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절은 자유다, 치유다

정우성

태국 ‘식스 센스 야오 노이’에서 마주한…완벽한 휴양과 회복의 조건

문명과 유리된 시간을 보낼 거라는 기대로 들어선 리조트. 수영장 옆에 타월을 깔고 누우면 하늘과 바다의 존재감만 선명했다. 풍경을 보고, 파도 소리를 듣고, 젖었던 피부가 다시 마르는 동안 잊었던 감각들이 미세하게 살아났다.

문명과 유리된 시간을 보낼 거라는 기대로 들어선 리조트. 수영장 옆에 타월을 깔고 누우면 하늘과 바다의 존재감만 선명했다. 풍경을 보고, 파도 소리를 듣고, 젖었던 피부가 다시 마르는 동안 잊었던 감각들이 미세하게 살아났다.

거기선 도무지 할 일이 별로 없었다. 우리는 약 일주일간의 휴가 중 딱 이틀만 거기 있었다. 약 1년 반이 지난 지금, 그 이틀이야말로 휴가 전체를 지배한 추억이었다는 것을 감각으로 깨닫는다. 몇 번을 회상해도 100%에 가까운 휴식이었다. 시간만 허락한다면 언제든 다시 누리고 싶은, 가끔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터질 것 같은 머릿속에 깔끔하고 예쁜 정원 하나가 생기는 것 같은 시간이었다.

그 리조트에는 문명이랄게 별로 없었다. TV가 있긴 했는데 10년은 지난 것 같은 구형 TV를 문까지 달린 찬장 속에서 겨우 찾을 수 있었다.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를 제공하는 것도 아니었다. 위성방송도 더디게 나왔다. 몇 개의 채널을 돌려보다 TV를 끄고 찬장 문을 닫았다. 가까스로 와이파이를 이용할 수는 있었지만 그마저도 매우 느긋한 속도였다. 보챈다고 달라질 게 없는 환경이었으니 우리도 그런 사람이 되기로 했다.

리조트의 이름은 ‘식스 센스 야오 노이’. 식스 센스는 환경을 보존하고 지속 가능한 휴양을 제공하는 브랜드로 알려져 있다. 야오 노이는 태국 푸껫과 크라비 가운데 즈음에 있는 섬의 이름이다. 푸껫 아오포 그랜드 마리나 선착장에서 스피드보트를 타고 20~30분 정도 달리면 리조트에 닿았다. 배에서 내리자마자 매니저의 환대를 받고 담당 스태프와 카트를 타고 빌라로 이동했다. 섬의 입구부터 숙소까지 점점 깊어지는 숲 냄새와 녹음을 느끼면서 마침내 작은 문 앞에 내렸을 때, ‘앞으로 며칠은 문명과 유리된 시간을 보낼 수 있겠구나’ 자연스럽게 생각하게 되고 마는 곳이었다.

우리는 짐을 풀어놓고 챙겨간 책들을 침대 곁에 두었다. 소셜미디어와는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가끔은 휴대전화를 어디에 놓았는지 잊기도 했다. 대신 수영이나 산책을 했다. 정말이지 몇 년 만에 낮잠도 잤다. 한 사람이 수영을 하는 동안 다른 사람은 멍하니 있기도 했다. 빌라에서 10여분 정도 걸어 나가면 매우 귀여운 사이즈의 해변에서 시간을 보낼 수도 있었다. 거의 유일한 놀이터였다. 미리 챙겨간 타월을 깔아놓고 누우면 하늘과 바다의 존재감만 선명했다. 풍경을 보고, 파도 소리를 듣고, 젖었던 피부가 다시 마르는 동안 잊었던 감각들이 미세하게 살아났다.

가만히 있다 보면 마침내 책이 손에 들어왔다. 활자에 집중하면 사고가 가지런해졌다. 잔잔해진 생각의 흐름 위에서 다시 의욕이 샘솟는 내면의 풍경과 만날 수 있었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들었을 때 느껴지는 남국의 바람. 생전 처음 듣는 소리로 우는 새들. 시선이 닿는 곳마다 열대의 울창한 숲이 우리를 감싸고 있었다. 사생활은 완벽에 가깝게 보호받고 있었다. 아는 사람도 알고 싶은 사람도 없는 환경이었다. 자발적 고립이었다.

