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정이 당연한 시대다. 과거 필름 카메라 시대에는 인화된 사진 속 모습이 왜곡되었거나 눈이라도 감았다면 그 역시 ‘추억’이었다. 지금은 다르다. 감은 눈도 번쩍 뜨게 만드는 마법 같은 사진 보정 앱들이 있기 때문이다. 보정 앱 터치 한 번이면 우중충한 민낯도 뽀얀 ‘풀메이크업’이 될 수 있고, 다부진 사각턱도 달걀형 얼굴로 거듭날 수 있다. 최근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각도빨’과 보정 없는 정직한 ‘셀카’ 사진을 게재한 배우 이정재는 ‘셀카 바보’ ‘똥손’이라는 누리꾼들의 애정 섞인 놀림을 받기도 했다. 속임수인가, 센스인가 가늠할 수 없는 시대. 사진 보정에 대한 다양한 생각을 들었다.
■보정 없이 나를 공개할 수 있을까?
‘자비 없기’로 유명한 것이 신문사 인터뷰 사진이다. 신문사는 사실주의에 입각한 보도 사진을 기본으로 하기에 인터뷰 사진에도 후보정 작업을 하지 않는다. 그런 이유로 최근 연예계에는 인터뷰용 사진을 소속사에서 ‘제공’하는 경우가 많다. 한 번은 당시 큰 인기를 누리는 가수의 인터뷰를 어렵게 성사시킨 적이 있다. 사진 촬영과 인터뷰를 순조롭게 마치고 돌아갔는데, 그다음 날 가수로부터 전화 한 통이 걸려 왔다.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그가 한 말은 “어제 찍은 사진을 받아 내가 후보정해서 다시 보내면 안 되겠느냐”는 것이었다. 연예인과 관련된 사진 보정에 대한 일화는 또 있다. 한 연예인과 인터뷰를 마치고 기념사진을 찍기로 하고 기본 카메라 앱을 열었더니 대뜸 날아온 반응. “왜 보정 앱으로 찍지 않죠? 센스 어디 갔어요?”
연예인이 보정에 예민한 것은 당연한 일일 수 있다. 최근에는 사진뿐 아니라 영상에도 ‘뷰티 리터칭’이라고 불리는 보정을 넣는 일이 흔하기 때문이다. TV 드라마 전문 제작사 대표 A씨는 “배우들이 조명으로 신경전을 벌이는 시대는 지났다. 일부 배우들은 자신이 등장하는 장면이 더 돋보이고 예쁘게 나오도록 별도의 리터칭을 요구한다. 물론 비용은 배우 측 부담이다. 드라마 속 비주얼은 곧 광고 섭외로 이어지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아깝지 않은 투자인 셈”이라고 밝혔다.
Z세대에게 사진 기반 SNS 인스타그램이 유행하고 ‘셀카(셀피)’가 자기 노출 및 자기표현의 수단으로 자리 잡으며 메이크업은 물론 얼굴 입체감 전용, 몸매 전용, 필터 전용 앱 등 분야별로 특화된 보정 앱들이 등장하고 있다. 현재 기준 iSO 앱스토어에 등록된 사진 및 영상 보정 관련 앱만 해도 100종이 훌쩍 넘는다.
‘비연예인’에게도 보정은 일상이 됐다. ‘#오운완(오늘 운동 완료)’ ‘#OODT(Outfit Of The Day)’ 등 SNS에 내 모습이나 옷차림을 매일 공개하는 데 거리낌이 없다. 동시에 ‘진짜 나’를 공개하기 힘든 시절이기도 하다. 누구나 보정 앱으로 사진을 만지거나, 아예 촬영 단계에서 보정 설정된 카메라로 사진을 찍다 보니 보정 없는 모습이 낯선 상황이 돼버렸다.
인물 전문 사진작가 이경섭씨는 약 8년 전부터 고객들의 보정 요구가 심해지기 시작했다고 밝힌다. 인스타그램이 보편화된 시점과 맞물린다.
“저는 0.1초 찰나에 드러나는 인물의 매력과 분위기를 포착하는 사람이에요. 그런 사명감으로 사진을 찍어왔는데 언제부터인가 고객들은 ‘눈을 키워달라, 턱을 깎아달라’는 등 보정에 대한 요구가 높아졌어요. 그들의 요구에 따라 보정할수록 내가 찍어낸 그 사람 본연의 매력이 사라지니 힘들고 괴로웠어요.”
누구나 외모에 대한 약간의 자의식과 판타지는 있기 마련이지만 그는 최근 본인의 모습을 인지하지 못하는 상황까지 온 것 같은 사람들이 부쩍 많아지고 있음에 우려를 표한다.
