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짝하고 사라진 그곳, 알고 보니…
명품 브랜드의 쇼케이스를 연상케 하는 건물 유리창 속 외국인 모델이 들고 있는 삼각김밥부터 범상치 않았다. 2층에서 마주한 직원들의 모습도 생경하긴 마찬가지였다. QR코드로 결제가 가능한 샤넬 토트백, 프라다 모자 등을 소개하던 그들은 마치 또 다른 명품을 안내하듯 잔잔한 목소리로 편의점의 인기 품목인 블랙페퍼치킨, 불닭치킨마요의 감칠맛을 설명했다.
이마트24가 6월 한 달간 서울 삼청동점을 리모델링해 운영한 팝업스토어 ‘블랙24’의 풍경이다. 온라인 게임 ‘검은 사막’의 제작사, 명품 플랫폼 ‘머스트잇’과 공동 기획한 이곳은 동네 편의점에서 흔하게 보는 식음료와 게임 속 판타지 요소들이 공존하는 이색적인 콘셉트로 인기를 끌었다. 하루 최대 1800여명이 발도장을 찍었고, 편의점 매출 또한 전년 대비 101%로 증가했다.
‘팝업스토어’란 특정 기간에만 문을 여는 임시 매장을 뜻한다. 인터넷 웹페이지에서 떴다 사라지는 ‘팝업창’과 비슷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2002년 미국의 할인마트인 ‘타깃’에서 공간이 확보되지 않아 열었던 임시 매장이 흥행에 성공하며 팝업스토어의 시초가 됐다. 국내에는 2010년 즈음 패션·뷰티 업계를 필두로 팝업스토어 붐이 일었다. 당시 팝업스토어는 신제품 출시 후 고객의 즉각적인 반응을 살피고, 동시에 홍보의 장으로 활용되는 공간이었다.
박유현 마케터는 “200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신제품 성공 여부는 이화여대 앞에서 결정된다는 정설이 있었다. 대학생, 특히 여대생들의 반응이 곧 바로미터였다”면서 “그러다 온라인 쇼핑이 번지며 분위기가 달라졌다. 초창기 팝업스토어는 마케터들에게 ‘이대 앞’ 같은 존재였다”고 회상했다. 목적이 분명했던 만큼 대다수 브랜드는 이슈보다 제품에 집중했고, 팝업스토어를 통한 매출 극대화에 힘을 쏟았다. 이후 음식, 가전, 생활용품 등 팝업스토어의 영역은 확장됐지만 기존 매장과 차별성 없이 반복되는 콘셉트에 소비자들의 발길은 뜸해졌다.
■ 경험을 삽니다·이미지를 팝니다
트렌드 전문가 크리스티안 미쿤다는 저서 <마음을 훔치는 공간의 비밀>에서 “오늘날의 젊은이들은 라이프스타일에 관심이 많고 텔레비전을 거의 안 보며 인터넷과 비디오게임을 즐기는 사람들이므로 고전적인 광고나 홍보 방식으로는 설득하기 어렵다”며 “팝업스토어가 탁월해 보이려면 예기치 않게 등장해야 할 뿐만 아니라 매우 독특해야 한다. 이 말은 상품과 매장 인테리어 모두에 해당한다”고 강조한다.
고전하던 팝업스토어는 온라인 쇼핑으로 채워지지 않는 ‘경험 소비’에 목마른 이들의 갈증과 함께 부활했다. 특히 팬데믹 이후 오프라인 공간에 대한 희소성이 높아지며 한시적으로 허락된 시간 내 특정 공간을 누비며 직접 체험하고 즐길 수 있는 팝업스토어의 매력은 극대화됐다. 여기에 소셜미디어에 경험을 공유하는 데 적극적인 MZ세대를 만나 시너지를 냈다.
패션 플랫폼 29CM가 9일간 선보인 ‘29맨션’은 MZ세대에게 팝업스토어의 좋은 예로 통한다. “현대 미술을 관람하듯 브랜드 고유의 감성과 문화를 깊이 체험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기획된 팝업스토어는 4층 건물 중 1층 굿즈숍을 제외한 3개 층이 ‘인스타그래머블’한 전시 공간으로 꾸며졌다. 오직 ‘볼거리’뿐인 팝업스토어의 티켓은 하루 만에 매진됐다. 이곳을 찾았던 한 인플루언서는 “트렌디한 공간을 다녀오면 나 또한 트렌디한 사람이 된 것 같다”며 “참신한 경험이 주는 재미가 팝업스토어의 매력”이라고 말했다.