[정우성의 일상과 호사]단절은 자유다, 치유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법>을 쓴 예술가이자 새 관찰자 제니 오델도 비슷한 시간을 보낸 적이 있었다. 프로젝트를 위해 스페인 시에라네바다산맥으로 떠나는 일정이었다. 예약해둔 오두막에 도착했는데 휴대폰 신호도 와이파이도 잡히지 않았다. 예상치 못한 상황. 며칠 동안 연락 두절일 테니 걱정 말라는 말을 남길 틈도 없이 떠나온 여행이었다. 답장하지 못한 업무 메일도 여럿이었다. 미리 받아둔 음악도 없었다. 그렇게 다시 정신을 차리기까지 걸린 시간은 단 20분. 제니 오델은 이렇게 썼다.

“그러나 짧은 패닉에서 빠져나온 나는 내가 얼마나 금세 아무렇지 않아졌는지를 깨닫고 깜짝 놀랐다. 그뿐 아니라 휴대폰이 그저 하나의 물건이 되어 한없이 무력해 보인다는 사실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휴대폰은 더는 수천 곳으로 이어지는 입구가 아니었고, 두려움과 가능성으로 가득 찬 기계도, 심지어 의사소통의 도구도 아니었다.”

그 오두막에서, 제니 오델은 휴대폰이 ‘무덤덤했다’고 회상했다. 유일한 용도는 손전등과 타이머였다는 말도 덧붙였다. 몇 분마다 울리는 알람이 사라졌다. 소셜미디어 피드를 ‘새로고침’하고 싶은 욕구도, 아까 올린 피드에 ‘좋아요’가 몇 개나 달렸는지를 확인하면서 도파민을 갈구하는 자신도 지워져 마침내 또렷해졌다. 그렇게 물리적으로나 와이파이적(?)으로도 완벽하게 고립된 상태에서 그는 프로젝트 작업에 온전히 몰입할 수 있었다고 한다.

[정우성의 일상과 호사]단절은 자유다, 치유다

2023년을 달군 책, <도둑맞은 집중력>을 쓴 작가이자 저널리스트 요한 하리도 유사한 깨달음에 대해 썼다. 요한 하리가 찾은 곳은 미국 매사추세츠주 케이프타운 끝에 있는 작은 마을 프로빈스타운이었다. 단 한 번만 검색해봐도 그 마을이 어떤 무드인지 알 수 있다. 해변을 따라 늘어서 있는 목조 주택들, ‘아웃사이더의 마을’이라는 누군가의 호명. 우리가 ‘주류’라고 생각하는 흐름으로부터 한 걸음 정도 물러나 있는 것 같은 분위기가 사진을 통해서도 느껴지는 곳이었다.

제니 오델의 단절은 예상치 못한 사고로 시작해 해피엔딩으로 끝났지만, 요한 하리의 고립은 자발적이었다. 맥북과 휴대전화를 보스턴에 사는 친구에게 맡긴 후 오로지 3개월간의 디지털 디톡스를 위해 떠난 여행이었다. 그곳에서 요한 하리도 평화와 몰입을 되찾았을까? 좌충우돌이었다. 느슨했다가 울적했다. 불안했다가 평화롭기도 했다. 하지만 마침내 이렇게 쓸 수 있었다.

“그날 나는 바닷물이 내 발 위로 찰랑거릴 수 있도록 해변에 접이식 의자를 펼쳐놓고 <전쟁과 평화> 3권을 완독했다.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온종일 그곳에 앉아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런 식으로 몇 주 동안 날마다 독서를 해왔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돌아왔다! 내 뇌가 돌아왔어!”

