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나를 담은 나만의 향…요즘 대세는 '니치 향수'

김지윤 기자
서울 가로수길에 오픈한 프랑스 니치 향수 브랜드인 딥티크의 플래그십스토어. 신세계인터내셔날 제공

서울 가로수길에 오픈한 프랑스 니치 향수 브랜드인 딥티크의 플래그십스토어. 신세계인터내셔날 제공

직장인 공현진씨는 최근 5개월의 기다림 끝에 새 향수를 들였다. 공씨가 구입한 제품은 75㎖ 용량에 20만원이 넘는 고가의 제품이지만 향수 관련 온라인 커뮤니티에 ‘재고 풀리는 날’이 공유될 만큼 인기 상품이다. 그는 “누군가 나를 기억할 때 좋은 향이 가장 먼저 떠오르길 바란다”며 “그만큼 가치 있는 소비 행위”라고 말했다.

공씨처럼 나만의 향을 찾아 나선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글로벌 시장조사기관 유로모니터에 따르면 2015년 약 5000억원이었던 국내 향수 시장 규모는 2019년 6000억원까지 급성장했으며 2023년엔 6500억원을 돌파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 중 매출의 90%를 차지하는 것은 ‘니치 향수’다. 니치 향수란 전문 조향사가 소수의 취향을 만족시키기 위해 만든 프리미엄 향수를 뜻한다. ‘틈새’를 뜻하는 이탈리아어 니치(niche)에서 파생됐으며 딥티크, 조말론, 바이레도, 크리드, 논픽션, 산타마리아노벨라, 트루동 등의 브랜드가 대표적이다.

니치 향수는 통상 자연 그대로의 향을 내기 위해 천연 향료나 희귀 성분 등 고급 원료를 기반으로 한다. 사람의 체취와 어우러져 다인다색의 향기를 낸다는 것이 특징이다. 추출 방식이 까다롭고 소량 생산되다 보니 일반 향수에 비해 평균 2~3배 높은 금액이지만 최근에는 이를 구입하거나 착향하기 위해 번호표를 뽑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국내에서 높은 판매율을 보이는 프랑스·이탈리아 브랜드의 니치 향수 가격은 주로 20만~40만원대에 분포돼 있다.

서울 가로수길에 오픈한 프랑스 니치 향수 브랜드인 딥티크의 플래그십스토어. 신세계인터내셔날 제공

서울 가로수길에 오픈한 프랑스 니치 향수 브랜드인 딥티크의 플래그십스토어. 신세계인터내셔날 제공

■취향·유행·코로나19로 더해진 인기

니치 향수는 샤넬, 디오르 등 화장품 브랜드에서 내놓은 ‘패션 디자이너 향수(패션 향수)’와 흔히 비교된다. 패션 향수가 기성품이라면 니치 향수는 맞춤옷에 가깝다. 취향을 중시하고 스몰 럭셔리를 지향하는 MZ세대들이 니치 향수 시장의 ‘큰손’으로 자리잡은 까닭이다. 대학생 박태연씨는 “여성스러운 향보다 중성적인 향을 좋아하는데, 니치 향수는 이런 향을 선택할 수 있는 폭이 넓어 선호한다”고 말했다. 특히 MZ세대 사이 자신을 위해 과감한 비용을 지출하는 ‘플렉스’ 문화가 보편화되면서 향수는 ‘명품’을 대신할 수 있는 ‘나심비(나의 심리적 만족을 위한 비용)’ 소비로 꼽히고 있다. 최일무씨 역시 “여느 명품 제품을 사기엔 부담스러울 때 가성비가 괜찮은 소비”라며 “보틀(용기)이 세련돼 ‘인증샷’을 올리기에도 좋다”고 설명했다.