“원본을 보여드리면 ‘이게 나라고요?’라며 심하게 당황하는 분들이 많아졌어요. 그래서 리터칭해달라는 대로 모든 요구를 들어줬고 결국 원본과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는데, ‘이제야 나다’라고 안도하더군요. 그때는 좀 소름이 돋았어요.”
이 작가는 “사람들은 자신의 단점이라고 생각했던 부분이 제3자에게 매력으로 느껴질 수 있다는 걸 부정한다”며 더는 자신의 작업물에 본질을 벗어난 보정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무조건 감추고 지우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이들과 내 작업 방향성과 맞지 않는다”는 판단에서다. 상업 작가에게는 타격이 될 만한 행보지만 자신의 작품 색깔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는 결단이라고 말했다.
반면 보정 잘하는 것으로 입소문 난 사진작가들도 있다. 3개월치 촬영 예약이 꽉 찼다는 프로필 전문 사진작가 B씨는 “고객이 원하는 대로 사진을 만드는 것도 사진작가의 능력”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보정을 잘할 수 있는 특별한 사진 비법을 전했다.
“애초에 찍을 때부터 보정을 염두에 두고 조명을 맞춥니다. 얼굴의 윤곽이나 명암이 많이 지면 후보정이 어려우므로 얼굴을 마치 백지처럼 균일하게 조명을 비춰 촬영하고 후보정으로 매만지죠. 요즘 사진 기술의 반은 후보정이라는 것을 부정할 사람이 있을까요?”
그러나 사진이 실물과 너무 다르다면 불리해지는 상황도 있다. 바로 면접 때다. 면접 코칭 전문가는 실물과 너무 다르게 보정한 이력서 사진은 쓰지 않는 것이 좋다고 권한다.
“면접의 기회라도 얻기 위해 보정이 심한 증명사진을 쓴다지만 면접관이 지원자에게 가장 원하는 1순위는 진실성입니다. 사진과 실제의 괴리가 크면 클수록 면접에 실패할 확률이 높아요. 일단 ‘실물과 다르잖아?’라는 부정적인 감정으로 시작하는 면접의 결과가 좋을 리 없으니까요. 오히려 ‘실물이 낫다’라는 긍정적인 평가에서 면접을 시작하는 게 낫죠.”
■보정 속임수일까, 시대 흐름일까
2016년 음식과 건강 관련 서적 <더 가디스 레볼루션(The Goddess Revolution)>을 쓴 영국 작가 멜 웰스는 삼성 스마트폰의 카메라 초기 설정을 혹평하고 나섰다. 그는 매끄러운 피부 보정이 들어간 삼성 스마트폰으로 셀카를 찍어 올린 다음 “삼성 스마트폰 초기 설정이 ‘뷰티 레벨 8’로 맞춰져 있다. 이는 ‘내 외모는 보정이 돼야만 괜찮아진다’고 사람들이 생각하게 만든다. 자연 그대로의 내 외모에 만족하지 못하도록 악영향을 준다”며 자기 몸 긍정주의(보디 포지티브) 관점에서 삼성폰을 비난했다.
또한 해외에서는 인스타그램 등 소셜미디어에 심하게 보정한 사진을 올리는 것에 대한 반대 운동이 일고 있다. 세계 유수의 광고대행사 영국 오길비는 얼굴이나 몸매를 보정한 인플루언서와 협업을 하지 않겠다는 방침을 세웠다. 과도한 보정으로 생긴 왜곡된 이미지로 인한 병폐를 퇴치하겠다는 이유다.
다국적 기업 유니레버, H&M도 자사의 상품 이미지에 보정작업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실제 패션 브랜드 H&M의 홈페이지를 살펴보면 모델의 체형뿐 아니라 튼 살이나 흉터도 자연스럽게 노출한 이미지를 내걸고 있다.
반면 보정하는 사람들의 심리를 인정하는 것이 ‘시대 흐름’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청담하버드심리센터 최명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는 “과거에는 최소한 나랑 닮게 보정했지만 이제는 남에게 보기 좋으면 상관없는 시대”라며 “그것이 본질이냐 아니냐는 중요하지 않다. 오프라인과 온라인, 일상과 비일상의 경계가 허물어지면서 사람들이 나를 예쁘고 괜찮은 사람으로 봐줬으면 좋겠다는 인식이 앞서고 있다”라고 말한다.
