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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살 스케치
다음의 내용은 2017년 8월 미얀마 라카인주에서 벌어진 사건들의 기록이다.
사건을 경험한 이들의 목소리를 모아 완성했다.
미얀마의 소수민족이 사는 라카인주. 라카인주의 북부 지역에는 ‘세계에서 가장 핍박받는 민족’인 로힝야족이 살고 있다.
뚤라똘리, 돈팩, 인딘, 춧핀, 쿠톈콱 등...크고 작은 군락들이 모여 있는 삶의 터전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곳은 그을린 나무와 불타버린 건축물의 잔해가 나뒹구는 폐허일 뿐이다.
수십만명의 로힝야족 주민들은 가족을 잃고 쫓겨나 난민이 되었다.
비극은 2017년 8월 말 라카인주 북부에 퍼져있는 로힝야 마을 곳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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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딘 마을
인딘 마을은 대표적인 로힝야 거주지 중 한 곳이다. 2017년 8월 25일, 이곳에 포탄이 연이어 떨어졌다.
아이를 안고 있던 남성은 폭격을 운 좋게 피했다. 나무로 만든 인딘 마을 가옥에 포탄이 떨어지면 어김없이 불이 붙었다.
조용한 마을에 포탄이 떨어지자 한가로웠던 닭들도 도망쳤다. 로힝야 주민들도 도망쳤다. 길 옆 집으로 포탄이 떨어지면서 불이 붙었다. 아이들은 소리를 지르며 뛰었다. 뛰지 않으면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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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톈콱 마을
같은날 쿠톈콱 마을에서도 총성이 울렸다. 새벽 3시였다. 마을 남쪽에서부터 군인들이 몰려왔다.
마을은 곧 재로 변했다.벵골만을 바라보며 자란 야자나무는 메마른 채 검게 그을렸다. 마을에서 형태를 알아볼 수 있게 남은 건물은 학교 밖에 없었다.
쿠톈콱 주민들에 대한 탄압은 이전에도 있었다. 2016년에는 군경들이 몰려들어 마을의 남성들을 한 자리에 모아놓고 구타했다. 군경 한 사람은 바닥에 앉혀놓은 로힝야 주민을 발로 차는 장면을 배경으로 삼아 자신의 모습을 영상에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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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팩 마을
8월 26일에는 돈팩 마을에도 총알이 뿌려졌다. 학살은 이틀에 걸쳐 진행됐다.
오전 7시 30분쯤부터 군인들을 태운 트럭이 몰려왔다. 마을을 둘러싼 군인들은 350~500명이었다. 동쪽에서부터 총알이 날아왔다. 공격은 다음날에도 계속됐다. 학살은 하루종일 이어졌다. 군인들은 마을을 모두 불태우고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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춧핀 마을
8월 27일엔 춧핀 마을에도 군인들이 몰려왔다.아침식사를 막 마친 후엔, 군인 6~8명이 목격됐다. 점심식사를 마칠 무렵엔 500명으로 늘어났다. 처음에는 북쪽, 이어 서쪽 도로를 점령했다. 다시 동쪽과 남쪽 도로도 에워쌌다.
마을은 남쪽으로 일부를 제외하고 완전히 봉쇄됐다. 그리고 군인들은 집집마다 수색해 로힝야족 민간인들을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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뚤라똘리 마을
8월 30일 오전 8시,미얀마 라카인주 북부의 마웅도우 지역에 있는 뚤라똘리 마을 상공에는 구름이 잔뜩 끼어있었다.
북쪽에서 흐르는 프루마(fruma) 강이 뚤라똘리 마을을 감싸듯 동쪽과 남쪽으로 흐른다. 마을 북동쪽 강변에는 모래사장이 있었는데, 마을 사람들은 이곳은 데져트 라고 불렀다.