니치 향수 시장 확장에는 연예인과 인플루언서들의 홍보도 일조했다. 가수 아이유는 소속사 유튜브를 통해 딥티크 오데썽을, 레드벨벳의 조이는 SW19의 6am, 3pm 향수를 소개해 이목을 끌었다. 평소 좋아하는 아이돌 스타를 통해 니치 향수에 입문한 고해랑씨는 “스타와 브랜드의 이미지·철학 등이 잘 매치될 때 아무래도 더 호감을 갖게 된다”고 털어놨다. 이에 대해 허경옥 성신여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향수가 일상화된 외국과 달리 우리나라에서는 일부 사람들이 사용하는 사치품이라는 인식이 강했다”면서 “그러나 최근에는 기존의 마니아층은 물론 유명인들을 따라 하고자 하는 요즘 세대의 욕구, 이를 자극하는 마케팅이 더해져 향수 인기가 높아진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코로나19 또한 니치 향수 인기에 불을 지폈다. 오랜 시간 마스크를 착용하다 보니 립스틱과 같은 색조 화장품보다 후각을 만족시키는 향수에 지갑을 여는 이들이 늘어난 것이다. 현대백화점의 올해 1~3월 향수 매출은 지난해 같은 기간과 비교해 51.1% 올랐고, 롯데백화점 역시 전년 동기간 대비 40%가 뛰었다. 특히 니치 향수의 판매율이 높다. 신세계 면세점에 따르면 무착륙 관광 비행 시 가장 많이 판매된 면세품도 니치 향수였다. 뷰티매장 매니저 전하경씨는 “나를 부각시키고 개성을 드러내며 동시에 기분 전환을 시켜줄 아이템으로 많이 찾는다”고 전했다.

때로 니치 향수는 팬데믹으로 누적된 피로감과 답답함을 해소하기 위한 수단이 되기도 한다. 블로그 ‘유일한 사대생’에 다양한 향수 리뷰를 기록해온 유나경씨는 “과거에는 상대가 주는 ‘호드백(호감과 피드백의 합성어)’을 즐겼다면, 코로나19 이후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지다 보니 온전히 나를 편안하게 하기 위한 힐링의 수단으로 향수를 찾게 됐다”고 말했다.

니치 향수 브랜드인 논픽션 스토어. @injeolmi90 제공

니치 향수 브랜드인 논픽션 스토어. @injeolmi90 제공

■마니아들 “나에게 잘 맞는 것이 가장 좋은 향”

배우 정유미씨는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해외여행 갈 때마다 향수를 산다. 그리고 여행 내내 그 향수만 뿌린다”며 “나중에 그 향수 냄새를 맡으면 저절로 여행지에서의 추억이 떠오른다”고 밝혔다. 이는 고급 향수 브랜드인 메종 프란시스 커정의 창립자이자 조향사인 프란시스 커정의 생각과도 일치한다. 그는 “향수란 기억을 말하게 하는 예술”이라 은유했다.

시간을 파고드는 추억과 달리 향수는 찰나를 품는다. 패션의 일부인 만큼 유행에 민감한 이유다. 니치 향수 또한 시기별로 주류 향이 존재해 왔다. 과거 ‘내추럴’과 ‘젠더리스’한 향이 인기였다면 최근에는 다양성과 고급화, 리뉴얼과 레트로가 키워드다. 이에 따라 다수의 브랜드도 기존의 형식을 따르지 않고 다양하게 향을 표현한 제품을 출시하고, 나아가 독보적인 향을 연구하는 분위기다. 니치 향수를 베이스로 한 디퓨저, 차량용 방향제, 보디로션, 헤어미스트 등도 판매 중이다.

그러나 모두가 이런 인기를 반기는 것은 아니다. 7년차 니치 향수 애호가 김민호씨는 “일부 브랜드들이 대중화되면서 아쉬운 점이 많다. 나만을 위한 향을 원했는데 모두가 아는 향이 됐다”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또한 김씨는 “점점 더 정보를 공유하는 것이 꺼려진다”며 “해외직구를 하거나 발품을 팔아 남들이 모르는 향을 찾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나만의 향’의 정의를 새롭게 세우며 니치 향수와 패션 향수의 경계를 무의미하게 바라보는 이들도 늘었다. 박은설씨는 “12년째 ‘향덕’으로 살아왔는데 나에게 잘 맞는 것이 가장 좋은 향이더라. 최근에는 니치와 패션을 구분하지 않고 사용 중”이라고 말했다.

올 상반기 내 오픈 예정인 리퀴드 퍼퓸 바. 한섬 제공.

