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창간하다
1946년 10월 6일
경향신문은 해방 이듬해에 창간했다. 해방 직후는 사상 대립과 좌우 갈등으로 갈피를 잡을 수 없는 혼란의 시대였다. 경향신문은 사상적 갈등과 정치적 혼돈 속에서 시시비비·불편부당한 정론지를 표방, 독자에게 첫선을 보였다.
경향신문은 가톨릭 재단을 배경으로 태어났다. 1906년 프랑스 신부 플로리안 드망쥬가 창간했다가 일제에 의해 강제 폐간됐던 주간 경향신문 제호를 계승했다. 노기남 천주교 서울대교구장이 초대회장에, 양기섭 신부가 초대사장에 취임했다. 창간 당시 사원 수는 51명이었다.
경향(京鄕)이라는 제호에도 가톨릭의 영향이 깃들어 있다. 서울(京)과 지역(鄕)을 망라한다는 뜻으로, 세계 천주교회의 최고지도자인 교황이 부활절·성탄절 때 하는 강론 ‘우르비 엣 오르비(Urbi et Orbi·로마 도시와 전 세계에게)’와도 뜻이 통하는 제호다. 오늘날 ‘우르비 엣 오르비’ 강론은 세계를 향한 평화의 메시지이자 통합과 화해의 대명사가 됐고, 그 정신은 경향신문에도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창간사
…인민은 어느 피리에 어느 정도로 춤을 추어야 좋을지 모를 형편이거니와 하물며 필진이 이에 추수하여야 안될 것은 더 말할 것도 없다. 다만 건국전후 초몽혼돈에 처하여 도의양심을 수완에 옮기는 실천적 일개 행자로서의 신문인과 신문이 필요한 시기가 왔는가 할 뿐이다.
다만 신문은 마침내 보도기관이므로 자력에 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오보기만의 악덕을 범치 않고저 하노니 거짓말 아니하는 것만으로도 혼란기의 고덕이 되려니와 「정말」하기를 항산천업으로 할가한다.
1946년 10월 6일 경향신문 창간호를 내고 서울 소공동 사옥 앞에서 기념촬영 하는 직원들
4.19 혁명과
이승만 대통령 망명
1960년 5월 29일
4·19 혁명으로 12년만에 자리에서 물러난 이승만 대통령은 5월29일 김포공항을 통해 비밀리에 하와이로 망명했다. 이승만 정권을 비판했다가 폐간 처분을 받은 경향신문은 4·19 혁명 직후 복간한 뒤, 이 대통령의 망명 사실과 도망치듯 빠져나가는 순간을 단독 취재해 특종으로 보도했다.

이박사 부처 돌연 하와이로 망명
오늘 아침 김포공항을 출발
“이제 무슨 말을 하겠소. 그대로 떠나게 해주오.”
…이날 공항에는 허정 수석국무위원과 이수영 외무차관 그리고 그의 운전수와 경호원 수명이 전송할 뿐 십륙년 전 그가 국부로 추앙받으며 동포의 환호성에 묻혀 환국했을 때와는 너무도 대조적이어서 파란 많은 그의 생애를 말하는 듯하였다.
남기고 싶은 말이 없느냐는 기자질문에 이박사는 “지금 내 입장에서 무슨 말을 하겠소. 얘기를 하면 내 생각하는 일이 달라질지 몰라. 다 이해해주고 그대로 떠나게 해 주오”라고 말하였으며 후란체스카 부인도 소감을 묻는 기자에게 “낫씽… 아이 러브 코리아(아무것도 없소…나는 한국을 사랑합니다)”라고만 말했다.
독재정권에 의해 폐간됐던 경향신문이 복간되던 날, 시민들이 서울 소공동 옛사옥 앞 깃발 아래서 만세를 부르고 있다. 불의에 맞서다 폐간된 신문의 복간은 정론과 직필 언론의 복원을 의미했고 4·19와 더불어 국민들에게 민주시대를 알리는 하나의 상징이었다. 경향은 이제 당시 시민들의 염원대로, 권력과 자본으로부터 자유로운 독립언론으로 거듭났다.
허기진 군상
1964년 5월 27일
물가가 뜀박질하여 민생고가 유난히 극심하던 1964년 2월, 보리 수확철은 아직 멀어 보릿고개는 까마득한데 전국에서 끼니를 잇지 못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경향신문이 지국망을 통해 조사한 결과 끼니를 거르고 있는 농가가 전북 48만명, 전남 30만명, 경남 45만명, 충남 10만명으로 드러났다. 충격적인 숫자였다. 경향신문은 ‘허기진 군상’ 시리즈에서 농촌의 비참한 실태와 도시 영세민의 한숨 섞인 삶의 현장을 집중조명했다.
경향신문은 그해 연초부터 서민들 허리를 휘게 했던 ‘삼분(三紛·밀가루, 설탕, 시멘트) 폭리’ 사건을 터뜨려 주목을 받았다. 당시 기업들이 정부로부터 지원받은 미국의 원조 달러를 설탕, 밀가루 같은 소비재 수입에 씀으로써 국내 소비시장을 장악해 폭리를 취했지만, 정부는 기업의 뒷돈을 받고 이를 묵인한다는 것이었다.
허기진 군상, 삼분폭리 등의 기사는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분노를 샀다. 미운털이 박힌 경향신문은 이후 강제매각되는 비운을 겪었고, 1974년 문화방송과 통합되면서 5·16장학회(현 정수장학회) 소유로 넘어갔다.

