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이러니 수박에 빠져들 수밖에”

이다|일러스트레이터

과일 가게의 싱싱한 여름 일상

[이다의 도시관찰일기](7)“이러니 수박에 빠져들 수밖에”

여름이다. 본격적인 여름이 와버렸다. 이마와 양 겨드랑이에서 분수처럼 땀이 뿜어져 나온다. 내가 사는 집은 꼭대기 층이라 달궈지는 공기에 항복하고 일찍부터 에어컨을 켰다. 에어컨이 없는 공간으로는 한 발자국도 나가고 싶지 않다. 당연히 나의 산책도 올스톱됐다. 비슷한 생각인지 한여름 낮에 나가보면 길에 사람이 없다.

지하철 역사에 들어가면 그래도 살 만하다. 동네 어르신들이 얼마 없는 의자에 모여앉아 연신 부채를 부치고 있다. 그냥 지하철 역사에 의자를 100개 정도 갖다놓는 건 어떨까 하는 생각까지 든다(퇴근시간대에 난리가 나겠지?). 이런 와중에 젊은이들은 덥지도 않은지 긴소매에 긴바지를 입은 사람이 많이 보인다. 추운 계절에는 외투 안에 크롭트티셔츠나 반바지를 입고 다니더니 정작 여름이 되니까 아무도 반바지를 안 입는다. 민소매를 입고 그 위에 얇은 셔츠나 점퍼를 걸치고 통이 넓은 긴바지 차림에 운동화까지 신고 있다. 거기에 헤드폰까지 낀 사람들을 보면 감탄이 나온다. “아, 난 저렇게 죽어도 못해.”

“수박이 설탕보다 달아요” 흥겨운 외침
친근하게 ‘엄마’ ‘삼촌’이라며 손님맞이
주인아저씨가 골라준 수박 한 통이면
그렇게 싫던 여름도 살 만한 계절이 된다

워낙 더위를 많이 타는 편이라 여름이면 생존에 위협을 느낀다. 당연히 유행과 목숨 사이에서 목숨을 택할 수밖에 없다. 지하철에 타보면 반바지 입은 사람은 나밖에 없지만 나갈 때마다 꿋꿋하게 반바지를 입는다. “에취!” 얼마 안 지나 갑자기 재채기가 난다. 에어컨 바람에 땀이 점차 식으며 등골이 서늘해진다. 이제서야 긴소매, 긴바지를 입은 사람들이 조금 이해가 간다. 콜록콜록하는 소리가 곳곳에서 들려온다.

나는 여름이 싫다. 차라리 겨울이 낫다. 옷을 몇 겹이고 껴입으면 되니까. 겨울엔 벌레도 없다. 여름엔 조금만 방심하면 집 안에 날파리가 창궐하는데 말이다. 그래도 여름의 좋은 점을 억지로라도 생각해볼까? 여름은 해가 길다. 하루에 많은 일을 할 수 있다. 빨래도 잘 마른다. 아침에 한 빨래가 낮에는 다 말라 걷을 수 있다. 이불도 한나절이면 대강 마른다. 베란다에 있는 식물들도 쑥쑥 자란다. 겨울에는 식물등을 켜줘야 겨우 사는데 말이다.

아! 제일 좋은 게 생각났다. 여름은 모든 과일이 싸다. 앵두, 자두, 살구, 복숭아, 오디, 천도복숭아, 멜론 그리고 수박. 평소에 만원짜리 한 장을 들고 과일을 사러 가면 별로 살 게 없지만 여름에는 양손 두둑하게 돌아올 수 있다. 살구 한 바구니 5000원, 자두 한 바구니 5000원.

그중 제일은 역시 수박이다. 냉장고는 좁고 둘 곳도 없지만 그래도 수박을 먹지 않으면 여름을 제대로 보내는 것 같지가 않다. 아삭! 한 입 베어 물면 더위가 싹 가시는 그 맛. 인공적인 당분이 들어간 디저트와 달리 그저 깔끔하게 달고 시원하다. 물이 많아서 목이 촉촉해진다. 완벽한 여름의 맛이다. 이 세상에 그 어떤 빙수와 아이스크림도 이 맛과 식감을 흉내 낼 수 없다. 수박을 고를 땐 열심히 관찰한다. 수박 한 통은 보통 2만원 안팎이다. 가끔은 2만5000원이 넘기도 한다. 클수록 비싸지만 맛이 더 좋다. 그러니 절대 허투루 살 수 없다.

