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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1943년 일제 강점기, 어느날 갑자기 당신은 고지서 한 통을 받게 됩니다. 바로 일제의 강제동원 소집고지서.
앞으로 당신의 삶은 어떻게 흘러가게 될까요? 간단한 프로필을 입력하시면, 당신과 가장 비슷한 강제동원 피해자의 여정을 함께하면서 이들의 아픔과 고통을 느껴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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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은 지난 두 달, 전국 곳곳에 흩어져 있는 일제강점기 흔적을 찾아 나섰다. 강제동원 피해자 219명의 구술을 전수 분석해 그들의 기억 속에만 존재했던 여정을 따라갔다. 일본, 사할린 등으로 끌려가며 머문 곳을 지도 위에 점으로 찍고 선으로 이었다. 80년간 한번도 정리되지 못했던 ‘강제동원의 길’이 모습을 드러냈다. 길 위에 남은 흔적들은 멈춰버린 증언을 대신해 ‘야만의 시대’를 말하고 있었다.
경향신문이 분석한 219명 중 176명은 자신이 끌려갔던 이동동선을 불완전하게라도 구술했다. 나머지 43명은 관련 증언이 없었다. “밤에 이동하다 보니 이동동선을 모르는 경우도 있었고, 기억을 하고 있더라도 우리가 미처 확인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위원회 조사관으로 직접 구술을 받았던 허광무 일본군 ‘위안부’ 문제연구소 소장은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이들 176명이 증언한 이동경로는 평양/서울 용산/서산/부여/전주/군산/고흥/논산 → 대전역 → 부산역 → 부산항 제1부두 → 관부연락선 → 일본 시모노세키, 익산/군산/장성/순천/순창/고흥 → 여수항 → 관려연락선 → 일본 시모노세키, 목포 유달 국민학교 → 목포 선창 → 소안도/추자도 → 제주도/우도 등이다. 대부분 철도를 이용해 항구로 모인다. 이는 ‘일제가 한반도를 근대화 했다’고 주장할 때 근거로 언급되는 시설들이다.
기차로 이동했다는 증언 중 “객실에 앉아서 갔다”는 내용은 한 건도 찾지 못했다. “인제 엇다가 싣느냐. 짐차여 사람타는 차에는 안 태우고, 소새끼 태우는 곳간이여. 튀지 못 하게 할라고, 그거는 인간 타는 데가 아니에요.” 만 15세에 강제동원된 권석순은 기차 안 풍경을 이렇게 설명했다. 짐칸에 실어 일본으로 가기 전 소독하는 행위는 일제가 이들을 소나 돼지와 같은 가축 취급했음을 알게 한다. 당시 일제는 ‘내지(일본)와 조선(한국)은 한 몸이다’는 내선일체를 내세우며 조선인의 전쟁참여를 독력하고 있었다.
이 외에 구술록을 통해 징용 통보를 받고 처음 모이는 장소도 분석이 가능했다. 크게 국민학교(초등학교), 관청(부청, 군청 등), 기차역 그리고 ‘여관’ 네 가지로 분류됐다. 이중 여관을 제외하면 대부분 현재 위치를 특정할 수 있는 곳들이다. 마음만 먹는다면 보다 정확한 동선 파악도 가능하다는 의미다. 그럼에도 광복 후 80년 동안 이를 활용한 추가 역사 발굴은 이뤄지지 않았다. “할 수 없었어요. 증언을 정리해 후속 연구가 가능하도록 해야했지만 그럴 시간도 예산도 없이 위원회는 해산됐습니다. 증언상황을 녹음한 자료 중 일부는 제대로 관리하지 않아 재생이 안된다고 들었습니다.” 위원회의 시작부터 끝까지 함께한 정 위원은 이렇게 말했다. 한국 정부는 증언을 확인하고, 객관적 역사로 남기는데 관심이 없었다. 광복 후 80년 동안 정확히 몇 명이나 끌려갔다 돌아오지 못했는지조차 모르는데는 이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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