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달력도 한 장 남았다. 예년 같으면 슬슬 새 달력이 들어와서 뭘 써야하나 골라야하는 타이밍인데, 어쩐지 아직까지 빈손이다. 연말이면 기업체마다 선심용으로 무료배포하면 달력이 서서히 자취를 감춘 지 오래다. 달력이 남아돌아 새 교과서 겉표지를 싸는데 썼다고 하면 ‘옛날 사람’ 인증이 된다.
주요 스케줄은 스마트폰에 기록하지만, 달력의 역할은 여전하다. 뜻깊은 날에 미리 동그라미 쳐두는 것도 종이달력만의 묘미다. 요즘은 달력 하나에도 의미와 재미를 담는다. 물론 인테리어에 오점이 되어서도 안 될 일이다.
작가들의 다양한 시도와 각별한 사연, 남다른 의미를 담은 달력의 각축전은 크라우드펀딩 플랫폼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텀블벅에서는 벌써부터 2022년 달력 전쟁이 뜨겁다. 지난 2016년부터 ‘달력, 다이어리 기획전’을 진행하고 있는 텀블벅을 통해 ‘맞춤 디자인 달력’ 트렌드를 살펴봤다.
텀블벅 측은 “2015년 전후 ‘언리미티드 에디션’과 같은 독립 출판 및 아트북페어의 규모가 커짐과 동시에 달력, 다이어리 제작이 활발해졌다”고 전했다. 이 같은 흐름을 반영해 텀블벅은 소규모 디자인 스튜디오, 1인 그래픽 디자이너, 독자적인 팬덤을 가진 일러스트레이터와 현대미술 작가를 타깃으로 재미있는 형태의 달력을 제작하는 제안을 했고 2016년 ‘달력전쟁’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기획전을 열었다. 첫 번째임에도 총 36개의 프로젝트가 참여해 총 1억3천만원을 모금했다. 여세를 몰아 ‘신년준비위원회’로 확장된 2017년에는 24개 프로젝트로 약 1억원을 모았고, 이듬해 폭발적으로 참여가 들어 매해 평균 150개 이상의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다. 2018년에는 총 138개 프로젝트로 약 6억원 모금, 2019년에는 148개 프로젝트로 약 6억7천만원을 모금했다. 작년 한 해는 내부 방침 상 쉬었고, 올해 다시 열린 기획전에 170여건의 프로젝트가 참여했다. 아직 펀딩이 진행 중인 가운데 모금액은 8억원을 넘어섰다.
텀블벅 측은 “달력과 다이어리는 출판물에 비해 작업량이 많지 않고, 고정된 수요도 있기 때문에 이후에 창작의 첫걸음으로 선택할 수 있는 좋은 선택지라는 인식이 보편화되며 많은 1인 작가와 소규모 팀이 달력과 다이어리를 제작하는 흐름이 크게 형성됐다”고 전했다.
현재까지 가장 성황리에 마감된 달력 프로젝트는 유튜버 크림히어로즈에서 진행한 2020년 다이어리·캘린더 프로젝트로 총 2억원이 모였다. 크림히어로즈는 펫튜브 중에서도 가장 많은 구독자(378만명)를 보유하고 있으며 10마리에 달하는 다양한 종의 고양이가 등장해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다. 당시 크림히어로즈 측은 “매일의 기록을 구독자 여러분과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을 담아 열심히 만들었다”며 다이어리와 탁상 달력을 제작했고 7509명이 후원해 1003%를 달성했다. 크림히어로즈의 팬이라면 앞면은 고양이 일러스트, 뒷면은 사진으로 구성된 탁상 달력의 유혹을 떨치기 어려웠을 법하다.