대형마트에서 파는 수박은 보통 담당하는 사람이 없다. 내가 알아서 골라야 한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라서 수박 무더기를 두고 각자 열심히 두들겨본다. 통통, 통통. 퉁퉁? 온 신경을 집중해 소리를 들어본다. 솔직히 백번 두들겨봤자 나는 잘 모른다. 하지만 왠지 두들겨야 할 것 같다. 두들겨보지도 않고 사면 뭔가 큰 손해를 볼 것 같다. 이건 고르는 방법이라기보다 일종의 미신적 행위라고 볼 수 있다. 이렇다 할 느낌이 안 와서 골랐던 수박을 내려놓는데 옆에서 유심히 보던 아저씨가 잽싸게 채간다. 입가에는 흐뭇한 미소까지 걸렸다. ‘이걸 내려놓다니! 역시 젊은 사람들은 뭘 몰라!’ 하는 표정이다. 그 아저씨가 들었을 땐 확실히 맛있는 수박의 소리였던 거다. 아쉽다. 인생 경험치가 모자란 것이 이럴 때 티가 난다.

빈손으로 마트에서 터벅터벅 나온다. 괜찮다. 사실 과일은 지하철역 근처 청과물가게에서 파는 것이 더 맛있다. 이런 가게들은 냉장고를 갖춰놓지 않는다. 새벽시장에서 그날 사온 것을 그날 파는 경우가 많다. 예쁘게 진열해놓지 않아도 사람들이 바글거린다. 나도 웬만하면 마트보다는 청과물가게에서 과일을 고른다. 인공지능이 절대 대체할 수 없을 개성적인 코멘트와 스토리텔링이 있기 때문이다.

[이다의 도시관찰일기](7)“이러니 수박에 빠져들 수밖에”

“자자, 수박이 만-팔천원! 완-전 달아요! 설탕보다 달아요, 설탕수박!!” 박수를 짝짝 치며 쩌렁쩌렁 외치는 소리가 흥겹다. 이들의 목소리는 대개 흥분으로 고조된 상태다. 당장 이 수박을 사지 않으면 인생에 엄청난 손해가 생길 것만 같은 기분이 드는 톤이다.

“엄마! 이리 와보셔!” 자기 엄마를 부르는 게 아니다. 청과물가게 직원들은 80대 이상의 머리가 하얗게 센 할머니들을 보통 ‘엄마’라고 부르며 반말을 한다. 마치 아들처럼 싹싹하고 친근하게 구는 모습이 전략적이다. “아, 달다니까? 엄마, 내가 맛없는 거 파는 거 봤어? 내가 다 먹어보고 사왔지! 지금 젤 싸니까 얼른 사가셔.” 재밌는 게 70대 이하 여성분들에겐 ‘어머니’라고 하고 존댓말을 쓴다. “어머니, 수박 들여가세요. 지금이 제일 싸요! 배달해드릴게.” 그 이하의 여성들은? ‘이모’라고 부르거나 아예 안 부른다. 얼마 없는 남성 손님을 부르는 호칭도 따로 있다. 누가 봐도 할아버지인 사람들은 ‘아부지’(아버지 아님)라고 부른다. 할아버지가 아닌 중년 남성들은 ‘사장님’이라고 하고, 젊은 남성들은 ‘삼촌’이라고 부른다. 그 아래는 남녀불문 다 ‘학생’이다.