성수동 팝업스토어 탐방을 즐기는 직장인 김지희씨는 “잘 알려지지 않은 브랜드나 유명 브랜드의 몰랐던 가치를 원석처럼 발견하는 과정이 반갑다”고 밝혔다. 김씨는 매번 다른 브랜드가 입점하는 성수동의 임대형 팝업매장 ‘프로젝트 렌트(R)’의 단골이다.
팝업스토어를 필요로 하는 것은 소비자뿐이 아니다. 1975년 출시된 ‘가나초콜릿’은 롯데제과의 대표 브랜드이자 연 500억원 가까운 매출을 기록하는 ‘효자템’이다. 하지만 오랜 역사가 올드함으로 인식되는 것에 대한 고민이 컸다. 이를 해결한 것이 바로 팝업스토어 ‘가나초콜릿 하우스’다. 성수동에 자리 잡은 이곳은 파티셰와 협업해 개발한 초콜릿 음료, 디저트로 세련미를 뽐냈다. 롯데제과 측은 팝업스토어의 인기가 치솟자 영업기간을 연장하기도 했다.
론칭 때부터 꾸준하게 팝업스토어로 이슈몰이를 해온 아이웨어 브랜드 젠틀몬스터는 “공간 마케팅을 잘하는 기업”으로 정평이 나 있다. 이들은 팝업스토어에 단순히 선글라스와 안경을 진열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오감을 자극하는 시도로 미래지향적인 브랜드의 가치를 전달하고 인지도를 높인다. 블랙핑크 제니와 협업해 선보인 팝업스토어 ‘젠틀가든’은 이 브랜드가 추구하는 바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인형의 집을 모티브로 이 공간에는 ‘안경’을 연상케 하는 직접적인 단서가 없다. “사람들이 ‘이 브랜드는 이럴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틀을 하나씩 돌파해 가며 다음이 궁금해지고 기대치가 높아지게 하는 것”이 이들의 속셈이다.
■ 잠재 고객까지 포섭하는 영업 기술
한 F&B 브랜드의 홍보 담당자는 “과거의 팝업스토어가 소비자들을 기다리는 수동적 공간이었다면 지금의 팝업스토어는 소비자들이 찾아오는 공간, 나아가 웨이팅(대기)까지 하게 만드는 공간으로 승격했다”고 표현했다. 팝업스토어에서만 구할 수 있는 ‘한정판’ 역시 소비자들의 구미를 당기는 요소다.
‘두껍상회’는 판촉용으로만 제작하던 하이트진로의 두꺼비 굿즈를 구매하고 싶다는 소비자들의 요청에서 출발했다. 서울로 한정했던 애초 계획과 달리 하이트진로는 부산, 대구, 광주, 강릉 등 1년3개월간 9개 도시에서 팝업스토어의 문을 열었다. 팝업스토어 외 별도의 판매 창구를 두지 않는다는 원칙이 이들의 영업 기술이다. 덕분에 굿즈 리셀러가 등장하는 진풍경이 발생하기도 했다.
특별함을 위한 노력은 이뿐만이 아니다. 미래를 내다보고 잠재 고객까지 포섭하는 여유를 부리는 팝업스토어도 있다. 지난 6월 문을 연 성수동의 ‘캐리어 팝업스토어’는 1920년대 뜨거운 여름, 뉴욕의 바캉스 명소는 캐리어 에어컨이 설치된 극장이었다는 스토리에서 착안해 만들어졌다. 팝업스토어에 들어선 소비자들은 가장 먼저 시원한 바람과 마주하게 된다. “시원한 바람 하면 캐리어”가 연상될 수 있도록 ‘고수’의 전략을 택한 것이다.
■ 명품도, 백화점도 동참할 수밖에 없는 이유
팝업스토어 중개 플랫폼인 ‘스위트스팟’에 따르면 지난 5월 팝업스토어 진행 건수는 131건으로 전년 동기 대비 2배 이상 늘었다. 코로나19로 팝업스토어 개장이 드문 상황이었음을 고려할 때 향후 팝업스토어는 더욱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명품 브랜드와 백화점도 이 대열에 적극 동참하는 분위기다. 고객들의 팬덤과 집중적인 반응이 수익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루이비통은 지난달 청담동 매장 4층을 팝업 레스토랑 ‘피에르 상 at 루이비통’으로 꾸몄고, 이보다 앞선 3월 구찌는 이태원 플래그십 스토어 구찌 가옥에서 이탈리안 컨템퍼러리 레스토랑 ‘구찌 오스테리아 다 마시모 보투라’를 선보였다. 두 레스토랑 모두 짧은 시간에 예약이 마감돼 화제가 됐다.