올 상반기 내 오픈 예정인 리퀴드 퍼퓸 바. 한섬 제공.

■플래그십스토어 오픈·독점 유통 등 대기업도 가세

패션 업계 관계자들은 당분간 니치 향수의 강세가 이어질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국내 향수 시장의 가파른 성장세를 주목한 기업들의 행보가 이를 뒷받침한다. CJ온스타일은 지난 3월 홈쇼핑 채널을 통해 프랑스 니치 향수 브랜드 우비강의 한정판 포트넘메이슨 스페셜 에디션을 단독 판매했다. 우비강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향수 브랜드이자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 빅토리아 여왕, 조세핀 황비 등 19세기 유럽 왕실이 사랑한 향수로 알려져 있다. CJ온스타일 측은 “후각적 체험이 중요한 향수를 (홈쇼핑에) 편성했다는 것은 무척 이례적인 일”이라며 “심야 시간, 소량 판매임에도 3억5000만원의 수익을 냈다는 점에서 니치 향수의 인기를 가늠할 수 있다”고 전했다.

신세계인터내셔날은 지난 3월 서울 가로수길에 프랑스 니치 향수 브랜드인 딥티크의 플래그십스토어를 열었다. 유럽의 가정집을 연상케 하는 인테리어로 꾸며진 매장은 260㎡ 규모로 파리 본점을 포함해 전 세계 주요 도시에서 운영 중인 단독 매장 중 가장 크다. 한국 시장의 가능성을 내다봤다는 증거다. 이곳에는 브랜드의 전 제품은 물론 홈데코용품, 신상품 워크숍을 진행할 수 있는 공간 등이 마련됐다.

현대백화점그룹 계열사 한섬은 프랑스 유명 향수 유통업체 디퍼런트 래티튜드와 향수 편집숍인 리퀴드 퍼퓸 바의 한국 독점 유통 계약을 체결했다. 리퀴드 퍼퓸 바는 지난 2013년 파리 마레지구에 론칭한 향수 편집숍으로, 세계 최고 수준의 니치 향수 편집숍으로 입소문 나 있다. 한섬 관계자는 “올 상반기 내 청담동에 플래그십스토어를 오픈할 예정”이라고 귀띔했다.

더 현대 백화점에 위치한 조 말론 매장.

더 현대 백화점에 위치한 조 말론 매장.

코로나19로 중단됐던 향수 매장의 시·착향이 재개되는 분위기다. 덩달아 오프라인 매장들도 바빠졌다. 롯데백화점 잠실점 지하 1층은 니치 향수존이 별도로 조성됐으며 여의도 더현대서울은 애호가들 사이에서 여러 브랜드를 한번에 경험해볼 수 있는 핫플레이스로 꼽힌다. ‘인증’을 즐긴다면 가로수길의 플래그십스토어들을 추천하지만, 향수 구입은 온·오프라인을 가리지 않는다. 일명 ‘시마을’로 불리는 신세계인터내셔날 온라인몰 에스아이빌리지는 니치 향수 ‘맛집’으로 불린다. ‘향수 사랑’ 등의 온라인카페도 최신 정보를 얻으려는 이들로 붐빈다.

쏟아지는 향수 속에서 나만의 향을 고르는 특별한 방법이 있을까. 전문가들은 다양한 경험을 통해 자신의 취향을 알아가기를 권한다. 김택현 조향사는 “같은 향이라도 개개인의 컨디션이나 상황에 따라서 다르게 느껴진다”며 “최대한 다양한 향수를 경험해 보길 바란다”고 조언했다. 구서현 향수 매니저도 “시향한 테스터를 집으로 가져와 마스크를 벗은 뒤 다시 한번 확인하면 정확한 판단에 도움이 된다”며 “샘플 제품을 구입해 호불호를 판단하는 것도 방법”이라고 추천했다.

향수 전문 유튜버 알렉스는 “자신만의 향을 찾는 것만큼이나 자신만의 방식으로 향수를 즐기는 법을 찾는 것도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향수의 이름, 디자인, 조향사의 의도, 향수의 스토리 등을 나름대로 해석해 보는 시간을 가져보라”며 “보틀을 하나의 오브제 삼아 클래식 음악이나 명화를 보듯 향을 느껴보길 바란다”고 제안했다.

