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선이 아닌 것을 선택할 용기가 있을까? 요즘은 모두가 나에게 ‘최선’을 권하려 최선을 다한다. 알고리즘은 말한다. ‘너에게 딱 맞는 콘텐츠야.’ 이커머스는 확언한다. ‘너에게 최저가를 보장할게.’ 내비게이션 앱은 묻는다. ‘최적 경로를 선택하시겠습니까?’ 그리고 색조 화장 코너에 큼직하게 쓰여 있다. ‘네 피부톤에 착 붙는 컬러를 선택해.’ 이들이 보장하고 자부하고 추천하는 ‘최선의’ 선택을 하지 않는 건 용기가 아니라 어리석음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내 피부에 환한 불을 켜준다는 ‘퍼스널 컬러’라는 단어는 어쩐지 미심쩍다. 나를 위하는 것처럼 위장했지만 내 지갑을 노리고 있다는 의심과 ‘퍼스널’이라고 하면서 계속 ‘보이는’ 면을 강조하는 모순 때문이다.
‘퍼스널 컬러’는 크게 두 가지의 뜻을 지닌다. 하나는 개인의 머리카락, 피부, 눈동자 색과 같은 본연의 색. 다른 하나는 개인의 신체 색과 가장 조화를 잘 이루는 색이다. 최근 몇년간 후자의 뜻이 대중적으로 확산되었다. 쿨과 웜 두 갈래로 시작된 퍼스널 컬러 담론은 점차 봄, 여름, 가을, 겨울로 세분화되고 그 안에서도 브라이트, 웜, 뮤트로 쪼개지더니 이제 12가지 구분이 ‘대중적 용어’로 자리 잡았다.
퍼스널 컬러를 진단하는 콘텐츠는 매체를 가리지 않고 자주 등장하는데 그 패턴은 대부분 유사하다. 컬러리스트는 고객 얼굴에 여러 가지 색의 패브릭을 계속 대보면서 말한다. “칙칙해 보이죠, 얼굴과 몸이 따로 놀죠, 잡티가 보이죠, 아파 보여요.” 고객이 말한다. “저 이 색 좋아해요.” 다시 컬러리스트가 답한다. “안 어울려요. 두 턱으로 보이죠?” 사석에서 했다간 마음 상하기 쉬운 말들이, 천 한 장을 대었다는 이유로 거리낌 없이 발설된다. 물론 어떤 경우엔 비전문가인 내가 봐도 확연히 얼굴 톤이 차이나 보이는 경우도 있지만 사실 대세에 지장을 주지 않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퍼스널 컬러는 ‘퍼스널’에 대한 존중은 없고 그저 ‘최선의 나’로 보이게 해줄 ‘컬러’에 대한 맹신처럼 느껴졌다. 정작 그 최선은 ‘보이는’ 최선에만 머무르고 있는데도 말이다.
너무 익숙해져 기대조차 없던 이 단어가 어느 순간 새로운 용법을 득하며 스펙트럼을 확장했다. 인기를 끄는 청춘 드라마 주인공에 대한 칭찬이 색다르다. “우리 우석이 퍼스널 컬러는 ‘청춘’임.” 친구 여행 사진 밑에 이런 댓글이 달린다. “너 퍼컬 런던. 정말 예쁘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말한다. “내 퍼컬은 너야. 너랑 있을 때 제일 빛나.” 난 이 말들이 예뻐 오래 바라본다. 퍼스널 컬러는 개인이 가진 고유한 색에서, 내가 가장 나아 보이는 색으로 그리고 비로소 내 본연의 모습이 가장 빛나는 상태로 확장한다. ‘퍼스널 컬러’는 이제 지갑이 아닌 마음을 움직인다. 외부로 ‘보이는’ 색이 아니라 내면의 고유한 빛을 들여다 ‘보게’ 한다. 내 마음이 가장 편했던 장소, 가장 편한 상대, 내가 가장 나일 수 있게 하는 것들을 들여다보면 진짜 ‘최선의 나’와 더 가까워진다. 왜 그것이 나와 가장 잘 어울리는지, 왜 내가 나일 수 있는지를 배색의 논리로 설명하기란 어렵다. 공식이 아닌 미스터리한 매혹이 관여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하나는 분명하다. 그렇게 찾아낸 나의 빛이 가장 온전한 나다. 보여지는 조화가 아니라 우러나오는 진심에 담긴 빛이야말로 가장 최선의 나다. 퍼스널 컬러의 새로운 뜻은 의심 없이 마음에 든다.
2015년부터 빅데이터로 라이프스타일과 트렌드를 분석하는 일을 해오고 있다. <넥스트밸류>(공저), <말의 트렌드>(2022)를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