허기진 군상
구례군의 한 식구
「칡뿌리」먹는 가족
“살게 해 주지도 못하면서 끝내는 죽는 자유까지 앗아가다니.” 일곱 식구의 가장이 ‘파라티온’을 먹고 숨져가는 것을 이웃 사람들이 구해 놓았을 때 그의 희멀건 눈에서 흐르는 눈물의 의미였다. 전남 구례군 봉봉리에서 칡뿌리와 쑥으로 하루하루를 이어가는 이OO(47)씨의 경우이다.
똑같은 형세의 마을사람들은 누가 누구의 집을 구걸할 수도 없다. 어린것들이 칡뿌리를 물고 여윈 다리를 휘청거릴 때 어버이 마음이 오죽이나 쓰렸으랴!까닭에 그는 그꼴을 피하려 농약을 마셨던 것이다. 그는 되살아난 자신을 또다시 저주했다.
기아를 해방하겠다던 5·16의 공약이 “자살 유행”을 결과하고 중농정책을 외치는 민정이 농민의 입에 칡뿌리를 물려놓았다. 이 빈 창자를 빙자하여 외곡 수입업자는 수십억씩 폭리를 보고.
삼분 폭리 사건을 폭로한 경향신문 1964년 2월1일자
전태일 분신 한 달 전,
평화시장 실태 보도
1970년 10월 7일
전태일 열사가 분신하기 한 달 전, 경향신문은 사회면 톱으로 평화시장의 참상을 알렸다. 당시 전태일 열사는 경향신문사 앞에서 가슴을 졸이며 신문이 나오길 기다렸다가 300부를 구입해 평화시장 일대에 돌렸다고 한다.
그러나 보도 이후 실태조사를 약속했던 노동청은 태도를 바꾸어 이들을 압박했다. 결국 11월13일 전태일 열사는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며 분신으로 생을 마감했다.

골방서 하루16시간 노동
노동조건 0점… 평화시장 피복공장
소녀 등 2만여명 혹사
거의 직업병… 노동청 뒤늦게 고발키로
나어린 여자등이 좁은 방에서 하루최고 16시간이나 고된 일을 하며 보잘것 없는 보수에 직업병까지 얻고 있어 근로기준법을 무색케하고있다. 평화시장내의 피복가공공장은 4백여개나 되는데 O작업장의 경우 건평2평 정도에 자봉틀등 기계와 함께 15명씩을 한데 넣고 작업을 해 거의 움직일 틈이 없을 정도로 작업장은 비좁다.
이들에 의하면 이런 환경속에 하루 13시간~16시간의 고된 근무를 하고 있으며 첫째 세째 일요일을 제외하고는 휴일에도 작업장에 나와 일을 하고 여성들이 받을 수 있는 생리휴가 등 특별휴가는 생각조차못 할 형편이라는것이다. 특히 13세 정도의 어린소녀들이 대부분인 조수의 경우 이미 4~5년 전부터 받는 3천원의 월급을 현재까지 그대로 받고있다. 이밖에도 이들은 옷감에서 나는 먼지가 가득찬 방안에서 하루종일 일해 폐결핵 신경성 위장병까지 앓고있어 성장기에 있는 소녀들의 건강을 크게 위협하고 있다는 실정이다.
평화시장에서 재단사로 일하던 시절의 전태일(왼쪽)
5·18 상황일지 첫 공개
1988년 5월 17일
경향신문은 5·18 당시 광주 상황을 생생하게 기록한 광주시청의 상황일지를 처음으로 세상에 보도했다. 광주시청은 1980년 5월18일부터 27일까지 시가지 곳곳에서 일어난 상황을 동사무소나 통·반을 통해 수시로 접수해 정리했다. 매일매일 접수된 상황보고는 시간대로 정리돼 ‘5·18 사태 상황 및 조치사항’이란 한 권의 보고서로 만들어졌지만, 이 보고서는 완성되자마자 회수돼 소각 처분됐다. 당시 현장을 취재한 경향신문 정건조 기자는 그중 한 권의 보고서를 입수해 간직했고, 8년의 세월이 흘러서야 비로소 공개할 수 있었다. 이 상황보고서는 관청에서 작성됐기 때문에 미흡한 점도 많지만, 행정기관의 첫 공식기록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광주 1980년 5월… “악몽의 10일” 비록 첫 공개
시청 「5·18」 상황일지 본지 단독 입수 ㊤
▲ 15:45 - 금남로에서 군인들에게 쫓긴 대학생들이 북동쪽 민가에 잠입하자 군인들이 가정집을 수색하여 대학생으로 보이는 장발 청년과 여자를 마구 때리고 차고 대검으로 찌르는 등 난폭한 행동을 한 후 차에 실어 연행해 감
▲ 16:50 - 광주고와 계림 파출소 간 동원빌딩 앞에 고장 난 장갑차 1대에 학생 1백50명이 접근하자 장갑차에서 발포, 초·중·고생 4명 중상(계엄군이 싣고 감)
1987년 6월20일자 경향신문 1면. ‘어떻게 세운 나라인데…’라는 제목으로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대를 비판하는 글이 실려 있다.
박정희 정권에 의해 강제매각된 경향신문은 군사정권 시절 긴 겨울을 보냈다. 유신체제의 정당성을 옹호하는가 하면,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벌어졌을 때도 실상을 제대로 보도하지 못했다. ‘친여 기관지’로서의 명맥은 1987년 6월항쟁의 한복판까지 이어졌다. 6월19일 경향신문의 반민주적 논조에 분노한 시위 군중이 지방 배송을 위해 서울역 앞에 쌓여 있던 경향신문을 소각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이 사건을 계기로 경향신문 기자들은 언론자유선언문을 채택하며 민주언론으로 거듭나는 운동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5·18 상황일지 보도는 그런 역사 속에서 경향신문의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는 사례다. 앞으로 경향신문이 어떻게 변할지는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80년을 발행하며 겪은 순탄치 않은 역사가 오늘의 경향신문을 만들었다는 점이며, 우리는 모두 지난 역사 속에서 오늘 어떻게 해야 할지 배운다는 사실이다.
경향신문 경영 독립
1998년 2월 3일
경향신문이 한국 언론 사상 처음으로 사원들이 소유·경영의 주체가 되는 독립 언론기관이 됐다. 1990년 경향신문을 인수해 경영해 왔던 한화그룹은 보유주식 전부를 우리사주조합에 양도했다.
권력과 자본으로부터 자유로운, 사원주주회사 형태의 언론사는 한국에서는 물론 세계적으로도 드물다. 경향신문은 28년째 독립언론으로서 정체성을 잃지 않고, 저널리즘의 본분을 잊지 않으며 계속해서 나아가고 있다.

