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깔나는 ‘맛’의 언어

정유라
[언어의 업데이트]맛깔나는 ‘맛’의 언어

영어에는 have(가지다)를 활용한 관용어가 많고, 한국어에는 ‘먹다’를 활용한 관용어가 많다. 한국어는 많은 걸 ‘먹음’으로써 해결한다. 나이도, 마음도, 수익도 먹는다. 물론 욕, 겁, 골탕도 먹는다. ‘가져야만’ 하는 서구식 사고와, 갖는 것으로는 모자라 직접 입으로 넣어 삼켜 소화까지 시켜야 후련한 한국식 정서를 비교해보면 두 문화권의 사고방식 차이가 더 선명해진다. 요즘은 어떤 분야를 ‘깊이 있게’ 보지 않고 겉핥기로 보는 행위를 ‘찍먹’이라 표현한다. 탕수육을 소스에 찍어 먹느냐 부어 먹느냐로 논란이 된 ‘찍먹’이 행위의 진지성을 논하는 언어로 사용되고 있다.

옥스퍼드 영어사전에까지 등록된 새로운 콘텐츠 장르인 먹방(mukbang)을 만들어낸 국가로서, 세상을 맛으로 표현하는 데 익숙한 우리는 점점 더 많은 영역에서 ‘맛’의 언어를 활용한다. ‘맛’은 가장 원시적이면서도 가장 동시대적 감각이다. 그 어느 때보다 ‘감각’과 ‘주관’이 중요해진 지금, 입과 혀로 세상을 감각하고 표현하는 ‘맛’의 언어가 활약하고 있다. ‘맛’의 진짜 강점은 폭넓은 ‘공감’을 이끈다는 데 있다. ‘민초파’와 ‘반민초파’가 ‘민초’ 맛에 대한 각기 다른 견해를 피력하며 그들만의 공감대를 형성하듯이 ‘맛’은 개개인의 ‘주관성’은 존중하되 쉽게 공감대를 이루는 ‘감각’의 언어로서 널리 사용된다.

그런 맛의 언어가 그릇과 식탁을 나와 더 많은 질감을 표현하기 시작했다. 콘텐츠의 재질이나 인생의 난이도를 표현하는 데도 맛의 언어는 적극적이다. ‘마라 맛 예능’. 혀가 알싸하게 아리지만 그 중독성에 취해 포기할 수 없는 매력을 ‘마라 맛’보다 함축적으로 드러내며 공감을 자아낼 수 있는 어휘가 있을까? ‘순한 맛 콘텐츠’의 ‘순한 맛’ 역시 마찬가지다. 좋은 채소를 오래 우린 채수처럼 속 편안히 계속 볼 수 있는 ‘순한 맛’은 도파민을 자극하는 마라 맛 과잉 트렌드 속 해독제로서 인기다.

마라 맛, 순한 맛처럼 극단적 맛 외에 독특한 개성을 표현하기 위한 맛의 언어도 눈길을 끈다. ‘에스파 신곡 쇠맛 가득해’. 이 문장을 보자마자 최근 컴백한 에스파의 노래를 들어본다. 이런 노래가, 이런 감성이 ‘쇠맛’일까? 어린 날 운동장에서 맛본 것 같은 그 쇠맛? 컴백 보도자료에서 ‘쇠맛이란 혀끝에 닿는 비릿하고 강렬함과, 미래지향적인 사이버 전사 이미지를 뜻함’이라 묘사한 쇠맛의 정확한 정의는 모르지만, 차갑고 낯설게 느껴지는 강렬한 맛이 그들이 추구하는 바라면 ‘쇠맛’은 확실히 공감각에 호소하며 ‘에스파’의 정체성을 또렷하게 만들어주는 언어다. 다른 어떤 어휘보다 ‘쇠맛’이 그들의 차별화 키워드임은 분명하다.

맛은 색처럼 ‘빛’의 스펙트럼 속 한 구간이 아니다. 맛은 화학적 반응과 감각 수용체의 작용에 의해 결정되며, 이 두 요소 모두를 필요로 하는 상호작용이 풍부한 감각이다. 그렇기 때문에 맛은 다른 어떤 감각보다 개성적이고 독보적인 영역이자 어휘의 소재다. 또렷한 색을 지닌 존재보다 나만 낼 수 있는 ‘맛’을 지닌 존재가 더 입체적이고 대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인공지능이 그림도, 글도, 영상도 만들어내는 지금, 나만 낼 수 있는 ‘맛’이 무엇인지 고민해보는 것이야말로 이 시대에 필요한 ‘정체성 탐구’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난 빨간 순두부찌개에서도, 맑은 복국에서도 자연스레 융화되지만 제 존재감을 단단히 드러내는 ‘두부 맛’을 추구하며 살아가고 싶다.

■정유라

[언어의 업데이트]맛깔나는 ‘맛’의 언어

2015년부터 빅데이터로 라이프스타일과 트렌드를 분석하는 일을 해오고 있다. <넥스트밸류>(공저), <말의 트렌드>(2022)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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