이날 데져트에는 1500~2000명의 주민들이 모였다. 마을행정관이 “군인들이 들이 닥치면 도망가지 말고 데져트로 가면 안전할 것이다”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뚤라똘리 마을로 피신해 왔던 이웃마을 와이꽁과 디오똘리의 주민들도 데져트로 갔다
안전하지 않았다.마을로 진입한 군경의 일부는 곧바로 데져트로 향했다. 군경은 모인 주민들을 향해 무차별 사격을 가하며 접근했다. 총알이 쏟아지자 눈치 빠른 이들이 먼저 강을 건너 도망갔다. 수영을 할 줄 모르거나 아이를 돌봐야 했던 주민들은 꼼짝할 수 없었다.
강을 무사히 건넌 주민들은 많지 않았다.데져트에선 군인들이 아이를 물에 던져 죽였고, 여성들은 따로 모아 끌고갔다.
강을 건넌 주민들은 물가에 떠있는 아이들의 시신을 봤다. 젊은 남자들이 머리가 터져 죽은 갓난아이의 시신을 물가로 건져냈다. 물가에 아이들의 시신이 늘어섰다. 살아남은 아이들은 갑작스럽게 벌어진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어리둥절해 했다. 강을 건너 주민들은 서둘러 물가를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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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살 보고서
라카인주의 로힝야 거주지 곳곳에서 학살이 벌어졌다. 연방제 국가인 미얀마에서 라카인주는 소수민족들이 많이 몰려사는 곳이다. 라카인주 북부에 사는 로힝야는 오랜 세월 핍박을 받으면서도 삶을 일궈갔다. 하지만 2017년 8월 말부터 대규모 학살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집단학살은 로힝야 마을 400여곳에서 빠르게 이뤄졌다.
학살의 명분은 ‘테러리스트 토벌’이었다. 아라칸로힝야구원군(ARSA)이 미얀마 경찰초소와 군영 등 30여곳을 습격했고, 로힝야 마을에 대한 공격은 그 직후 시작됐다.
테러리스트 토벌이라던 군사작전의 실상은 대량학살과, 성폭행 등 조직적인 집단학살이었다. 학살의 징후는 오래 전부터 있었다.로힝야에 대한 오랜시간에 걸친 차별과 탄압이 있었다. 로힝야는 자신의 마을에서 마음대로 벗어날 수 없었고, 투표는 물론 결혼을 해 자식을 낳아 기르는 등 가장 기본적인 자유도 누리지 못했다.
아시아인권평화디딤돌 아디는 2017년부터 방글라데스 콕스바자르에 있는 로힝야 난민캠프에서 출신 마을별로 나눠 심층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다. 아디는 내년까지 되도록 많은 로힝야 마을의 학살 보고서 제작을 목표로 콕스바자르 난민캠프에서 생존자 인터뷰를 계속 진행하고 있다.
인터뷰는 난민캠프에 거주하는 로힝야 출신 난민을 훈련시켜 진행했다. 자신도 난민인 조사관들은 주민들과 개별적으로 만나 인터뷰해 잔혹한 학살의 기억을 재현해냈다. 성폭력 등 각종 범죄에 노출된 여성들의 피해 진상을 밝히기 위해 여성 조사원도 포함됐다.
이 보고서는 아디가 우선 만든 인딘(Inn Din), 춧핀(Chut Pyin), 돈팩(Done Paik), 쿠톈콱(Kou Tan Kauk), 뚤라똘리(Tula Toli) 등 5개 마을의 학살 보고서를 종합해 만들어졌다. 심층 인터뷰한 로힝야 피해자들의 증언을 모아 잔혹한 집단학살을 출신 마을별로 기록에 남긴 것은 세계적으로도 처음 시도되는 작업이다.
조사관들은 직접 경험한 학살이 담긴 마을주민들의 음성과 꼼꼼히 기록했다. 아디가 이들을 대신해 국제사회에 알릴 계획이다.
이 보고서는 로힝야에 벌어진 집단학살을 기록한 증거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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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
살아남은 주민들은 생존자이자 피해자였으며, 학살의 목격자였다.방글라데시 콕스바자르 난민캠프에 모인 로힝야족 주민들은 저마다 이웃 주민들이 죽어간 모습을 목격했다.