나도 일단 수박을 열심히 두들겨본다. 이때 혼잣말을 곁들이면 좋다. “뭘 골라야 되나….” 이런 혼잣말은 반경 2m 안에서 스몰토크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특히 엄마뻘 여성분들은 쉽게 걸려든다. “이거 꼭지를 잘 봐요, 이렇게 꼭지가 길고 말라 있는 게 가지에 오래 달려 있었던 거야. 이런 게 맛있지.” 심지어 자기가 고른 수박을 주기도 한다! 물론 이런 일이 흔하지는 않다. 그들이 나서기 전에 먼저 나서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수박에 눈길을 주자마자 주인아저씨가 수박을 들어 올려 손바닥으로 퉁퉁 두들기며 추천을 해준다. 그럴 땐 꼭 물어본다. “이 수박 맛있어요?” 과일가게에 가서 이 과일 맛있냐니, 어이없는 소리로 들릴지도 모른다. 당연히 맛있다고 하겠지! 하지만 사람이 그렇지 않다. 사람들은 의외로 거짓말을 잘 못한다. 장사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능청스러워도 확신이 없는 걸 단번에 맛있다고 하긴 어렵다. 진짜 맛있으면 “내가 먹어봤어, (엄지손가락 내밀며) 진짜 이거야 이거” 하든가 “맛없으면 갖고 와요. 내 환불해줄게” 이런 격한 반응이 나온다. 한 번 더 치고 들어간다. “진짜 바꾸러 와요?” “아 진짜지, 안 그럼 내가 여기서 10년째 장사를 어떻게 해~”

그런데 자기가 생각해도 별로 맛이 없으면 즉답이 안 나온다. 대답을 약간 망설인다. “괜찮아요, 달달하고.” “요때 과일이 다 맛있죠, 뭐.” ‘진짜’와는 톤이 다르다. 목소리에 힘이 없고 끝맺음이 시원치 않다. 더 솔직한 사람은 “사실 그거보단 이게 맛있어요” 하고 차라리 약간 더 비싸도 진짜 맛있는 쪽을 추천해주기도 한다. 과일장사는 보통 단골장사이기 때문에 맛없는 걸 맛있다고 하고 팔았다가는 뒤끝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안다.

“그거 주세요.” 주인아저씨가 골라준 커다란 수박을 샀다. 가져가기 편하게 나일론 수박끈을 둘러준다. 이 가는 끈으로 과연 수박이 안전하게 고정이 될까 싶지만 몇십년간 애용되는 아이템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한 손으로 들다가 무거워서 수박을 가슴에 안았다. 사람들이 모세의 기적처럼 양쪽으로 갈라진다. 혹시나 저 수박이 자기 때문에 깨지기라도 할까봐 걱정되는 모양이다.

버스를 타고 가는 중에는 갑자기 손이 미끄러져 수박이 ‘퍽!’ 하고 깨지는 상상을 한다.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자리에 앉아 소중한 수박을 두 손으로 단단히 감싸안는다.

수박을 사오면 같이 사는 친구 모호연의 현란한 해체쇼가 벌어진다. 평소 공구를 다루는 사람이라 칼을 쓰는 폼이 다르다. 칼을 숫돌에 삭삭 간 다음 수박에 칼을 넣는다. ‘쩌억!’ 갈라지는 소리를 들으니 맛있는 수박이 맞다! 일단 반으로 가르고, 4등분을 낸 다음 빨간 부분 아래로 칼을 넣어 껍질과 분리한 뒤 과육을 먹기 좋게 사각으로 자른다. 그런 다음 커다란 밀폐용기에 차곡차곡 쌓는다. 이렇게 하면 먹기도 편한데 맛도 더 좋다. 수박은 부위마다 당도가 다른데, 이렇게 넣어두면 모든 부위가 달아지는 기분이다.

“맛있다….” 수박을 들고 오느라 뻘뻘 흘린 땀이 사악 식는다. 이제 막 틀어놓은 에어컨이 계곡 바람처럼 언뜻언뜻 시원한 바람을 낸다. 달콤하고 시원한 맛을 음미하며 상상해본다. 지금 나는 빌라의 꼭대기층이 아니라 물이 콸콸 쏟아지는 시원한 폭포 아래에 있다. 다른 계절에도 수박이 나오지만 한여름이 아니면 마치 주변 공기를 바꾸는 듯한 이 기분을 경험할 수 없다. 그러니 단호하게 말할 수밖에. 수박은 여름에 먹어야 제맛이고, 수박이 있어서 여름은 살 만한 계절이다.



[이다의 도시관찰일기](7)“이러니 수박에 빠져들 수밖에”

▲이다|일러스트레이터. 저서로는 <이다의 자연관찰일기> <내 손으로 치앙마이><걸스토크> 등이 있다. 그림으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보는 것이 소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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