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 탁구 국가대표 유남규가 개인 단식에서 탁구 강국 중국을 꺾고 금메달을 딴 뒤 포효하고 있습니다. 유남규는 당시 18세로 아시안게임 10대 돌풍의 주인공 중 한 명이기도 했습니다. 당시 탁구는 남자 단체와 여자 단체에서 금메달을 따는 등 돌풍을 일으켰고, 한동안 국내에서는 탁구 열풍이 불었습니다. 그때 꼬마들 중 라켓 안 잡아 본 이들이 없었을 정도였습니다.
영광의 순간들
육상 장재근
육상 남자 200m에서 장재근(가운데)이 역주하고 있습니다. 장재근은 200m에서 금메달, 남자 400m 계주 동메달을 따내며 한국 육상의 자존심을 지켰습니다. 장재근이 아시안게임에 앞서 85년 세운 200m 20초41의 한국기록은 아직도 깨지지 않고 있습니다.
영광의 순간들
수영 최윤희
86 아시안게임 또 하나의 스타는 ‘인어’라 불렸던 여자 배영의 최윤희였습니다. 앞서 82년 뉴델리 아시안게임에서 수영 3관왕에 올라 온 나라를 깜짝 놀라게 했던 최윤희는 86 대회에서도 여자 배영 100·200m에서 2관왕에 올랐습니다.
영광의 순간들
축구 조광래
86 아시안게임 남자 축구 결승전에서 조광래 전 국가대표 감독(가운데)이 골을 넣은 뒤 포효하고 있습니다. 축구 대표팀은 86 아시안게임 결승에서 사우디아라비아를 2-0으로 이기고 금메달을 땄습니다. 그리고, 축구 아시안게임 금메달은 그게 마지막이었습니다.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은, 해방 뒤 처음 개최한 국제종합대회였습니다. 2년 뒤 열리는 1988 서울 올림픽의 사전 연습 성격도 지녔습니다. 5공화국 시절이었고, 온 나라가 '성공적인 대회 개최'를 위해 매달렸습니다.
경기를 치르기 위해 동원된 운영요원이 무려 6만5117명이었습니다.(경향신문 1986년 9월4일자) 개·폐회식을 여는데만 2만399명이 필요했습니다. 아시안게임에 출전하는 각국 선수단 전체의 11배에 해당하는 운영요원이 투입됐습니다.
이중 83.7%인 5만4611명이 자원봉사요원 형태로 발벗고 나섰습니다. 자원봉사 모집 공고에는 '당신 없이는 대회를 치를 수 없습니다'라고 했고, 자원봉사자들의 슬로건으로는 '나에게는 보람, 조국에는 영광'이라는 문구가 자연스럽게 쓰였습니다. 1985년 10월부터 시작한 자원봉사자 공모에는 11만여명이 몰렸습니다. "서울 아시아경기대회와 올림픽에 조금이나마 힘이 될 수 있다면 큰 보람이며 일생동안 간직할 영광"이라며 일가족이 모두 응모한 사례도 많았습니다.(경향신문 9월4일자)
경제효과에 대한 기대도 넘쳐났습니다. 1인당 국민소득 2000달러를 막 넘기면서 온 나라가 자신감과 희망으로 치장된 시절이었습니다. 당시 한국개발연구원은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에 2조4000억원을 투입하면 4조3000억원의 생산유발효과와 1조7000억원의 소득유발효과, 74만명의 고용유발효과, 4억달러의 외화수입을 거둘 수 있다고 전망했습니다.
개막식은 큰 기대를 모았습니다. 개막식이 치러진 뒤 경향신문은 1986년 9월22일자 사설에 "아시안게임 개막 행사는 우리들에게 민족 전통문화와 민족 저력에 대해 무한한 긍지와 자신감을 갖게 한 한마당 축제였다. 그것은 우리가 쓰라린 과거의 역사로 연유되는 패배주의에 젖어 있기 때문에 그런 게 아니라 우리 역사상 세계가 지켜보는 아시안게임 같은 큰일을 일찍이 치러본 바가 없기 때문이다. 놀이춤, 매스게임 등에는 1만8000여명이 출연했다. 그러나 이 행사 참가자는 온 국민이라 함이 옳다. 출연자들은 1년 이상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5분을 위해 1년을 소비했으나 이제 보람을 느낀다고 한 출연자의 감회는 4000만 국민 일체감의 보람으로 보아 무방할 것이다"라고 기록했습니다.