제니 오델과 요한 하리의 고립에 비하면 야오 노이에서의 시간은 그저 휴양에 가깝다고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평화롭고 무료한 섬에서 회복과 몰입의 실마리를 되찾았다는 점에서만큼은 다르지 않았다. 제니 오델의 <아무 것도 하지 않는 법>은 거기서 완독한 책이었다. 서울에서는 2주를 붙잡고 있어도 못 읽던 책이었는데. 도대체 내 집중력에는 무슨 문제가 있었을까 자괴감에 빠졌던 시간이었는데. e메일과 소셜미디어와 바쁜 일정 사이에서 내가 잃은 것과 얻은 것은 도대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경험이었다.

10여년 전부터였을까? 참 많은 사람들이 겨울이 깊어지는 무렵 따뜻한 나라로 떠나기 시작했다. 프랑스에는 바캉스가, 한국에는 겨울휴가가 문화로 자리 잡은 것 같았다. 서울에서도 못 만날 사람들을 거기서 만나기도 했으니, 그즈음 방콕 수쿰빗 언저리의 백화점은 차라리 서울 같기도 했다. 그렇게 조금씩 다양해지기 시작했다. 베트남과 발리, 도쿄와 오사카와 홋카이도를 거쳐 취향과 형편대로 스웨덴, 핀란드 같은 북유럽까지 뻗어나갔다. 업무 관련 메일은 12월 중순 즈음부터 조용해지기 시작해 1월에 새로워졌다가 설명절 즈음 다시 잦아들기 시작했다.

외딴 섬 리조트엔 낡은 TV와 느린 와이파이뿐,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완전한 ‘자발적 고립’
휴대전화도 잊은 채 독서·수영·산책…단 이틀로 얻은 순도 100%의 휴식, 마음속 이정표가 되다

예약해둔 오두막에 도착하니 휴대전화 신호도 와이파이도 잡히지 않았다. 자발적 고립이었다. 식스 센스 야오 노이 제공

예약해둔 오두막에 도착하니 휴대전화 신호도 와이파이도 잡히지 않았다. 자발적 고립이었다. 식스 센스 야오 노이 제공

약 일주일간의 여행 중 그 섬에서 머문 시간은 딱 이틀이었다. 섬에서 나온 후에는 다시 소셜미디어와 맛집과 함께하는 즐거운 여행이었다. 서울에 돌아와서 이어진 것도 다를 것 없이 바쁜 일정이었다. 하지만 이제 내 마음속에는 작은 이정표가 하나 세워져 있다. 이정표 위에는 작은 메모지가 바람에 나풀거리는데 그 위에는 “자발적 고립”이라고, 작고 평화로운 글씨체로 쓰여 있다.

도시에서의 삶에 사실상 출구는 없다. 다 멈추고 싶어도 그러기가 쉽지 않다. 무턱대고 떠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인간은 왜 사회적 동물일까. 혼자서는 안 되는 걸까. 그러니 막다른 골목에서 지치고 힘든 것 같은 기분이 들 땐 그날의 고립과 바다를 생각한다. 휴대전화를 방에 두고, 거실에 나와 창문을 열고 눈을 감는다. 서울과 야오 노이가 같을 수는 없겠지만, 이제 회복과 몰입이야말로 자발적 고립이 나에게 줄 수 있는 선물임을 안다.

여행을 떠나는 단 하나의 이유가 있다면 그건 도무지 현생을 떠날 수 없을 때, 가만히 눈을 감는 식으로 다시금 의지할 수 있는 몇 개의 풍경을 수집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해 여름의 야오 노이가 그런 섬이었다. 떠나 왔지만 끝나지 않은 쉼이었다. 들어갈 때는 몰랐지만 나올 때는 ‘완벽한 휴식이었다’ 생각할 수밖에 없었던, 그야말로 이정표 같은 여행이었다.

■정우성

[정우성의 일상과 호사]단절은 자유다, 치유다

유튜브 라이프스타일 매거진 ‘더파크’ 대표, 작가, 요가 수련자. 에세이집 <내가 아는 모든 계절은 당신이 알려주었다> <단정한 실패> <산책처럼 가볍게>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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