마찬가지예요
정비소에 있으면 정말 행복해요
메트스쿨 12학년 알렉스 휘튼
다른아이들이 학교에 있을 시간인 오후 12시30분, 메트스쿨 12학년 알렉스 휘튼(18)은 보스턴 남서쪽의 작은 도시 프로비던스에 있는 정비소에서 일을 한다. 알렉스에게 이곳은 일터이자 교실이다. 졸업 이후를 준비하기 위해 인턴십을 하는 중이다.
알렉스는 일주일에 사흘씩 오전 9시부터 오후 3시까지 일한다. “여기가 두번째 집이나 마찬가지예요. 정비소에 있으면 정말 행복해요.”
처음 인턴을 시작할 무렵에는 엔진오일 가는 법도 잘 몰랐지만 지금은 웬만한 작업은 다 할 수 있다. 전날에는 트랜스미션을 갈아끼웠다고 했다. 코앞에 놓인 목표는 자동차정비자격증을 따는 것이고, 앞날의 꿈은 자신만의 정비소를 운영하는 것이다.
“중학교 때 따돌림을 당했어요. 내가 멍청한 것 같이 느껴지고 수업도 못 쫓아갔죠. 그때 상담 선생님이 ‘너는 차를 좋아하니까 메트스쿨에 가보는 게 어떻겠냐’고 권했어요.”
알렉스는 거리낌없이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놨다.
다른 아이들이 학교에 있을 시간에 메트스쿨 12학년 알렉스 휘튼은 정비소에서 일을 한다. 멘토인 딘이 운영하는 정비소는 알렉스에게 ‘제 2의 교실’이다.
지금은 잘 적응하고 있는지 굳이 물어볼 필요는 없었다. 소년의 표정이 모든 걸 말해줬기 때문이다.
차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에는 무표정하던 얼굴이 밝아지면서 혈색이 돌았다. 알렉스는 다섯살 때부터 자동차에 관심이 많았다고 했다.
정비소의 주인이자 ‘멘토’인 딘 프래튼은 장난감 가게를 운영하던 알렉스 아버지와 오래 전부터 알고지내는 사이다. 메트스쿨에 들어간 알렉스가 프래튼을 찾아와 부탁한 이후로 5년째 멘토를 맡고 있다.
딘은 알렉스를 보면서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고 했다. “나도 공부에는 전혀 흥미가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내가 양복을 입고 일했으면 좋겠다고 했지만 난 자동차를 위해 태어났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알렉스의 생각을 잘 이해할 수 있었고, 흔쾌히 멘토가 됐어요.”
알렉스는 일을 마치면 딘의 집에서 바비큐를 함께 먹곤 한다. 그곳에 갈 때면 딘의 차고는 자연스레 교실이 된다. 알렉스의 가족과 딘의 가족이 뭉칠 때도 종종 있다.
죽이 잘 맞는 멘토와 멘티는 프로비던스 시내에 작은 자동차 용품점을 열었다. 두 사람은 “작은 부업일 뿐”이라고 멋쩍어했지만 자동차에 대한 애정이 만들어낸 소중한 성과였다.
알렉스는 “멘토를 갖는다는 건 새로운 가족이 생기는 거나 마찬가지”라면서 “관심사가 같은 사람이 옆에 있다는 게 이렇게 좋은 건지 몰랐다”고 말했다.
학교에 처음 왔는데
어드바이저가 뭘 좋아하냐고 물었어요
놀라고 당황했었죠
메트스쿨 11학년 제이다 거즈먼
로저윌리엄스 공원에 있는 실내 식물원에는 텃밭들이 모여있다. 노숙자 쉼터를 위해 돌보는 텃밭, 근처 식당에서 키우는 텃밭 앞에 메트스쿨 11학년 제이다 거즈먼(17)의 텃밭이 있다.
‘메트스쿨 정원’이라고 쓴 팻말이 제이다의 텃밭임을 알린다. 7평 남짓한 직사각형 텃밭에는 상추, 당근, 시금치, 히비스커스 따위가 자란다.
제이다는 지난해 12월부터 이곳에서 인턴을 시작했다. 제이다가 하는 일은 식물을 키우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손이 필요한 일은 모두 돕는다. 식물원 옆에 사는 염소에게 밥을 주는 것도 제이다의 몫이다.