개막식에는 수많은 학생들이 참가했습니다. 이에 대해 아시안게임 조직위원회는 개·폐회식 참가 학생들에게 체력장 특혜를 주기로 결정했습니다. (경향신문 1986년 9월2일자)
'성공적인 개최'를 위한 집착 때문에 대회 규모에 많은 신경을 썼습니다. 앞서 열린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은 서구진영이,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은 동구진영이 보이콧을 한 상황이었습니다. 참가국 숫자를 늘리기 위해 '외교전쟁'에 가까운 노력이 동원됐습니다. 결국 북한과 라오스, 남예멘 등을 제외한 27개국, 4389명의 선수단이 참가했습니다.
금메달 따면 포상금·취업 '당근'
자국에서 치르는 첫 국제종합경기대회에 참가한 선수들에 대한 격려와 압박도 상당했습니다. 양궁협회는 금메달 1000만원, 은메달 500만원, 동메달 200만원의 포상금을 내걸었고, 육상연맹은 금메달에 무려 5000만원의 포상금을 걸었습니다. 체조협회는 금메달을 딴 선수에게 1000만원과 원하는 직장 취업을 보장하는 당근을 내세웠습니다.(경향신문 1986년 9월4일자)
월수입 50만원 이하 선수들이 대표팀 전체의 39%를 차지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상당한 금액임에 틀림없습니다.
금메달 더 따면 심각한 외교 문제 생긴다
대회 내내 중국(당시 중공)과의 메달 경쟁이 치열했습니다. 아시안게임 대표팀은 일본을 넘어서 2위 자리에 오르는 것이 목표였지만 이를 훌쩍 넘어 금메달을 93개나 따내게 됩니다. 홈 어드밴티지를 넘어선 무언가가 있었다는 후문도 퍼져 나왔습니다. 어떤 종목의 고위 관계자는 “대회 마지막 정부 관계자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더 이상 금메달을 따면 심각한 외교 문제가 발생할지도 모른다는 권고였다”고 말했습니다.
영광의 순간들
탁구 유남규
육상 장재근
수영 최윤희
축구 조광래
라면만 먹고 뛰었어요
1986 아시안게임 최고의 스타는 임춘애였습니다. 육상 여자 800m와 1500m, 3000m에서 금메달을 따 3관왕에 올랐습니다. 한국 육상에서 전무후무한 일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어려운 가정환경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성공했다는 점이 당시 시대 분위기와 맞아떨어지며 신드롬을 일으켰습니다. 임춘애는 포상금으로 1억5000만원을 받았는데, 연평균 물가상승률을 4.83%로 적용하면 28년이 흐른 현재 가치는 5억6000만원 정도에 해당하는 적지 않은 돈입니다.
경향신문은 당시 임춘애의 기사 첫 머리에 ‘잠실벌에 학이 한 마리 내려앉았다’고 적었습니다.
실제 임춘애는 당시 가난과 어려움을 극복한 라면소녀로 묘사됐고, 더 가난하고 더 고통받은 우리 시대 최후의 헝그리 스포츠인으로 묘사됐습니다.
"라면만 먹고 뛰었어요" "우유 먹고 뛰는 친구들이 부러웠어요"라는 소감 때문에 '라면소녀'로 불렸지만 이는 사실과 달랐습니다.
임춘애는 1994년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라면 먹고 어떻게 운동을 해요. 국민학교 때 운동이 힘들어 그만두려고 하니까 코치선생님께서 사탕 주듯 라면을 준 것이 17년간 라면만 먹은 것으로 잘못 전해졌어요"라고 밝혔습니다. 가난도 실제보다 과장됐습니다. 임춘애는 "중학교 때부터 분에 넘치게 많은 장학금을 받아서 돈 걱정은 해 보지 않았어요"라고 덧붙였습니다.
그때 그 순간
남북 공동응원
해방 이후 남북 간 체육교류는 사라졌습니다.
1946년 경평친선축구대회가 마지막이었습니다.
44년이 흐른 뒤 1990년이 돼서야 문이 조금씩 열리기 시작합니다.
