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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그가 용기를 낸 이유
손자영씨는 올해 스물 네 살이다. 떡볶이와 맥주, 그리고 나무를 사랑하는 그는 대학에서 사회복지학을 공부하면서 카페 아르바이트를 병행하고 있다.
자영씨는 돌이 갓 지난 때 보육원에 맡겨졌다. 보육원을 나와 ‘자립’을 시작한 건 5년 전의 일이다. 결코 쉽지 않은 일이지만 단단한 마음으로 잘 해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그의 마음이 ‘와르르’ 무너지는 때가 있다.
경향신문은 자영씨와 함께 드라마와 영화 속 ‘고아’ 설정 인물들을 찾아 분석해 보기로 했다. 법적 용어로는 ‘보호종료아동’으로 불리는 이들을 미디어는 어떻게 그리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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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모니터링
도식화된 등장인물
최고 시청률 23.8%를 찍으며 인기리에 종영한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의 주인공 ‘동백’은 고아이자 미혼모로 세상의 편견을 이겨내며 살아가는 인물이다. <이태원 클라쓰>의 주인공 박새로이와 오수아 또한 보육원에서 성장한 인물이다. 드라마에서 ‘천애고아’나 ‘보육원 출신’으로 설정된 등장인물을 만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드라마 소개 페이지에 서술된 인물 소개와 관련 기사에 ‘고아’, ‘보육원’ 키워드가 들어있는 드라마 등장인물 46명의 특성을 분석해보니, ‘고아의 공식’이라고 부를 만 한 패턴이 보였다.
주인공으로 등장할 때는 인물의 특성이 비교적 입체적으로 그려졌다. 주인공과 갈등하는 인물로 등장할 때 인물은 납작해지고 도식화가 더욱 공고해졌다.
영화 <악인전>의 연쇄살인마 ‘강경호’처럼 반사회적인격장애를 가지고 있거나, 범죄를 저지르는 인물, 음모를 꾸며 주인공을 곤경에 빠뜨리는 악역으로 등장하는 경우가 특히 많았다.
이같은 설정에는 대체로 ‘고아’는 불우한 환경에서 자란 탓에 결핍이 크고, 이를 채우기 위해 ‘물불 가리지 않는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결핍을 채우기 위해 큰 야망을 품고 배신을 일삼거나, 핍박을 받아 원한을 품고 복수를 꿈꾸게 된다는 식이다.
등장인물 약 46명의 특성을 분석해 관련 키워드를 붙여봤다. 키워드에 따라 분류해 보니 전체 인물을 여섯 개의 그룹으로 나눌 수 있었다.
부정적 이미지로 그려진 그룹은 악인과 악녀 그룹, 범죄자 그룹이다. 다음으로 야심가 그룹, 복수를 꿈꾸는 복수파 그룹으로 나뉘고 마지막으로 불운의 화신 처럼 불운한 일이 거듭 발생하는 동정의 대상 그룹, 매사에 긍정적인 캔디 캐릭터 비현실적 긍정 그룹이다.
특성 태그를 클릭하면 관련있는 인물을 모아볼 수 있다. 인물소개는 각 방송사의 드라마 소개 페이지에 서술된 것을 발췌했다.
대중매체 속 고아 등장인물 분류
각 등장인물이 더 궁금하시면 사진을 클릭해보세요.
특성 태그
*특성을 클릭하시면 해당 인물만 하이라이팅됩니다.
- #반사회적인격장애
- #범죄
- #불륜
- #배신과 음모
- #복수
- #누명
- #범죄나 폭력 피해
- #주변에 헌신
남
여
부정적이미지
악인과 악녀
범죄자·비행
욕망, 치열한삶
야망·야심가
복수파
동정+긍정
동정의 대상
비현실적긍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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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철강
사랑은 뷰티풀 인생은 원더풀IKBS2I2016
조철강군인
꽃제비 출신, 잔인하고 난폭한 사이코패스 악역
꽃제비 출신으로 기적처럼 소좌의 자리까지 올랐지만, 그의 야망은 끝이 없다. 마약 밀수와 비무장지대 불법 도굴 등 범죄행위도 서슴지 않고 한다. 게다가 잔인하고 난폭하며 기본적인 공감 능력조차도 없다. 정혁이 자신의 비리를 캐려 하자 그와 그의 가족을 무너뜨리려 한다.