팬서비스용이나 굿즈용 달력이 달력 프로젝트의 큰 축을 이룬다면, 의미를 담은 달력도 꾸준한 인기 테마다. 충남야생동물구조센터에서 기획안 2022 야생동물달력은 1880%가 넘는 모금액을 달성했다. 센터 측은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아 외면했던 야생동물들에게 매일 조금씩의 관심만 가져도 함께 살아가기에 더욱 좋은 세상이 되지 않을까 하는 바람”으로 이 프로젝트를 준비했다고 밝혔다. 벽걸이용 달력에는 충남야생동물센터에 접수되는 빈도수가 높은 야생동물 14종이 그려져 있다. 가장 많은 후원자가 선택한 옵션은 달력+엽서+스티커가 포함된 패키지로 가격은 2만8000원이다.
추억의 ‘일력’도 맞춤 달력 시장의 인기 콘셉트다. 팬들의 요청사항을 재치 있는 그림으로 풀어내는 인기 일러스트레이터 키크니 작가의 일력 프로젝트는 948%를 달성해 배송을 앞두고 있다. 지난 4년 간 ‘무엇이든 그려드립니닷’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꾸준히 일러스트를 선보인 키크니 작가는 “책으로 선보이기에는 분량이 많고, 더 매력적으로 콘텐츠를 담을 수 있는 방식을 찾다 일력이라는 형태를 선택했다”고 한다. 기업과 협업 형태로 굿즈를 제작한 적은 있으나, 기획부터 제작까지 단독으로 진행한 프로젝트는 이번이 처음임에도 불구하고 키크니 작가의 일력 ‘우리는! 고급일력’은 1억4천만원을 모금하며 큰 호응을 얻었다.
달력을 테마로 한 아이디어 상품도 눈에 띈다. 달력자(Calendar Ruler) 프로젝트는 달력을 그리기 위한 최적의 도구인 ‘모양자’를 개발했다. 노트에 자를 대고 그리면 다이어리가, 낱장의 종이에 그려 벽에 붙이면 달력이 된다. 그래픽디자인 스튜디오 김가든에서 진행한 프로젝트는 752%를 달성하며 마감됐다.
캘린더의 메인 바디를 돌리는 방식으로 날짜를 변경하는 아날로그 방식의 ‘퍼페츄얼 플립 캘린더’를 표방한 노몬(gnomon)프로젝트도 762%를 달성했다.
달력에 별도의 라인을 추가해 스케줄 진행 상황을 체크할 수 있도록 한 ‘오 마이 데드라인’ 마감 달력은 ‘마감노동자’나 평소 정리 능력이 부족한 사용자에게 최적화된 콘셉트로 1492%를 기록한 프로젝트로 남았다.
텀블벅 측은 “이처럼 독특하거나 규모가 큰 작업을 해보는 창작자가 늘어난 것은 크라우드펀딩이 제작에 필요한 예산을 미리, 해당 제품을 원하는 후원자에게 수급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개인 홈페이지에 연재한 생활툰이 인기를 끌며, 2008년에 처음으로 제작했던 ‘루나파크 다이어리’는 2013년까지 매년 제작되었으나 제작 단가 등의 문제로 2014년부터 제작이 불발됐다. 하지만 텀블벅을 통해 2018년 ‘루나파크 다이어리’ 제작에 나섰고 추억의 루나파크 다이어리가 다시 만들어진다는 팬들의 호응 속에 총 8천여만원을 모금하는데 성공했다. 루나파크 다이어리는 2019, 2020 다이어리 펀딩도 인기리에 마감했다.
새해를 앞두고 내년 계획에 따른 나만의 달력을 골라보면 어떨까. 하루하루 목표를 이룬 후 붙일 수 있는 스티커팩이 포함된 ‘연말정산’ 달력, 매일의 기분을 나타내는 색 스티커를 붙여 마음을 기록하는 ‘1년 마음 포스터’, 발달장애 예술가들이 그린 사계절 그림을 담은 달력, 그리고 호랑이띠 운세달력을 비롯해 호랑이의 해를 테마로 한 다양한 프로젝트가 2022 신년준비위원회 펀딩 리스트를 채우고 있다. 그리고 역시 올해도 달력 테마로 사랑받는 주인공은 ‘고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