1990년 10월11일과 23일 남북 국가대표 간 통일축구대회가 시작이었습니다. 1991년 4월에는 첫 단일팀이 구성됩니다. 일본 지바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 '코리아팀'이라는 이름으로 남북 단일팀이 대회에 참가했습니다. 6월에는 포르투갈 세계청소년축구대회에 단일팀으로 출전합니다.
그리고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에서 의미있는 일이 벌어집니다. 국내에서 열리는 국제종합대회에 처음으로 북한 선수단이 참가하게 됩니다. 선수, 임원을 포함해 305명이 부산에 왔습니다.
부산 아시안게임 남북합의서 보기
부산 아시안게임 남북 합의서
1. 북측은 제14회 부산 아시아경기대회에 선수, 올림픽위원회 대표, 심판원을 포함하여 305명 규모의 선수단을 파견한다.
2. 북측은 8월30일까지 부산 아시아경기대회조직위원회에 종목별 최종 선수단 명단과 등록서류를 제출한다.
3. 북측 선수단은 9월23일과 9월27일 2차례에 걸쳐 북측 항공기를 이용하여 직항노선으로 남측에 온다. 경기종료 후 귀환 시에도 동일한 방법을 적용한다.
4. 남측 선수단과 북측 선수단은 개·폐회식 행사에 한반도기를 앞세우고 공동으로 입장한다. 선수단 표지판은 `코리아', 영어로는 `KOREA'로 하며 선수단의 복장은 2000년 시드니올림픽 때의 전례를 따른다.
5. 남북 선수단은 경기에 각각 출전하며 시상식 때에는 각기 자기의 국기를 게양하고 국가를 연주한다. 또한 대회기간 중 열리는 각종 회의에 남과 북은 대표 또는 대표단을 각각 참가시킨다.
6. 북측은 부산 아시아경기대회에 취주악대와 예술인을 중심으로 구성된 355명 규모의 응원단을 파견한다. 북측 응원단은 <만경봉-92호>를 타고 원산을 출발하여 2002년 9월28일 부산항으로 오며, 배에서 숙식하면서 대회행사와 경기응원에 참가한다.
7. 북측은 9월5일 백두산에서 부산 아시아경기대회 성화를 채화하고, 9월6일 금강산에서 부산 아시아경기대회조직위원회 관계자에게 성화를 인계한다. 이와 관련하여 북측은 10여명의 남측 인원이 백두산 현장에서 채화과정을 녹화 및 참관할 수 있도록 최대한의 편의를 보장한다.
8. 남측은 부산 아시아경기대회에 참가하는 북측 선수단과 응원단에 대해 체류기간동안 신변안전을 보장한다.
9. 북측 선수단에 대해서는 남측 체류기간동안 소요되는 제반경비를 남측이 부담하며, 응원단의 남측 체류경비는 방문자 측의 부담으로 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되 남측이 최대한 편의를 제공하는 것으로 한다.
10. 남측은 부산 아시아경기대회 기간 북측의 국기 게양문제에 대해 아시아올림픽평의회 헌장과 국제관례에 따르기로 한다.
11. 북측 선수단·응원단은 남측의 안내와 질서에 따르며, 응원은 스포츠정신에 입각한다.
12. 남측은 북측 선수단에 국제전화 2회선, 남북직통전화 10회선을 보장한다.
13. 기타 북측 인원의 남측 체류기간 중 제기될 수 있는 제반 문제에 대해서는 쌍방이 신뢰를 바탕으로 하여 우호적으로 협의, 해결해나가기로 한다.
14. 추후 구체적인 실무절차 문제 등은 판문점을 통한 문서교환 방식으로 세부협의를 진행한다.
닫기
성화, 백두에서 한라까지
부산 아시안게임을 위한 성화도 백두산과 한라산에서 동시에 채화됐습니다. 9월5일 오전 11시, 한라산 백록담과 백두산 장군봉에서 채화된 성화는 임진각에서 합화된 뒤 전국을 돌아 개막식 때 성화대에 점화됐습니다.
한라산 채화는 국토 최남단에 있는 가파초등학교 마라 분교 김혜지양(9)이 맡고 성화는 항공편으로 파주~임진각에 도착하게 된다. 북한의 마라톤 스타 정성옥이 첫 봉송주자로 나서는 백두산 성화는 어랑공항~원산공항을 거쳐 6일 금강산 온정각에서 유도 스타 계순희의 손으로 남측 인수단에 인계될 예정이고 이후 속초항~파주~임진각으로 옮겨진다. 남북 동시 채화된 성화는 7일 오전 10시 임진각 망배단에서 역사적인 합화 행사를 갖게 된다. 합화된 성화는 7000여명의 봉송 주자에 의해 23일간 전국 4239Km를 순회하며 부산에 최종 도착하게 된다. 첫 봉송주자는 유재만 이북5도 함남도지사.