인물 특성을 살펴보면 ‘고아’에 대한 편견에 더해 성별에 따른 편견도 함께 드러난다. 여성은 뜻을 이루기 위해 남성을 유혹하고 ‘불륜’을 저지르는 인물로, 남성은 범죄에 연루되거나 폭력적인 성향으로 묘사되는 경향이 있었다.
여성의 직업은 비서·디자이너가 많았고, 남성은 범죄집단의 일원으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서사를 접한 보호종료아동 당사자는 어떤 느낌을 받을까.
“저도 중고등학생 때 드라마 보는 것을 좋아했어요. 보육원이 배경으로 나오는 드라마를 보면 알게 모르게 편견이 저에게도 생겼어요. 사람들이 날 싫어하지 않을까. 무서워하지 않을까.”
- 열여덟 어른 캠페이너 손자영
자신에게 주어지는 고난과 역경을 오로지 ‘긍정의 힘’으로 견뎌내는 유형은 어떨까. 주인공의 선함을 과장되게 묘사한 부분이 때로 부담으로 다가오기도 했다고 자영씨는 말한다.
“고아라면 착하기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니야? 이런 생각을 하고 살아왔다고 친구와 얘기 나눈 적이 있어요. 저는 마냥 착한 사람이고 싶지 만은 않거든요.”
- 열여덟 어른 캠페이너 손자영
왜 이런 공식이 계속해서 반복될까.
평론가들은 그동안 사회가 규정해온 ‘정상가족’ 기준에서 벗어난 이들에 대한 편견과 선입견을 고스란히 이용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정덕현 평론가는 “가족단위 중심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그 틀에서 벗어나있는 이들을 비정상으로 취급하는 시각이 드라마에서 하나의 문법으로 오랫동안 이용되어 왔는데, 이제는 시청자들로부터 ‘구시대적’이라는 비판을 면할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요보호아동이나 보호종료아동을 주변을 돕고 헌신하는 선한 인물로 그린 경우는 어떨까. 평론가들은 이 경우에도 ‘정상가정’과 ‘비정상가정’을 나누고 후자에 대한 편견을 재생산한다면 똑같이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김선영 평론가는 “작품 안에서 선한 인물로 등장한다고 해도 결국 추구하는 서사가 ‘친부모를 만나서 행복을 찾는다’거나 ‘백마탄 왕자를 만나 신분상승한다’는 설정이라면, 이는 역시 고아를 ‘자립하지 못하는 존재’ 또는 ‘결핍된 존재’로 보는 왜곡된 시각이 들어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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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사 아카이브
어떤 대사들은 가시가 되어 남는다
“고아새X라더니, 아주 그냥 쓰레기구만 쓰레기”
한 지상파의 드라마에서 고아 출신의 등장인물을 향해 쏟아진 대사다. 해당 대사가 포함된 회차가 방영된 이후 시청자들은 시청자 게시판을 통해 제작진에 사과를 요청했다.
캐릭터의 설정 만큼이나, 미디어 속 대사들은 대중들의 선입견 형성에 영향을 미친다. 어떤 대사들은 보호종료아동 당사자들에게 가시가 되어 남기도 한다.
대중매체속 인물들을 살펴보면서 문제적 대사들도 찾아봤다. 차별을 조장하는 장면이나 혐오를 내비치는 수많은 대사들이 여과없이 등장했다. 대사들을 한자리에 모아봤다.
장면 카드들을 클릭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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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아새끼라더니 아주 그냥 쓰레기구만 쓰레기
고아새끼들은 어떻게든 티가 나요, 티가 나!사랑은 뷰티풀 인생은 원더풀IKBS2I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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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청자 조사
시청자들은 알고 있었다
온라인 인식조사 스타트업 업체 닛픽은 2019년에 불특정 사용자들을 대상으로 ‘고아’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이미지 조사를 실시했다. 조사 결과에서 많은 사용자들은 ‘고아’의 이미지에 불편함을 느낀다고 응답했는데, 그 중에서도 대중매체에서 묘사하는 고아 설정의 캐릭터의 영향으로 부정적인 이미지를 갖게 되었다는 응답이 다수를 이뤘다.