한화그룹 모든 주식 우리사주조합에 양도
‘자립경영통해 독자의 신문으로 재탄생’
경향신문이 대주주인 한화그룹과 손을 떼고 전사원이 주인이 되는 독립된 언론기관으로 탈바꿈한다.
경향신문과 한화그룹은 2일 대기업이 언론기관을 운영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사회적 요구에 부응하고 한화그룹이 구조조정 계획에 더욱 박차를 가해 핵심사업 분야에 전념토록 하기 위해 이같이 합의했다. 이에 따라 한화그룹이 소유하고 있는 경향신문 주식 전부가 앞으로 구성될 경향신문 우리사주조합에 양도된다.
1998년 3월30일 경향신문 전 사원이 참석한 가운데 사원주주회 출범식을 열고, 사원주주 언론으로의 새로운 출범을 공식 선언하고 있다.
최초의 남북 정상회담
2000년 6월 14일
2000년 6월 13일 평양 순안공항에서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손을 맞잡았다. 1945년 분단 이후 55년 만에 남북 정상이 만난 것이다. 남북 정상회담의 역사적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두 정상이 악수하는 모습의 전면 사진으로 1면을 제작했다.
6·15 남북정상회담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김대중 대통령이 손을 잡고 있다.
남북정상회담을 축하하기 위해 시민들이 모였다.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
2007년 4월 25일
경향신문은 1987년 6월 혁명 이후 20년의 민주화 과정에서 지식인이 과연 민주주의 심화와 발전을 위해 어떤 역할을 했으며, 지식인과 권력의 관계가 어떻게 변하고 왜곡되어 왔는지를 중점적으로 다룬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 시리즈를 내보냈다. 지식인이 권력에 저항하거나 추종하는 이분법적인 ‘낡은 지식인-권력 관계’를 뛰어 넘어 지식인과 권력간 생산적인 관계를 성찰해보자는 취지였다.
기획 시리즈는 계간지의 리뷰 대상이 되고, 주요 내용이 각종 학술 논문에 인용되는 등 큰 호응을 받았다. 특히 학자들의 이념 성향을 전체 지형도 속에서 살펴볼 수 있도록 시각화한 ‘지식인 이념 분포도’는 지식 사회의 화제가 됐다.