9월23일에는 사상 처음으로 북한 선수단이 대회 참가를 위해 남한을 방문합니다. 9월24일자 경향신문은 아래와 같이 보도했습니다.
그들이 왔다. 무려 159명. 온다고 했지만 정말 올 것인가 믿어지지 않았던 북한 선수단. 그들이 정말로 한국땅을 밟았다.
부산 아시안게임에 참가하는 북한 선수단 1진이 23일 동해 직항로를 이용, 고려항공 소속 ak 923편 전세기를 타고 김해공항에 도착했다. 18개 종목 311명 가운데 이날 도착한 것은 남자 축구와 농구, 유도, 조정, 사격, 체조, 탁구 등 7개 종목의 159명. 이날 오전 10시 평양 순안공항을 출발한 이들은 11시36분 김해공항에 안착한 뒤 낮 12시5분쯤 트랩을 내려왔다.
북한 임원들은 당초 공항에서 기자회견을 가질 예정이었으나 "서면으로 성명을 전달하겠다"는 짧은 말만을 남긴 채 바로 차에 올랐다. 이들은 서면을 통해 발표한 도착성명에서 "남녘의 체육인들과 부산시민들, 남녘 동포들에게 우리 체육인들과 북녘 인민들의 뜨거운 동포애적 인사를 전한다"며 "여러분과 손잡고 민족의 기개와 힘을 과시하며 우리 겨레의 통일 의지를 내외에 보여주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북에서 온 그녀들, 한국을 홀리다
아래 이미지 위에 마우스를 올려놓아 보세요
북한 여성응원단이 숙소인 부산 다대포항의 만경봉호에서 내리는 모습입니다.
북한 여성응원단 중에는 ‘취주대’라 불리는 악단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대회 후반 부산 시민들을 위해 공연을 하기도 했습니다.
북한 여성응원단은 가는 곳마다 많은 시민들의 환대를 받았습니다. 응원단이 북한과 홍콩의 경기가 끝난 뒤 경기장을 빠져나가며 부산 시민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고 있습니다.
2002 아시안게임 이후 2005년 인천동아시아육상선수권대회에도 북한 응원단이 남한을 찾았습니다. 당시 응원단에 포함됐던 현 김정은 국방위원장의 부인 리설주씨가 계단을 내려오고 있습니다.
2002년 아시안게임 최고의 화제는 북한의 여성 응원단이었습니다. 여성 응원단은 '남남북녀'라는 말을 유행어로 만든 것은 물론, 끝없이 화젯거리를 생산했습니다. '북녀 신드롬'을 불러온 여성 응원단은 함께 응원가를 불렀고, 북한 선수의 패배에 눈물을 흘렸습니다. 250여명의 응원단은 부산 다대포항 앞에 정박한 만경봉-92호에서 생활하며 경기장에서 응원을 펼쳤습니다. 다대포항 인근 매립지나 아파트단지 옥상, 도로, 언덕 등은 행사장 안에 들어가지 못한 부산 시민들로 발디딜 틈도 없이 북적거렸습니다. 시민들이 연일 북한 배와 북한 여성 응원단을 비디오나 카메라로 담거나 이들의 모습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촬영하는 데 여념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응원단은 부산 시민의 환대에 답하기 위해 폐막 이틀 전, 다대포항에서 부산 시민들을 위한 공연을 펼치기도 했습니다. 이 자리에는 부산 시민 3만여명이 몰려들었습니다.
그녀들은 '통일의 꽃다발'이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최봉희양(16)은 "부산에서 북남이 공동입장해서 좋고 부산 시민들이 가는 곳마다 환영해 줘 고맙다"고 했고, 서은향양(17) 역시 "가장 기억에 남는 게 공동입장과 시민들의 따뜻한 환대"라고 말했습니다.