제이다는 매일 텃밭을 찾는다. 보통 학생들은 일주일에 두 번 인턴십을 하러 가지만 식물들은 매일 물을 줘야하기 때문이다
주말에도 예외는 없다. 집에서 텃밭까지 차로 5분 정도 걸리는데, 날씨가 좋으면 걷기도 한다. 가족과 친구들을 데리고 와서 텃밭을 자랑하기도 하고, 맛보라고 잎을 떼주기도 한다.
메트스쿨 11학년 제이다 거즈먼은 건강한 도시생활, 특히 사람들이 유기농 음식을 먹게 하는 데 관심이 많다. 제이다는 매일 로저윌리엄스 공원에 있는 자신의 텃밭에 물을 주러 간다.
제이다는 부모님의 영향으로 채식주의자로 살고 있다. 고기는 물론 우유, 달걀도 먹지 않는 ‘비건’이다. 건강한 도시생활, 특히 사람들이 유기농 음식을 먹게 하는 데 관심이 많다. 졸업 후에는 1년 정도 해외의 농장에서 일하다가 대학에서 환경학을 전공할 계획이다.
“이런 계획을 세울 수 있었던 것도 인턴십 덕분”이라고 제이다는 말했다. “학교에 처음 왔는데 어드바이저(교사)가 뭘 좋아하냐고 물었어요. 다른 공립학교 다닐 땐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꽤 놀라고 당황했었죠.”
제이다의 멘토는 이 정원의 총책임자인 리앤 프리타스다. 프리타스는 제이다가 옳은 방향으로 나갈 수 있도록 ‘가이드’하는 역할을 한다.
그는 “앞에서 제이다를 이끄는 게 아니라 뒤에서 조금씩 밀어주고 있다. 제이다가 정원을 돌보면서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가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안정과 평화로움을 느낄 수 있어서 좋아요. 또 이곳에서 일을 하다보면 커뮤니티에 봉사하는 마음도 들어요.” 제이다는 말했다.
제이다는 직접 키운 채소들로 학교 카페테리아 식단을 짜는 프로젝트를 기획 중이다. 메트스쿨 사람들은 이 프로젝트를 ‘씨앗에서 밥상까지’라고 부른다. 제이다는 최근 일주일에 한번 카페테리아 메뉴를 채식으로 바꾸는 데 성공했다. 메트스쿨 프로그램 매니저인 브랜든 레인과 함께 학교를 설득해 결실을 맺었다.
제이다는 “시작은 일주일에 한 번이지만 점차 늘려나갈 것”이라고 했다. 이제 친구들이 먹을 음식에 직접 재배한 유기농 채소를 쓰는 일만 남았다. GMO가 들어있지 않은 샐러드, 채소만 넣어도 맛있는 퀘사디아를 만드는 법을 담은 요리책도 만들어볼 예정이다. 제이다 머리 속에는 이미 자신만의 요리법이 꽤 여러개 있다고 했다.
한번에 한 아이씩
1996년 처음 문을 연 메트스쿨은 공립학교이지만 일반적인 학교들과는 공통점이 거의 없다. 이곳에선 교사를 ‘선생님’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대신 조언자라는 뜻의 ‘어드바이저(advisor)’라고 부른다. 어드바이저 한 명은 학년 구분 없이 16명 정도의 학생을 맡아 ‘어드바이저리(Advisory)’를 이룬다. 일종의 학급 개념인 어드바이저리는 졸업할 때까지 바뀌지 않는다. 학생들이 “어드바이저리 안에서는 모두가 가족”이라고 말할 정도로 끈끈하다.
자동차광 알렉스는 자신의 어드바이저인 샘 밥티스트에 대해 “믿을 수 있고 언제든 뭐든 말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했다. 샘은 “알렉스가 내 자동차를 고쳐줄 정도로 나는 차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하지만 멘토와 관계를 잘 맺고 있는지, 뭘 배우는지 살피며 아이가 목표를 이루도록 안내하는 역할을 한다”고 했다. 그는 학생들이 자신의 기대와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최대한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으려고 노력 중이라고 했다.
‘한번에 한 아이씩.’ 메트스쿨의 정체성을 표현한 문구다. 학교는 학생 한 명 한 명의 흥미와 진로에 맞는 교육을 한다. 취재진이 눈으로 본 인턴십 활동은 교사가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교실 안 수업과는 차원이 달랐다.
평생 자기 자신에게 질문해본 경험이 없는 학생들은 맨 처음 이 학교에 와서 흥미를 찾을 때 어려움을 겪기도 한단다. 하지만 흥미가 없어도 괜찮다. 메트스쿨이 쌓은 오랜 경험은 학생들이 체험을 통해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찾도록 돕는다.