지식인 사회, 분화한 만큼 진화했을까
지금, 그들은 어디에 서 있나
…경향신문은 최근 이들의 사상 궤적을 토대로 ‘2007년 한국사회 지식인 지도’를 작성했다. 정치·경제·사회 이념의 좌우 성향(가로축), 민족주의 성향 여부(세로축)로 한 2차원 공간에 주요 지식인을 배열했다. 두 축의 교차점에서 멀수록 이념적 특성을 뚜렷이 보여준다. 강정구(동국대 교수)와 강만길(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장·고려대 명예교수)은 좌파 성향에 차이가 있지만 민족주의적 특성이 강하다. 강정구는 좌파 민족주의자, 홍세화(한겨레신문 기획위원)는 좌파 탈민족주의자, 복거일(문화미래포럼 대표·소설가)은 우파 탈민족주의자를 각각 대표한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 강행
2008년 5월 30일
촛불집회는 시민들과 합의나 소통없이 ‘먹거리 주권’을 포기한 정부의 독단이 발단이 됐다. 시민들은 한·미 쇠고기 협상에 불안감을 느끼고 반대했지만, 당시 이명박 대통령은 오히려 “값싸고 질 좋은 고기를 먹게됐다”며 일축했다. 정부는 협상조건을 사실상 확정하는 ‘장관 고시’를 5월29일 강행했고, 촛불집회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민주화를 외쳤던 1987년 6·10 항쟁 이후 21년만에 일어난 전국적인 대규모 반정부 시위였다. 대학생과 종교인 등 재야단체가 주도했던 6·10 항쟁과 달리, 2008년 촛불집회의 주역은 시민들이었다. ‘촛불소녀’로 불리는 10대 여고생이 처음으로 촛불집회를 시작했다. 아이들과 함께 ‘유모차 부대’가 나왔고, 군복을 입은 예비군 수백 명도 시위대와 함께 구호를 외쳤다. 뚜렷한 지도세력이나 ‘배후’는 없었다.
촛불집회에 참여한 시민들은 경찰특공대와 물대포를 동원한 무차별 진압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6월10일에는 전 세계가 놀란 ‘100만 촛불대행진’이 열렸다. 정부의 오만과 강경 진압이 촛불을 키운 셈이다. 결국 이명박 대통령은 “뼈저리게 반성했다”며 고개를 숙였다. 경향신문은 미국산 쇠고기 수입 강행의 부당함과 시민들의 저항 과정을 생생하게 보도해 시민들의 격려와 지지를 받았다.

미 쇠고기 고시 강행
국민저항 전국 확산
미국산 쇠고기 수입위생조건 개정안에 대한 농림수산식품부 장관 고시가 강행됐다. 고시가 관보에 게재되면 즉시 공포 효력을 갖게 돼 이르면 다음주부터 미국산 쇠고기가 시중에 유통될 것으로 보인다. 시민·학생들과 시민·노동단체들은 “고시는 국민에 대한 선전포고”라며 대대적인 국민 저항운동에 돌입했다. 정권과 국민이 직접 대치하는 상황이 제2의 6·10항쟁을 연상시키고 있다.
◇SRM 제외 모든 부위 수입 허용 = 정부는 29일 미국산 쇠고기에 대한 국민들의 불안감이 고조되고 있는데도 새로운 수입위생조건 고시를 강행했다. 굴욕적인 한·미 쇠고기 협상 결과물인 미국산 쇠고기 수입위생조건이 고시됨에 따라 LA갈비 등 뼈있는 쇠고기와 내장 등 부산물이 2003년 12월 이후 4년6개월 만에 수입된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반대 촛불집회 참석자들이 2008년 6월3일 밤 경찰청을 항의 방문하기 위해 경향신문사 앞을 지나면서 "경향신문 힘내라"고 외치고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
영결식과 노제
2009년 5월 30일
5월 29일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이레 만에 치러진 영결식 이후 노제가 열린 서울광장 모습을 담았다.

이 추모의 민심은 무엇인가
…세종로 로터리에서 시청 앞을 거쳐 서울역 앞까지 이어진 추모 인파 40여만명은 “노무현 당신을 사랑합니다. 영원히 기억하겠습니다”라고 외치기도 했다. 이후 운구차는 만장 2000여개를 들고 뒤따른 시민들의 배웅을 받으며 ‘아침이슬’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가 불려지는 가운데 서울역까지 이동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부인 이희호 여사와 함께 서울역 노무현 전 대통령 분향소를 조문한 뒤 발길을 돌리고 있다.
시민분향소가 마련된 서울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시민들이 고인을 추모하며 풍등을 하늘로 날리고 있다.
기자 윤리강령
2011년 10월 6일
경향신문 65주년 창간일을 맞아 언론의 본분을 되새기기 위해 한국기자협회가 공포한 ‘기자 윤리강령’을 1면에 실었다. 광고전문가 이제석씨가 제작해 경향신문에 재능기부했다.