현대백화점의 경우 ‘더현대서울’을 오픈하며 지하 2층에 가장 핫한 맛집 브랜드들을 초대해 팝업 형태의 이벤트를 진행했다. 자연스럽게 사람들이 몰렸고 백화점 측은 MZ들의 놀이터, 트렌드를 선도하는 공간이라는 이미지 메이킹에 성공했다. 목표했던 매출 6300억원 또한 30% 가까이 초과했다.
■ 한국의 팝업스토어는 ‘이렇게’ 다르다
국내 부동산 상황도 팝업스토어 열풍을 부추겼다. 짧은 계약 기간은 건물주에게도, 매장을 빌리는 업체에도 ‘윈윈’이다. 공실의 부담을 줄이고 장기 임대에서 오는 고정비용 부담을 덜 수 있기 때문이다. 서용구 숙명여대 경영학과 교수는 “팝업스토어는 시장 변화에 빠르고 민첩하게 반응하고 고객의 요구에 유연하게 대처하는 ‘애자일 마케팅’의 결정판이라고 볼 수 있다. 통상적으로 유행의 생명력은 길어봐야 6개월이다. 공간 계약 기간이 유연해야 손해를 줄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도심보다는 변두리에서 열리거나 인테리어에 무심한 해외 팝업스토어와 달리 국내 팝업스토어는 홍대 입구, 성수동, 가로수길 등 ‘핫플’ 위주로 형성됐다는 점도 인상적이다. 전문가들은 “공간 계약 기간에 대한 부담이 없는 만큼 1급지, 상급지에서도 ‘짧고 굵게’ 브랜드의 힘을 과시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브랜드의 입장에서는 전광판 광고 등에 비해 가성비를 챙길 수 있다는 점도 팝업스토어의 매력이다. 최근 한 리빙브랜드의 팝업스토어를 기획한 구효석 큐레이터는 “일방적인 전달에 그치는 광고보다 피드백을 주고받을 수 있는 팝업스토어의 효과가 더 크다”며 “10명의 영업사원보다 낫다는 자조적 목소리가 나오기도 한다”고 전했다. 신세계 스타필드 홍보를 담당하는 박경빈씨 역시 “소비자들의 관심이 다양화되고 트렌드를 받아들이는 속도가 빨라졌다”며 “팝업스토어는 이런 상황에서 정식 매장 대비 상대적으로 단기간에 다양한 직군의, 다수의 소비자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이 강점”이라고 말했다.
■ 그래서, 지금 뜨는 팝업스토어는 어디?
지난달 26일 서울 홍대 입구 메인거리에 오픈한 팝업스토어 ‘디즈니+진심HOUSE’는 월트디즈니 컴퍼니코리아가 디즈니 플러스 콘텐츠를 직접 경험할 수 있도록 기획한 체험형 공간이다. 냉장고에는 로맨스, 액션, 스릴러 등 디즈니+ 채널에서 볼 수 있는 다채로운 콘텐츠가 팝시클의 형태로 진열돼 있다. 이용자들은 선택한 팝시클과 감상형 디바이스를 교환한 다음 시연존에서 무료로 콘텐츠를 감상할 수 있다.
인스타그램에서 가장 핫한 팝업스토어로 거론되는 곳은 성수동의 ‘마티스토어’다. 글로벌 패션 브랜드 파인드카푸어가 운영하는 이곳은 뉴트로 감성의 90년대 비디오 렌털숍을 콘셉트로 꾸며졌다. 비디오, LP, 서적 등과 함께 파인드카푸어의 시그니처인 마티백이 전시됐다. 팝업 기간동안에만 진행되는 ‘마티백 렌털 서비스’가 특히 인기다.
7월 3일까지 부산 신세계 센텀시티에서는 ‘잔망루피’ 팝업스토어가 열린다. 인기 애니메이션 ‘뽀롱뽀롱뽀로로’에 등장하는 바로 그 루피다. 최근 그는 인터넷상에서 반전 매력을 보여주는 ‘합성짤’로 어른들의 마음까지 사로잡았다. 서울에서의 성공을 담보로 펼쳐지는 이번 팝업스토어에는 부산의 상징인 갈매기를 접목한 한정판 잔망루피 인형도 만나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