“매체에서 다루는 부정적인 학생들은 고아이거나 편부모 가정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리고 하는 대사는 꼭 ‘못 배워 먹어서 그래’. 매체에서 다루는 방식 자체가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웹툰, 드라마, 영화 등등에서 그런 이미지가 너무나도 쉽게 소비되고 있습니다. 오히려 실제를 다루는 뉴스에서는 그런 문제들을 별로 보지 못했습니다.”
- 조사 응답자 닉네임 <violet>
보다 정확한 이미지 분석을 위해 사용자들의 응답문 전문을 자연어 단위로 쪼개어 키워드 간의 관계 분석을 시행했다. 전체 997개의 사용자 응답문 중 상위 85.46%인 850개의 응답문을 토대로 분석을 진행했다. 그러자 ‘이미지’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보았을 때, ‘드라마’, ‘매체’, ‘부정’, ‘미디어’,‘영화’, ‘가난’, ‘개선’,‘영향’의 키워드가 차례대로 높은 가중치(*TF-IDF)를 보였다.
가중치가 높다는 것은 그 만큼 특정 키워드가 있는 문서 내에서 해당 키워드가 자주 나타났음을 의미한다. ‘이미지’를 중심으로 연관도가 높았던 상위 8개의 키워드 중에서 대중매체를 가리키는 키워드만 4번(드라마, 매체, 미디어, 영화) 등장한 셈이다.
원의 크기가 클수록 해당 키워드의 출현빈도가 높고, 키워드 간 연결된 선의 두께가 굵을 수록 연관도가 높다. ※데이터출처 및 분석: 닛픽(Nitpick)
키워드간의 연관관계를 보여주는 형태소 분석 결과도 마찬가지다. 전체 키워드 중에서도 ‘미디어, 방송, 캐릭터, 매체, 소비, 그리다, 티비’등 매체와 관련이 있는 키워드가 전체 다른 키워드들 보다 출현 빈도가 높았다. 동시에 키워드 간의 연관도 또한 매우 높았다.
이미 시청자들은 대중 매체에서 묘사되는 고아의 캐릭터가 고아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강화하는 것에 대해 경계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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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주변의 보호종료아동들
진짜 우리의 세계
자극적이고 도식화된 미디어 속 인물들 대신 우리 주변에서 살아가고 있는 보호종료아동들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면 어떨까.
아름다운재단은 지난해부터 보호종료아동의 자립을 지원하는 ‘열여덟 어른’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제가 좋아하는 단어가 ‘연대’예요. 보육원에 살고 있는 친구들이 겪고 있고 또 앞으로 만나게 될 어려움을 혼자만 짊어지지 않고 캠페이너들과 나누었으면 좋겠어요.”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렇듯 자영씨의 정체성도 ‘열여덟 어른’, 혹은 ‘보호종료아동’이라는 말 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대학에서 사회복지학을 전공하고 있는 자영씨에게 스스로는 어떤 사람인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물었다.
“저는 차별을 싫어하고, 혐오를 혐오하고, 사람을 좋아하고, 공동체를 원하고, 새로운 것을 배우는 것을 좋아하고, 미니멀리스트를 지향하고, 계속해서 좀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어하는 정체성을 가진 사람입니다.
저는 청소하는 것을 좋아하고 자연과 나무를 좋아하고, 흥을 좋아하고, 사람들을 좋아하고, 말하는 것을 좋아하고, 새로운 것에 영감 얻는 것을 좋아하고, 깨닫는 것을 좋아하고, 내 안에 있는 나를 마주하는 게 좋고, 좀 불편하지만 제 안의 상처들을 꺼내는 걸 불편해하면서도 좋아해요.
혼자만 사는 삶 말고, 다른 사람에게 관심일 기울이는 삶을 살고 싶어요.
- 열여덟 어른 캠페이너 손자영
매년 2600명의 보호종료아동들이 사회에 나온다. 이들은 어엿한 사회의 구성원으로 곳곳에서 살아가고 있다.
연도별 보호종료아동 퇴소 현황
※출처: 보건복지부
그리고 그들의 삶은 매체에서 보여지는 것보다 훨씬 평범하고, 또 다채롭다.
캠페이너 인터뷰 영상 보러가기
※ 사진 출처경향신문 DB, 아름다운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