…나는 이 구닥다리 문서가, 언론이 세상의 부조리를 바로잡기 이전에 스스로는 과연 얼마나 잘하고 있는가를 먼저 묻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 기자라는 직업은 사명감이나 보람 없이는 하기 쉬운 일이 아닐 것 같다. 하지만 만일 국민이 매일 내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면, 그리고 내가 쓴 한 글자 한 글자에 독자들의 생각과 감성이 얹히고 그로 인해 한국의 문화와 역사가 1도씩 달라지고 있다면, 그만큼 심장이 요동치는 일이 또 어디에 있을까. 스스로는 과연 얼마나 잘하고 있는가를 먼저 묻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 - 이제석 이제석광고연구소대표
한·미 FTA 비준안을
통과시킨 얼굴들
2011년 11월 24일
2011년 11월 22일 한나라당이 단독으로 한·미 자유무역협정 비준동의안을 강행처리하자 이에 찬성한 국회의원 151명의 얼굴을 1면에 실었다. 불평등하고 불합리한 독소조항을 그대로 포함한 채 앞으로 우리의 법과 제도, 관행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바꿀 수 있는 한·미 FTA를 강행처리한 장본인이 누구인지 기록하고 알리기 위해서다.
10여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 한·미 FTA에 대한 평가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2025년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한·미 FTA를 무력화하는 관세 카드를 꺼내들었다. 3500억 달러 규모의 대미 투자를 약속하고 상호관세를 15%로 인하한다는 내용으로 합의하기는 했지만, 대미 관계가 여전히 한국의 안보와 경제 전체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했다.
박근혜 의원이 한·미 FTA비준안 표결을 마친 뒤 국회를 떠나고 있다.
한·미 FTA 강행처리 규탄집회에 참가한 시민이 경향신문을 펼쳐 놓고 있다.
세월호 참사
2014년 4월 17일
2014년 4월 16일 인천에서 제주로 향하던 여객선 세월호가 진도 인근 해상에서 침몰했다. 304명이 목숨을 잃거나 돌아오지 못했다. 그 중에는 수학여행을 떠난 안산 단원고 2학년 학생 250명도 있었다.
세월호 참사는 한국사회에 지워지지 않을 상흔을 남겼다. 매년 돌아오는 4월이 되면, 한국 사회는 ‘더 안전한 세상을 만들었는가’라는 질문을 다시금 곱씹게 됐다.

여객선 침몰 283명 실종(17일 0시 현재)… ‘골든타임’ 놓쳤다
…제주도 수학여행에 나선 고교생 등 462명을 태운 여객선이 전남 진도 해상에서 침몰, 4명이 숨지고 283명이 실종되는 대형 참사가 발생했다. 여객선 운항사는 배가 침몰하고 있음에도 승객들에게는 30분 동안이나 “가만히 있으라”며 구조조치를 제대로 취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세월호 침몰 사고해역에서 수색작업
세월호 침몰 참사 사흘째인 4월18일 안산 단원고등학교 2학년 교무실 앞에서 한 여학생이 오열하고 있다.
진도 팽목항‘성완종 리스트’
2015년 4월 14일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이 경향신문에 정치자금을 건넨 인사 8명을 폭로했다. 당시 박근혜 정부의 최고 실세들이 연루된 특종 보도였다. 그가 남긴 제보 전화는 세상에 남긴 마지막 육성이었다. 성 전 회장은 북한산 형제봉 부근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성 전 회장은 이명박 정부의 자원 외교 비리 사건의 표적이 된 뒤 검찰의 먼지털이식 수사로 9500억원의 분식회계와 회사 돈 215억원을 횡령한 혐의로 받고 사전구속영장이 청구된 상태였다. 성 전 회장은 무리한 수사에 억울함을 토로하기도 했다.
성 전 회장이 목숨과 맞바꾼 폭로는 그러나 흐지부지됐다. 수사 결과 대부분이 무혐의 처분됐고, 이완구 총리와 홍준표 경남지사는 대법원에서 무죄 확정 판결을 받았다. 검찰은 부실 수사로 비판을 받았고, 양승태 대법원은 ‘성완종 리스트 영향분석 및 대응방향 검토’ 문건에서 “성완종 리스트 등으로 인하여 당분간 국정장악력 및 추진 동력이 크게 감소될 가능성 있음”이라고 분석해 관련 사건 판결에 정권의 눈치보기를 한 것 아니냐는 의혹을 받았다.

“이완구 총리에도 재선거 때 3천만원 주고 왔다”
성완종 경남기업 전 회장(새누리당 전 의원)이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에게 미화 10만달러를 건넸다고 밝혔다. 또 2007년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 때 허태열 전 비서실장(당시 캠프 직능총괄본부장)에게 현금 7억원을 전달했다고 말했다. 9일 오전 법원의 영장실질심사에 불참한 그는 오후 3시32분쯤 북한산 형제봉 매표소 인근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2015년 4월8일 서울 명동 은행연합회관에서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이 이명박 정부 시절 특혜를 받았다는 의혹에 대해 자신은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흙수저의 길
2016년 1월 1일
경향신문은 2016년 창간 70주년 연중기획으로 청년 문제를 다뤘다. 새해 벽두부터 무거운 화두를 던진 ‘부들부들 청년’ 기획은 박순찬 화백의 그림과 함께 시작했다.
당시 지적한 한 해 1000만원이 넘는 학비, 스펙경쟁, 취업난, 저임금, 치솟는 주거비 같은 문제는 여전하다. 20~30대 사망 원인 1위가 자살인 현실인 아직도 바뀌지 않았다. 지금도 청년들은 ‘붕괴와 새로운 시작’을 원하고 있을까.