심지어, 북한 응원단의 리더 리유경씨의 팬 카페는 개설되자마자 회원 수가 1만명을 훌쩍 넘었을 정도였습니다.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에서 화제를 모았던 북한 여성 응원단은 3년 뒤인 2005년 9월 인천에서 열린 동아시아육상선수권대회에서도 이어졌습니다. 당시 ‘청년학생협력단’ 형태로 찾아온 응원단 참가 여성 중에는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의 부인으로 알려진 리설주씨도 포함돼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후 이어진 남북 경색에 따른 교류 단절로 그동안 쌓아왔던 화해 분위기는 사라진 상태입니다. 남북의 거리는 그만큼 더 멀어졌습니다.
마법의 스포츠
2002 아시안게임에서 남북한 선수들, 응원단이 함께 겪고 나눈 것들은 오랫동안 갈라져 있던 남북의 거리를 가깝게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북한 선수단, 응원단과 부산 시민들의 인사는 "만나서 반갑습니다", "통일을 꼭 이룹시다"였습니다. 남북이 서로를 응원하는 장면이 거듭되면서 물리적 거리보다 훨씬 멀었던 심리적 거리는 부쩍 줄어들었습니다.
시민 이상희씨(당시 62세)는 "북한은 빨갱이라고 생각했었지만 이제는 적이 아니라 한민족이라는 점을 확인했다"며 "민간교류를 더 넓혀 아직까지 남아 있는 남북 갈등을 해소해 나가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마라톤에서는 북한의 함봉실(여)과 남한의 이봉주(금)가 나란히 금메달을 따며 아시안게임의 마지막을 장식했습니다.
월드컵이 전쟁을 멈추고, 아시안게임이 남북한의 거리를 좁히는 등 스포츠는, 정치가 할 수 없는 것들을 해내는 힘을 지녔습니다. 2002 부산 아시안게임은 스포츠가 할 수 있는 마법을 보여줬습니다.
2014인천 : 지방자치시대의 스포츠
아시아에서 열리는 힐링캠프
1986 서울 아시안게임이 한국의 발전을 세계에 알리려는 '국민 총동원의 대회'였다면 2002 부산 아시안게임은 1950년 전쟁 이후 막혔던 남북 관계의 숨통을 여는 '만남과 화합의 대회'였습니다. 그리고 다시 12년 뒤 우리나라에서 열리는 3번째 아시안게임, 2014 인천 아시안게임이 열립니다.
인천 아시안게임의 슬로건은 '평화의 숨결, 아시아의 미래', 'Diversity shines here'입니다. 28년 전 아시안게임이 국내 모든 자원을 동원한 한국 중심적 대회였다면, 12년 전 아시안게임은 그 자리를 한반도로 넓힌 대회입니다. 그리고, 이제 눈을 더 넓게 돌릴 여유를 찾았고, '다양성의 가치'를 그 자리에 집어넣었습니다.
인천은 이를 위해 무려 2000만달러를 들여 아시아 청소년 스포츠 유망주들을 후원하고 스포츠 저개발국에 코치를 파견하는 사업을 벌입니다. 이른바 vision 2014입니다.
하지만, 이번 아시안게임은 외부 상황을 통해 새로운 의미와 숙제가 부여됐습니다. 지난 28년간 정신없이 앞만 보고 달려온 후유증들이 우리 사회 여기저기서 터져나오고 있는 중입니다. 세월호가 그랬고, 강물을 덮은 이끼벌레가 또 이를 증명합니다. 군대, 검찰, 국정원 등 과거 대한민국을 구성해 왔던 각종 시스템들이 변화를 견디지 못하고 삐거덕거리며 신음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그 상처를 달래고 보듬고, 기운을 북돋아 줄 숙제와 목표가 생겼습니다. 아시안게임을 한 달 남겨 둔 지난 8월20일, 대표팀 선수들은 너나할 것 없이, 스스로 '힐링'을 얘기했습니다.
감동으로 아픔 치유해 드릴게요
우리에겐 831명의 선수들이 있다
이순신에게는 12척의 배만 남았지만, 대한민국 아시안게임 대표팀에는 831명의 씩씩한 선수들이 있습니다.
28년 전 아시안게임이 정신력을 강조한 '전쟁'에 가까운 투혼의 결과였다면, 28년이 흐른 2014년의 스포츠는 과학과 투자, 노력이 어우러진 즐거운 놀이의 경쟁에 가깝습니다. 831명의 젊은 선수들이 인천 아시안게임에서 우리에게 안겨 줄 힐링의 스포츠, 기대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