군경은 아기들을 어머니들로부터 빼앗아 강물에 던졌습니다. 제가 강을 건너는 동안 많은 죽은 아기 시체가 떠다니고 있었고, 물 속에서 제 몸과 닿았습니다. (몇명의 아기들이 강물에 버려진지 보셨습니까?)최소 300명의 아기들이 강에 던져졌습니다.”
뚤라똘리 마을 출신 여성
“한 여성을 죽였습니다. 10명의 남자들이 내 눈앞에서 그녀를 둘러쌌습니다. 어느 장소였는지 정확히는 기억이 안 납니다. (이름과 나이를 기억하나요?)네. 타유바이고 75세였습니다. (어떤 관계였나요?) 그녀는 저의 할머니입니다. (무슨 일이 있었죠?) 토요일 오전 11시였습니다. 그때 우리는 정글에 숨어있었습니다. 그녀를 봤지만 구할 수는 없었습니다. 할머니는 빠르게 뛸 수 없엇습니다. 그리고 다리 밑에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들은 할머니를 향해 긴 칼을 휘둘렀고, 그곳에 버려뒀습니다. 장신구와 돈도 빼앗아 갔습니다. 아무도 그녀를 묻어주지 않았습니다. 저는 정글에 숨어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인딘 마을 출신 남성
학살 뒤 발견된 아기의 시신에선 목에 선명한 흉기 자국이 남았다. 가슴에도 총상을 입었다. 학살이 끝난 뒤 가까스로 아이 시신을 수습한 춧핀 마을 주민들은 당혹스러웠다. 22살이던 아이의 어머니는 군인들을 피해 피신을 가던 중 붙잡혀 성폭행 당한 뒤 살해당했다. 아디가 인터뷰한 춧핀마을 희생자 중 10세 미만은 84명으로 추산됐다.
다른 마을에서도 엄마 품에 안긴 아이가 군인에게 빼앗긴 뒤 죽었다.
어떤 아기들은 총에 맞아 죽었습니다. 일부는 칼에 찔려 죽였고, 일부는 강물에 던져졌습니다. 저는 2년 6개월 된 아기를 안고 있었는데, 군인이 제 아기를 낚아채 불구덩이에 던졌습니다.
뚤라똘리 마을 출신 여성(30)
노인도 죽였다. 뚤라똘리 마을의 종교 지도자였던 아하메드 후세인(90)은 처음에 총에 아홉발이나 맞았지만 바로 죽지 않았다. 그러자 군인이 등을 걷어차고 칼로 찔러 죽인 뒤 불에 태워버렸다.
가장 많은 피해자를 낳은 뚤라똘리 마을에선 사망자가 451명을 훌쩍 넘을 것으로 계산됐다. 쿠톈콱마을 주민들이 추산한 희생자는 148명이었다. 인딘 마을 주민들은 학살로 죽은 이들이 147명이라고 했다. 돈팩 마을에선 158명, 춧핀 마을에선 361명이 죽었다. 마을주민들이 목격한 수치를 종합한 것이라, 실제 사망자는 더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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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해자들
마을 사람들의 증언은 하나로 모아졌다.마을주민들은 군복을 입은 군인들의 팔 등에 적힌 휘장을 기억했다. 뚤라똘리 마을에선 왼팔에 버마어(미얀마어)로 적힌 흰색 숫자 99가 적힌 부대마크를 한 군인이었다.
숫자는 파랑색과 붉은 배경에 새겨있었고, 상단에 하얀 별이 있었다. 99경보병사단(99th Light Infantry Division)의 마크였다.
춧핀 마을에서 33경보병사단이 학살을 저질렀다. 빨간 스카프와 함께 33경보병사단을 가리키는 마크를 주민들은 기억했다.
인딘 마을 주민들이 목격한 건 초록색 군복을 입은 군인이었다. 팔에는 꽃모양이 있었다. 평소 장터에서 마주친 적이 있는 복장이었다. 미얀마군 535대대였다. 쿠톈콱 마을에선 537대대가 학살을 저질렀다고 주민들은 입을 모았다. 돈팩 마을에서도 군인과 국경경찰대가 목격됐다.