학생들은 일주일에 두 번 저마다 인턴으로 일하는 현장으로 출근한다. 현장은 광고회사, 방송국, 동물원, 애완동물 가게, 로펌, 시민단체, 디자인 업체, 병원, 고아원, 출판사, 이벤트기획사 등 아이들이 원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될 수 있다.
인턴으로 일할 곳을 구하는 일은 아이들 몫이다. 학생들은 거기서 현장 전문가인 멘토에게 배운다. 어드바이저들은 아이들이 있는 현장을 점검한다. 아이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둘러보고 멘토들과도 이야기를 많이 나눈다. 이렇다 보니 학생과 어드바이저, 지역공동체가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공립학교여서 학비는 전액 무료다. 초창기에는 빌 게이츠 같은 기업가들의 전폭적인 후원을 받았다고 한다. 어떻게 양질의 교육을 계속 무료로 제공할 수 있는지 궁금했다. 메트스쿨의 공동 책임자인 낸시 베인은 말했다.
20여년 동안 공립학교 교사로 일한 데니스 리트키(왼쪽)와 엘리엇 워셔(오른쪽)는 아이들을 교실에만 가두는, 일방적으로 지식만 주입하는 공교육을 바꿔야겠다는 의지로 메트스쿨을 만들었다.
“우리는 다른 학교에 다 있는 농구코치, 음악교사, 도서관 사서가 없어요. 교감도 없고 학교 구조도 달라요. 아이들이 음악을 배우고 싶으면 나가서 기타리스트를 만나면 되니까요. 이런 식으로 밸런스를 맞춰가고 있습니다.”
공립학교인데도 전형적인 공립학교의 틀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이유는 뭘까. “우리가 잘 하고 있다는 걸 보여줬기 때문이죠.” 워셔가 말했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걸 배우면서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줬기 때문에 주 정부도 학교를 믿고 아이들을 맡긴다는 것이다.
그는 “현장에 있는 사람들이 정책에 영향력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보고서만 봐서는 아무 것도 알 수 없어요. 학교 밖이 아니라 학교 안에서, 외곽에서 중심으로 바꿔나가야 합니다.”
아이가 좋아하는 것에 가장 큰 가치를 두는 메트스쿨의 철학을 한국에 알리려는 시도는 이미 많았다. 창립자들의 책이 번역됐고, 이들이 직접 한국에 와서 메트스쿨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했다. 교육부와 시도교육청들도 일찌감치 이 학교의 커리큘럼을 연구하고, 세미나나 보고서에서 벤치마킹 사례로 언급하곤 한다. 하지만 그 뿐이다.
매트스쿨 유니티 학교 학생들은 카메라를 보자마자 포즈를 취했다.
한국 교육에서 아이들의 흥미는 빠져 있다. ‘진로탐색 교육’ ‘개인 맞춤형 학습’ ‘자기주도적 학습’은 말로만 존재하는 듯 하다. 학교 현장에서 이런 교육이 이뤄진다고 해도 속을 들여다보면 ‘앙꼬 없는 찐빵’이다.
올해부터 모든 중학교로 확대된 자유학기제는 메트스쿨과 비슷한 문제의식에서 나왔다. 중학교 1학년들이 한 학기 동안 진로탐색, 토론, 실습 등을 통해 꿈과 끼를 찾게 하는 제도다. 자유학기에는 시험을 보지 않으니 내신관리 부담이 줄어든다.
아이들의 꿈을 찾게 하자는 취지에는 대부분 공감한다. 문제는 자유학기제가 메트스쿨 아이들처럼 진로를 찾아갈 기회를 줄 수 있느냐다.
교사들은 “학생들이 체험하고 싶어 하는 직업분야는 다양한데 기꺼이 직업 체험을 함께 해줄 현장은 많지 않다”고 토로한다. 반나절 유명 대학을 둘러보고 나서 ‘전공탐방’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식의 진로체험이 수두룩하다.
5년째 정비소에서 실습을 하는 알렉스와, 기업체를 방문해 두어시간 견학을 하는 것으로 끝내는 한국 학생들의 경험을 비교할 수 있을까. 메트스쿨의 모델을 한국의 교육현장에 그대로 가져오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한국의 교육자들은 메트스쿨 같은 성공 사례가 있다는 것을 주목해왔다. 이제는 한국의 교육현장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지를 고민할 때다. 한국사회에도 기성복을 벗은 학교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