돈 사회다. 금마차는 돈의 힘으로 달린다. ‘금수저’는 ‘금수저’를 낳는다. 계층 이동의 사다리는 끊어졌다. ‘흙수저’들은 세상을 떠받치며 가시밭길 위에서 그저 견디고 있다. TV를 틀면 금수저의 삶이 생중계된다. 쌀값 폭락 대책을 요구하려다 물대포를 맞고 사경을 헤매는 농민 이야기 같은 것은 잘 보이지 않는다. 서민의 돈이 다시 한번 대기업에 빨려 올라간다. 심지어 아파서 병원을 찾는 순간에도…. 새해가 왔다는 이유만으로 우리는 희망을 말할 수 있을까. 당신은 이 그림 속 어디에 있는가.
전문대를 다니다 잠시 사무보조원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23세 여성이 2016년 말 밤늦게 일을 마치고 귀가하고 있다. 집으로 가는 육교 위 달빛이 길을 비춰주고 있다. 신문 위의 컵라면·김밥
2016년 10월 6일
경향신문 창간 70주년 기념호 1면은 컵라면과 삼각 김밥 밑에 깔린 신문의 모습을 담은 파격적 다지인으로 눈길을 끌었다. 그 어떤 신문 1면 보다 ‘현실적’이라는 평을 얻기도 했다. 광고 디자이너 이제석씨가 제작했다.

오늘 알바 일당은 4만 9천원... 김영란법은 딴 세상 얘기
내게도 내일이 있을까?
신문은 일상입니다. 시대를 기록하는 엄중한 사초이면서 때로는 누구나 바닥에 깔고 쓰는 800원짜리 간편 도구이기도 합니다.
경향신문 창간 70주년 신문 위에 컵라면과 삼각 김밥을 올려 놓았습니다. 이 시대 고달픈 청년들의 상징입니다. ‘신문의 얼굴’인 1면 ‘공생의 길 못 찾으면 공멸...시간이 없다’는 제목과 기사, 사진을 가린 한 끼 먹거리는 기성세대의 형식적인 엄숙주의를 조롱하며 청년 문제보다 더 중한 것이 무엇이냐고 반문하고 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 파면
2017년 3월 11일
헌법재판소가 2017년 3월10일 박근혜 대통령의 파면을 선고했다. 헌정 사상 첫 대통령 탄핵 사례였다. 경향신문은 박 대통령이 청와대 춘추관에서 ‘최순실 국정농단’에 대한 3차 대국민담화를 발표한 뒤 단상을 내려오는 모습의 사진을 1면에 크게 싣으면서 파면 소식을 전했다.

불의는 퇴장 ‘이게 나라다’
박근혜 파면… 헌재, 전원일치로 헌정 사상 첫 대통령 탄핵
“최순실 사익 추구 지속적으로 지원, 중대한 헌법·법률 위배”
시민들 “주권재민 확인, 민주주의 도약”… 대선 5월9일 유력
“헌법은 대통령을 포함한 모든 국가기관의 존립 근거이고, 국민은 그러한 헌법을 만들어내는 힘의 원천입니다.”
10일 오전 11시. 이정미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은 ‘2016헌나1 대통령(박근혜) 탄핵’ 심판 선고 요지를 읽기 직전 대통령 위에 헌법, 그 위에 국민이 있음을 상기시켰다. 역사의 법정은 21분 후 재판관 8인 전원의 이름으로 “국민의 신임을 배반했다”며 박근혜 대통령의 파면을 선고했다.
‘더 큰 헌법’을 위하여
2018년 1월 1일
경향신문은 신년을 맞아 대한민국 헌법을 손질할 때가 되었다는 취지의 <헌법 11.0-다시 쓰는 시민계약> 기획기사를 내보내면서 본지 전체를 덮는 별도의 커버면을 제작했다. 커버면에는 한국을 비롯해 세계 각국의 헌법 제1조가 수록돼 있다.
20세기에 만들어진 현행 헌법은 21세기의 새로운 사회적·기술적 환경을 제대로 반영하고 있지 못하다. 헌법이 ‘낡고 좁은 그릇’이 된 것이다. 개헌을 통해 헌법을 손질하지 않는다면 점점 더 많은 조항들이 헌법재판관 9명의 해석에 따라 휘둘릴 수밖에 없다. “모든 시민혁명은 새로운 사회계약으로 완성된다.” 이 명제는 여전히 유효하다.

