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100년 전 일제 식민지 시대, 이 순간부터 당신은 독립운동가입니다.
독립운동가들의 목표는 하나였지만, 그들이 택한 방법은 다양했습니다. 독립운동가로서 당신의 삶의 궤적을 그려보세요.
당신의 선택과 가장 가까운 삶을 살았던 독립운동가를 찾아드립니다.
당신이라면
어떤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3·1운동은 많은 조선인들의 삶을 바꾸었습니다.3·1운동이 있기 전, 당신은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3·1운동 전에 당신은 학생이었(였)군요.
대망의 1919년 3월 1월 ‘독립만세’를 외치는 수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나왔습니다. 당신이 당시 ‘거리시위’에 참여했다는 기록이 있을까요?
3·1운동의 막은 내렸지만 독립운동에 미친 영향은 컸습니다. 일본의 탄압을 지켜본 이들은 무장 투쟁에, 민중의 힘을 경험한 이들은 대중운동에 나섰습니다.당신은 어떤 길의 독립운동을 선택했나요?
당신은 주로 어느 지역에서 독립운동을 했을까요?
당신은 독립을 위해 어떤 이념적 지향을 선택했을까요?
물산장려운동, 민립대학설립운동으로 이어졌으나 일제에 협력하는 개조론, 자치론 등으로 변질되기도 했다
식민지 민족 해방 운동을 지원하겠다고 밝힌 사회주의 러시아에 대한 기대로 급속히 퍼졌다
아나키스트들의 급진적 투쟁운동 방식은 의열단의 정신으로 이어졌다
서대문형무소는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수감돼 고초를 겪은 곳입니다.당신은 독립운동 중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을까요?
독립운동가들은 때로 독립운동을 향한 굳은 뜻을 보여주기 위해 단지혈서를 쓰기도 했습니다. 단지혈서란 손가락의 피로 글을 쓰는 것으로, 안중근 의사의 단지혈서가 유명하죠. 당신도 단지혈서를 썼을까요?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주요 공직을 맡아 활동했을까요?
일제가 만든 블랙리스트인 ‘감시대상 인물카드’에는 독립운동가들이 다수 포함됐습니다. 이 중 5000여명의 카드가 남아있는데요.당신의 카드도 현재까지 전해질까요?
먼 훗날 당신의 삶을 모티브로 한 영화가 만들어졌을까요?
당신은 공적을 인정받아 훗날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았을까요?
먼 훗날 대한민국에서는 독립운동가들의 이름이나 호를 따서 거리 이름을 짓기도 했습니다. 한국에 당신의 이름이나 호를 딴 도로가 만들어졌을까요?
당신은 생전에 광복을 맞이했을까요?
독립운동가인 당신의 최후는 어땠을까요?
당신이 최후를 맞은 장소는 한반도일까요?
당신은...
임신한 몸으로 도청에 폭탄을 던지다. '무력투쟁만이 해답'이라 믿었던 기독교인 독립운동가
함경남도 함흥 출신. 1919년 3·1운동 당시 함흥에서 만세시위에 참여하여 1개월 간 함흥경찰서에 수감된 바 있었다. 이후 서울에서 조선여성동우회 등을 주도하며 여성운동을 이끄는 한편 고려공산청년회 중앙 후보위원으로 활동하는 등 사회주의 운동의 핵심에 있었다. 일제는 이런 그를 ‘여자 사회주의자 중 가장 맹렬한 자’로 평가하며 ‘요시찰 인물’로 감시하고 있었다.
1924년 5월 서울에서 여성단체인 여성동우회 집행위원으로 선임되었고 이듬해 1월 경성여자청년동맹 결성을 주도했다. 4월 고려공산청년회에서 활동하다 조선공산당에 가입하였다. 1925년 11월 ‘제1차 조선공산당 검거사건’으로 남편 박헌영이 일경에 붙잡힌 후 그 또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되었다.
1926년 6월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하던 일경에 다시 붙잡혔으나 2개월만에 풀려났다. 1927년 5월 근우회 임시집행부에서 활동하던 그는 병 보석으로 출감한 박헌영과 1928년 8월 블라디보스톡으로 탈출했다. 소련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입학하여 1931년 졸업하였다. 1932년부터 1933년까지 중국 상해에서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에 참여하던 중, 박헌영이 일본 영사관 경찰에 체포되자 모스크바로 돌아갔다. 소련에서도 주세죽은 ‘사회적 위험분자’로 낙인찍혀 카자흐스탄으로 강제 이주당하는 등 박해를 받았다. 광복이 됐지만 조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유배지인 카자흐스탄에서 사망했다. 정부는 2007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출처: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공훈록 등
901년 6월 24일 경남 밀양군에서 태어났다. 경남 밀양의 사립 동화 중학에 입학하면서 항일 인사였던 김홍표 교장의 영향으로 항일정신을 키워갔다.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만세운동에 참가한 그는 만세운동을 확산시키기 위해 고향에 내려가 동지들을 규합했다. 13일 오후 1시쯤 수천 명이 모인 고향 장터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자 동지들은 일제히 독립만세를 외쳤다. 일본 경찰의 수배를 피해 중국 망명길에 올랐다. 일본은 그 해 4월 14일 부산지방법원 밀양지청에서 궐석재판으로 징역 1년6월을 선고했다.
1919년 11월 9일 죽마고우 김원봉 등 13명과 함께 조선의열단을 결성했다. 의열단에서는 일제 침략기관의 파괴와 원흉들을 처단키로 했다. 정보가 누설되어 체포됐다. 5년 4개월의 감옥생활을 했다. 1932년 여름 중국 남경으로 망명했다.
1932년 10월 20일 중국 군사위원회 간부훈련단 제6대(약칭 조선민족혁명간부학교)에 입교, 1933년 4월 21일 제1기로 졸업했다. 1933년 한국대일전선 통일연맹을 결성해 중앙집행위원회 상무위원으로 선출됐다. 1933년 7월 5일 독립운동가들이 소망하던 단일정당인 민족혁명당을 탄생시키데 참여했다. 민족혁명당이 중국과 제휴하여 만든 조선의용대에서도 핵심부서인 편찬위원회 주편이 됐다.
조선의용대를 이끌고 중일전투에 참가했다. 타이항산 항일 근거지에 도착, 조선의용대를 조선의용군으로 개칭하고 중공 팔로군과 함께 항일 무장활동에 열중했다. 1942년 2월 일본군은 4만명의 군대를 동원해 타이항산을 공격했다. 항일 연합군사령부에서는 조선의용대에게 탈출로를 확보하고 전군이 탈출하도록 지원하라고 명령했다. 이 전투에서 적탄을 맞고 쓰러졌다. 3일 뒤 동지들이 중상을 입고 쓰러져 있는 선생을 발견했으나 중태였다. 6월 3일 석굴에서 숨을 거두었다. 나이 41세였다. 정부는 198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출처: 국가보훈처 이달의 독립운동가 공적개요 등
1919년 11월 9일 죽마고우 김원봉 등 13명과 함께 조선의열단을 결성했다. 의열단에서는 일제 침략기관의 파괴와 원흉들을 처단키로 했다. 정보가 누설되어 체포됐다. 5년 4개월의 감옥생활을 했다. 1932년 여름 중국 남경으로 망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