최 전문의에 따르면 보정이란 나를 대신하는 가상세계의 ‘아바타’를 꾸미는 것과 같은 일이다. 아바타를 꾸미듯 자신을 포장하고 그로 인해 만족감을 얻고 때로는 금전적 이득을 취할 수도 있다. 다만 문제는 보정 사진 같은 가짜 신분을 이용해 남에게 커다란 피해를 줬을 때 발생한다. 이때부터는 ‘질환’의 범주로 판단한다.
보정 앱의 일상화로 성형외과를 찾는 이들에게도 작은 변화가 생겼다. 과거에는 자신이 선망하는 특정 연예인의 사진으로 상담을 받았다면 이제는 ‘적극적으로’ 잘 보정된 자신의 사진을 들고 병원을 찾는다는 것. 요즘은 보정을 넘어 가상 성형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성형 앱’도 나오면서 “이렇게 성형해달라” 요구하는 이들도 생겼다.
나비성형외과 신예식 원장은 “한계가 없는 사진 보정과 실제 성형과는 괴리가 있다”며 “사람마다 피부층 아래 조직, 지방층, 연골, 뼈 등 각기 다른 구조를 갖고 있어 단순하고 평면적인 보정과 현실 성형은 다른 점이 있을 수 있다”고 경고한다. 신 원장은 무리한 요구를 하는 고객이 있다면 그 부분을 설득하고 타협점을 찾으며 상담한다고 말했다.
국내 최초 내추럴 사이즈 모델이자 패션 크리에이터인 치도는 누구보다도 마르고 예쁜 외모에 집착했던 사람이다. 대학 시절 다이어트를 위해 휴학까지 감행했고 섭식장애까지 일으킨 후에야 자기 몸 긍정주의에 대해 각성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내추럴 사이즈 모델로 활동하고 66, 77 사이즈를 위한 생활 밀착 패션 채널을 운영하며 몸에 대한 다양한 생각을 대중과 공유하고 있다.
“2017년부터 패션 유튜브를 시작했어요. 그때는 지금보다 예쁘고 날씬한 사람만이 유튜버를 할 수 있는 시기였기에 부담이 컸어요. 예쁘게 나오는 조명이나 보정은 필수인 분위기에서 내 민낯이나 몸무게를 공개한다든가, 과거 다이어트 실패 경험담 같은 적나라한 이야기를 해도 사람들이 귀 기울이고 공감해줄까 걱정했던 기억이 나요.”
우려와 달리 ‘솔직한 사람이 나타나서 좋다’ ‘큰 용기를 얻었다’라는 긍정적인 반응이 이어졌다. 치도는 이런 의견을 주고받을수록 자신의 이야기가 더욱 필요한 시점이라는 확신이 들었다고 했다.
“실제 몸무게나 보정 없는 민낯 공개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는 제 이야기에 많은 분들이 응원을 보내주셨어요. 그 이후 더 용기를 내서 노메이크업 혹은 노브라로 영상 찍기 챌린지를 이어갔고 ‘100인 무보정 인터뷰’도 진행할 수 있었어요.”
100인 무보정 인터뷰는 그가 기획한 몸 긍정주의 프로젝트 ‘나를 만나다’이다. 성별, 나이 상관없이 100명을 모집해 무보정으로 사진 촬영을 한 뒤, 각자 몸에 관한 솔직하게 이야기를 나누며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는 보정을 요구하고 집착하는 요즘 분위기에 대해 “사회가 정한 미적 기준 탓”이라고 짚어냈다. 다양한 외모, 각기 다른 신체 사이즈가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회적 기준, 그리고 나를 사랑할 수 없게 만드는 주변 요소들이 스스로를 부정하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100인이 공통적으로 한 말은 ‘자기 몸 긍정주의에 대해 너무 잘 알지만 이번 생애에는 못할 것 같다’였어요. 우리 사회는 인사부터 외모 평가잖아요. ‘살이 쪘네’ ‘빠졌네’ ‘왜 그리 피곤해 보이냐’로 대화를 시작하죠. 또 부모들은 걱정이라는 명분으로 자식에게 아무렇지 않게 외모에 대한 지적을 툭 던지죠. 대다수가 갖는 자신의 신체 콤플렉스는 어린 시절에 시작됐으며, 부모님의 지분이 90% 이상이라고 했어요(웃음).”
우리 사회에 팽배한 외모지상주의로 인해 사소하고 개인적인 경험이 쌓여 ‘내 본연의 모습은 감춰야 하고 보정해야 하는 것’이란 부정적인 인식으로 이어졌다고 말하는 치도는 신체 자아상이 형성되는 시기에 있는 청소년을 대상으로 자기 몸 긍정주의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는 계획을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