대한민국 헌법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로 시작한다. 독일 헌법 첫머리는 ‘인간의 존엄은 침해되지 아니한다’이다. 국가로 시작한 헌법과 인간으로 시작한 헌법. 2018년 1월1일자 경향신문 표지는 이런 차이에 주목한 한 편의 타이포그래피(Typography, 글자체나 글자 배치를 이용한 디자인)이다. 타이포그래피는 글자를 역사적, 환경적, 철학적으로 해석해 표현한다. 대한민국 헌법은 명조체와 가운데 정렬 방식을 채용했다. 명조체는 붓글씨에서 비롯된 것으로 동양의 관념적 특징을 갖고, 가운데 정렬은 권위적이면서도 우아한 방식이다. 독일 헌법은 고딕체와 왼쪽 정렬 방식을 썼다. 고딕체는 인간 중심으로 설계된 기능적 글자체다. 왼쪽 정렬은 1900년대 이후 등장했는데, 사람이 읽기에 가장 편한 방식이다. 개헌이 화두로 떠오른 2018년 독자들에게 우리 헌법의 의미와 나아갈 방향에 관해 생각해보자는 취지로 김의래 디자이너(국민대 시각디자인과 겸임교수)가 제작했다.
주요국 헌법이 수록된 커버면매일 김용균이 있었다
2019년 11월 21일
윤○○(54 떨어짐) ○○○(40 떨어짐) 김○○(미상 떨어짐) 이○○(50 떨어짐) ...
경향신문은 1면에 고인이 된 노동자 1200명의 명단을 실었다. 2018년부터 2019년 9월 말까지 고용노동부에 보고된 중대재해 중 떨어짐, 끼임, 깔림·뒤집힘, 부딪힘, 물체에 맞음 등 주요 5대 원인으로 사망한 노동자들이다. 태안화력발전소 사고로 사망한 김용균씨의 이름을 딴 ‘매일 김용균이 있었다’ 기획은 이렇게 시작됐다.
당일 1면 통편집 지면은 소셜미디어에서도 화제가 됐다. 김훈 작가는 “오랫동안 종이신문 제작에 종사했지만 이처럼 무서운 지면을 본 적이 없다”고 했다. 경향신문의 문제 제기는 고질적인 산업재해 문제가 한국 사회의 중심 이슈로 다시금 떠오르게 만드는 계기가 됐고, 중대재해처벌법 제정 등으로 이어지는 하나의 물꼬를 텄다.

노동자들 사망 원인 되짚어서 기억하다
경향신문, 1355명 전수조사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산업재해 사망률 1위라는 불명예를 안고 있다. 그러나 통계는 추상적이다. 왜 노동자가 일하다가 죽었는지 잘 알려지지도 않을뿐더러, 보도되더라도 금세 잊힌다. 매일 ‘김용균’이 있었고, 내일도 ‘김용균’이 있을 것이지만 한국 사회는 노동자의 죽음에 무감각해졌다.
지난해부터 올해 9월 말까지 발생한 사고성 사망 재해에 대해 산업안전보건공단이 작성한 조사 의견서 전량을 확보했다. 총 1305건에 1355명이다. 이를 토대로 노동자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과 나이 등을 확인하고 죽음에 이르게 된 과정을 구체적으로 되짚었다. 파편화되고 기억되지 못하는 죽음을 한데 모아 추모한다는 의미도 담았다.
‘매일 김용균이 있었다’ 인터랙티브 뉴스 페이지 화면. 산업재해로 사망한 노동자의 죽음을 더 자세히 살펴볼 수 있도록 중대 재해 보고를 ‘산업재해 아카이브’로 재구성해 인터랙티브 콘텐츠로 구현했다. 사고 유형, 연령대, 사고형태별로 분류해서 볼 수 있고 각 재해자의 상세 재해 정보까지 확인할 수 있다.
▶ 인터랙티브 바로가기
우리가 명함이 없지
일을 안 했냐
2022년 3월 4일
하루도 일을 쉰 적 없지만, 아무도 그들의 노동을 ‘일’로 인정하지 않았다. 언제나 N잡러였지만 ‘집사람’이라 불린 여성들, 이름보다 누구의 아내나 엄마로 불려온 여성들, 고단한 삶 속에서도 일의 기쁨을 느끼며 ‘진짜 가장은 나’라는 자부심으로 살아온 여성들. 취재 과정에서 만난 이 여성들은 아무도 명함이 없다고 했지만, 경향신문은 노인세대 여성들에게 명함을 찾아주려 했다. 바로 ‘우리가 명함이 없지 일을 안 했냐’ 기획 시리즈다.
1회차부터 독자들의 뜨거운 호응이 이어졌다. 지면에 다 담지 못한 콘텐츠를 책으로 만들기 위해 진행한 크라우드펀딩 프로젝트는 1시간 반 만에 목표금액 300만원을 채웠고, 최종적으로 2158명이 4326만원을 보냈다. 마지막 회차에는 후원자들이 자신의 엄마에게, 누나 혹은 누이에게 보내는 ‘180자 편지’를 지면에 게재했다.