군경뿐만이 아니다. 위장군복 등을 입은 민간인들도 있었다. 로힝야족을 핍박해온 다른 소수 민족들도 학살에 가담했다. 이들은 긴칼과 창, 몽둥이를 들고 무장했고, 일부는 총도 들고 있었다. 마을 행정관이라고 불리며 로힝야족을 관리하고 핍박한 이들은 학살은 물론 여성들에 대한 성폭행도 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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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범죄
군인, 그리고 그들과 함께 군복을 맞춰 입은 민간인들은 여성들에게 더욱 잔인했다.로힝야 여성들은 자녀를 보호하고 자신의 생명을 지키려 도망을 가다가 붙잡혀 성폭행을 당했다. 남자들은 먼저 죽였고, 여성들은 따로 모으거나 뒤쫓아간 뒤 성폭행했다.
학살의 피해가 가장 컸던 뚤라똘리 마을은 사망자가 451명으로 추산되는데, 이중 여성이 248명으로 절반을 넘는다. 여성 중 10~20대 여성이 113명에 이른다. 여성 피해자의 절반 가까운 123명의 성폭행을 당한 뒤 살해됐다.
이 마을에선 미얀마 군인들이 남성들을 따로 분리해 먼저 죽인 뒤, 여성들을 4~6명씩 모아 강변지역인 초르파라(Chor para)로 끌고 갔다. 그곳에 있던 민가에 로힝야 여성들은 갇혔다.
이렇게 여성들을 끌고 가는 장면은 수차례에 걸쳐 나뉘어 진행됐다. 200명 이상의 여성을 끌고 갔다는 증언도 있었다. 군경은 여성들을 아직 태우지 않은 민가로 데려갔는데, 끌려간 집은 여성들의 가족이나 지인이 살던 곳이었다.
여성들이 안고 있던 아이는 100~200명으로 추산됐는데, 대부분 성폭행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어머니 품 안에 안긴 아이를 빼앗아 집어던지거나 흉기를 휘둘렀다. 미얀마 군경은 로힝야 여성들을 끌고 간 뒤 그녀들이 갖고 있던 장신구와 돈을 빼앗았다. 귀걸이를 가져가기 위해서 귀를 자르기도 했다. 그리고 여자들을 때리고 성폭행했다. 성폭행이 끝나면 민가의 문을 걸어 잠그고 불을 질렀다.
민가 안에는 아직 죽지 않은 여성들과 아이들도 있었다. 정신을 잃은 어머니 옆에서 아이가 울음을 터트리기도 했다. 울음소리를 들은 군인들은 다시 민가 안으로 와 총을 쐈다. 죽은 척하며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유지한 여성들은 민가가 불에 타기 전 안쪽에 가득 쌓인 시체를 봤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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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를 원한다”
로힝야 사람들은 난민캠프에 거주하면서도 자신의 신원이 밝혀지길 두려워했다.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보복이 두렵고, 아직도 잔혹했던 집단학살의 기억이 치유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집단학살의 가해자들이 여전히 살아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경험을 전한 로힝야 사람들은 국제사회에 말하고 싶은 것이 무엇이냐 묻자 ‘정의’를 원한다고 했다.
쿠톈콱 마을 생존 증언자
“내 부모를 죽이고 아내와 여동생을 성폭행하고, 집을 불태우고 재산을 빼앗아간 것에 대한 정의를 원합니다” 생존한 22세 로힝야족 남성
동백 마을 생존 증언자
“내가 살던 집과 정의를 되찾길 원합니다.
왜 이런 폭행을 당해야만 했고,
그들은 우리를 왜 죽였을까요.
국제사회의 정의를 원합니다” 생존한 30세 로힝야족 여성
학살이 벌어진지 500일이 훌쩍 넘었다.
정의는 아직 이뤄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