● ‘향덕’들이 추천하는 레벨별 니치 향수

바이레도 블랑쉬

바이레도 블랑쉬



[입문] 브랜드 접근성이 좋고 비교적 은은한 향을 가지고 있어 부담 없이 사용할 수 있다.

① 바이레도 ‘블랑쉬’

향수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도 무난하게 좋아할 만한 포근한 코튼 향. 남녀노소 가리지 않는 베스트셀러다.

② 불리 ‘목욕하는 여인’

부드러운 비누향이 난다. 워터 베이스 향수라 알코올 베이스인 보통 향수에 비해 코를 톡 쏘는 느낌이 없다. 여성들에게 인기다.

③ 조말론 ‘머르 & 통카’

진중하면서도 날카로운 향. 전형적인 조말론의 향보다 어둡고 무게감이 있지만, 달콤한 통카나무와 신비로운 머르열매의 향이 어우러져 매력적이다.

크리드 어벤투스

크리드 어벤투스

[초급] 은은하고 가벼운 향수부터 그윽한 분위기를 뽐낼 수 있는 향수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보다 개성을 강조할 수 있는 리스트.

① 딥티크 ‘생제르맹 34번가’

이름 그대로 파리 생제르맹 34번가에 있는 딥티크 부티크 본점의 향을 담았다. 따뜻한 우디향에 무화과의 아로마틱한 향이 더해졌다.

② 크리드 ‘어벤투스’

초기 일부 상류층에서 비밀스럽게 누려온 독창적인 향기로 2010년대 향수 업계를 흔든 히트작이다. 남성들에게 추천.

③ 빌헬름 ‘모닝 체스’

싱그러운 아침에 공원에서 모닝 체스를 두는 모습에 영감을 받아 만들어졌다. 어떤 상황에도 잘 어울리는 다재다능한 향수로 꼽힌다. 아직 국내에는 정식 수입되지 않았다.

찰나를 담은 나만의 향…요즘 대세는 '니치 향수'

[중수]‘향수 좀 뿌려봤다. 남들과는 다른 향수를 찾고 싶다’는 이들의 만족도를 높여줄 제품들이다. 호불호가 갈릴 수 있지만, 취향만 맞는다면 ‘인생 향수’를 찾을 수도 있다.

① 퍼퓸 드 말리 ‘멜리오라’

청포도 사탕이 생각나는 상큼함이 장점. 잔향이 오래가고 그 틈에 포근한 머스크 향이 남는다.

② 메종 프란시스 커정 ‘바카라 루쥬 540 오드퍼퓸 / 엑스트레 드 퍼퓸’

발향과 지속력이 강한 편이다. 치명적인 달콤함이 매력적이지만 호불호가 뚜렷이 나뉘기도 한다.

찰나를 담은 나만의 향…요즘 대세는 '니치 향수'

[고수] 조향사의 의도나 하우스(제작사)의 이미지 등이 잘 반영돼 확실한 개성이 담긴 향이다.

① 킬리안 ‘엔젤스 쉐어’

킬리안 헤네시의 유산(Heritage)을 향으로 담은 향수. 헤네시 코냑을 좋아한다면 도전해볼 만하다.

②논픽션 ‘포레스트’

훈제·훈연의 거친 느낌이 가미돼 첫 향이 다소 탁하게 느껴질 수 있다. 나만의 독특한 향에 취해보고 싶을 때 추천.

펜할리곤스

펜할리곤스

[향덕] 알면 알수록 강렬함에 더 끌리는 향수 제작사 리스트

① 로자 퍼퓸

최소 40만원부터 400만원까지 다양한 라인업을 가진 영국의 니치 향수 명가의 제품. 선명한 향이 특징이다.

② 펜할리곤스 혹은 크리드

바이레도, 조말론처럼 유명하진 않지만 ‘향덕’들 사이에서 입지가 탄탄한 브랜드. 남들이 모두 뿌리는 향을 거부하는 이들에게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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