세상이 몰라도 나는 알지
당신이 얼마나 큰일을 했는지
“나쁜 일이 파도처럼 밀려왔지만 도망가지 않았다”
손정애씨(72)의 가게는 서울 남대문시장 칼국수 골목에 있다.
정애씨는 인생의 많은 시간을 이곳에서 보냈지만, 국숫집만으로 그의 삶을 다 설명할 순 없다. 정애씨는 1970년대 제사공장(양잠업) 노동자였고, 88 서울 올림픽 땐 한식당 오너셰프(요리도 하는 경영자)였으며, 1990년대 남대문 패션시장 호황기 땐 여성복 디자이너이자 사장님이었다. 돈 버는 노동의 사이사이 돌봄과 가사 노동도 쉰 적 없다. 연년생인 딸과 아들을 키웠고, 시아버지를 간호했으며, 뇌경색과 치매를 앓고 있는 남편을 20년 넘게 돌보고 있다.
매일 새벽 4시에 출근하는 정애씨는 “내가 벌어 사는 삶이 좋다”고 말한다. “나쁜 일이 파도처럼 밀려왔지만 도망가지 않았다”며 늠름한 삶에 대한 자부심도 있다.
정애씨의 생애사는 한국전쟁부터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코로나19까지 이어진 굴곡진 현대사와도 닿아 있다. 지난해 10월부터 다섯 번에 걸쳐 정애씨의 출·퇴근길과 일하는 현장을 함께했다. 명함은 없지만 평생 일한 현역 노동자로서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2022년 12월 10일 새벽 4시. 서울 남대문시장 내 국숫집 ‘훈이네’ 사장 손정애씨가 영업 시작 전 앞치마를 동여매고 있다. 손씨는 기획 1회차 인터뷰의 주인공이다.윤석열 대통령 파면
2025년 4월 5일
12·3 불법계엄으로 한국사회를 공포와 혼란으로 몰아넣은 윤석열 대통령이 파면됐다. 헌법재판관 8명의 전원 일치 판단이었다. 넉 달여간 불면의 밤을 보내야 했던 시민들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됐다. 헌정질서와 민주주의를 더욱 튼튼하게 만들기 위해 힘과 지혜를 모으는 일은 앞으로도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가 됐다.

끝내, 시민이 이겼다
다시, 민주주의로
2025년 4월4일 11시22분 대통령 윤석열 파면
윤석열 파면, 무혈 시민혁명이 이뤄졌다
(당일 사설 발췌)
이로써 윤석열의 내란을 몸으로 막아낸 시민의 무혈혁명은 완수됐다. 헌정질서 붕괴와 민주주의 퇴행의 대위기에 처한 대한민국은 내란 극복과 민주공화국 재건의 발판을 마련했다. 역사의 고비고비마다 나라를 일으켜 세운 평범한 시민들이 또다시, 기어이 승리한 것이다.
윤석열 파면은 헌정질서와 민주주의를 지키려는 남녀노소 평범한 시민들, 헌법적 가치와 민주주의적 규범을 체화한 ‘제복입은 시민들’의 위대한 승리이다. 부마항쟁, 5·18 민주화운동, 1987년 6월 항쟁으로 면면히 이어진 4·19혁명의 헌법 정신이 오늘 되살아나 민주주의를 구하고 추락한 국격을 다시 높인 것이다. 민주주의 퇴행을 겪고 있는 각국 시민들에게 용기와 영감을 주는 세계사적 사건이라고 보아도 무리가 없다.
다른 생각들이 무람없이 어울리는 사회, 차이가 차별이 되지 않는 사회, 논쟁이 전쟁이 되지 않는 사회, 이견이 적대와 배제의 이유가 되지 않는 사회, 사회구성원들의 삶의 질이 보장되는 보다 정의롭고 평등한 사회로 나아갈 때야 비로소 내란은 최종적으로 극복됐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윤석열 파면은 그런 사회를 만드는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계엄 이튿날인 2024년 12월4일 발행된 경향신문 호외.
윤석열 대통령의 불법계엄 선포 뒤, 경향신문 편집국은 신문 발행이 가능할지 발행을 한다해도 배포가 가능할 지 여부를 알 수 없는 일촉즉발의 상황으로 돌변했다. 언론인의 무단 연행과 구금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경향신문은 이같은 비상계엄 선포가 반헌법적이라고 보고 호외 발행을 결정했다. 퇴근을 했던 데스크와 논설위원, 기자들이 속속 회사로 복귀하면서 편집국이 정상화됐다. 용산과 여의도 등 현장에는 취재기자와 사진기자, 영상 PD가 급파됐다. 미처 복귀하지 못한 기자들은 자신들이 있는 곳에서 관련 기사를 전송했다.
윤 대통령의 비상계엄선포, 시민들의 분노, 아수라장이 된 국회, 그리고 곧바로 집결한 여야가 힘합쳐 막은 ‘최악의 사태’까지 긴박했던 157분을 호외 4개면에 걸쳐 담았다. 마지막 기사를 출고했을 때 시간은 4일 새벽 3시를 지나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윤 대통령의 국회 결의 수용발언은 나오지 않았다. 호외가 계엄해제를 담지못한 이유다.
‘전쟁터’같았던 현장의 마감 ‘전쟁’은 끝났지만 편집국의 불은 끌 수가 없었고 취재기자들도 현장을 떠날 수 없었다. 윤 대통령의 국회결의 수용은 1시간 반 가량이 더 지난뒤 이뤄졌다. 15년만에 발행된 호외는 새벽 여명과 함께 이렇게 독자들에게 전달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