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울이 울리면 ‘발굴 탐험’이 시작된다

이다|일러스트레이터

(9)[오래된 가게]를 여행하다

[이다의 도시관찰일기]방울이 울리면  ‘발굴 탐험’이 시작된다

코팅이 다 벗겨진 간판, 녹슨 셔터, 덕지덕지 붙은 안내문, 잘 들여다보이지 않는 뿌연 유리창, 가게 밖에 쌓여 있는 노랗게 색이 바랜 물건들, 수많은 사람이 밟아 무늬조차 없어져 버린 현관 발매트.

나는 오래된 가게를 좋아한다. 그중에서도 제일 좋아하는 것은 오래된 문구점이다. 언제 어디서든 오래된 문구점을 보면 당장에라도 뛰쳐들어가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아니면 어릴 때처럼 창문에 찰싹 달라붙어 뭐가 있는지 구경이라도 하고 싶다. 오늘도 은평구에 있는 한 문구점 앞에서 본능적으로 발을 멈췄다. 하지만 오래된 가게에 들어가는 것은 다소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 시간도 충분해야 하고, 현금도 있으면 좋다. 던전을 공략하는 헌터가 빈손으로 불쑥 입장할 수 없는 것과 비슷하다.

던전 공략하는 헌터의 마음으로 유리문 하나 넘으면
묵은 종이 냄새와 약간의 곰팡내가 반겨주는 ‘오래된 문구점’
타이태닉 엽서·연필·‘유물급’ 자료집…구경에 1시간 훌쩍
남은 건 먼지로 까매진 양손과 오늘의 전리품 ‘90년대 디자인 카드’

그도 그럴 것이 오래된 가게는 사실 주인의 집이나 마찬가지다. 주인은 그 가게와 함께 살아왔다. 그 영역은 온전히 그만의 것이다. 높이 쌓인 물건들이 그를 에워싸고 있어 마치 성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아무 생각 없이 불쑥 들어갈 수 있는 다이소나 대형마트와는 다르다. 거기에는 자아가 있는 ‘가게 주인’이 없다. 물론 소유주는 있겠지만, 계산대 앞에 선풍기를 틀고 앉아 트로트 프로그램을 보고 있지는 않다. 마트에서는 누구나, 얼마든지, 무엇이든 봐도 된다. 30분 동안 구경만 해도 좋고, 물건을 들어 올렸다 놨다 해도 나무랄 사람이 없다.

물론 그런 쇼핑도 즐겁다. 하지만 오래된 가게에는 예측할 수 없는 스릴과 재미가 있다. 30년 된 헬로키티 수첩이라든가, 80년대에 나온 냄비 받침이라든가, 2002년 월드컵 로고가 새겨진 빛바랜 부채라든가. 그것을 들여놓은 주인조차도 잊어버린 물건들과 만날 수 있다.

그러나 들어가기는 쉽지 않다. 보통 오래된 가게의 주인들은 낯선 사람이 자기 가게에서 오래 머무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특히 목적 없이 서성이는 것을 제일 싫어한다. 그냥 구경한다고 말하면 여기에 볼 게 뭐가 있냐고 되묻는다. 다 큰 어른이 문구점에서 지우개나 만지작거렸다가는 의심의 눈초리를 받을 것이 뻔하다.

이해도 간다. 아무리 손님이라도 주인 입장에서는 자기 공간을 침범한 낯선 사람이다. 본능적으로 경계심이 생길 수밖에 없다. 또 오래되고 낡은 자기 가게를 부끄러워하는 주인들도 많다. 아무래도 물건 장사는 깔끔하게 하기 쉽지 않다. 공간은 한정되어 있는데 손님들은 계속 새로운 물건을 찾는다. 그러다 보면 재고가 쌓인다. 지난번에 온 물건을 다 팔지도 못했는데 또 새 물건을 들여야 한다. 그렇게 쌓인 물건이 시대의 지층을 이루고 점차 먼지가 쌓인다. 언제 한번 날 잡고 싸악 정리하고 싶지만, 매일 가게를 열다 보면 생각처럼 안 된다. 그런 상태에서 낯선 사람이 구경을 한다고 눈을 반짝이고 있으면 나라도 부담스러울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에 붙들린 채 오늘의 출전지인 대흥문구에 들어가지 못하고 바깥을 서성인 지 5분. 들어가면 어떻게 될지 미리 상상해본다. 주인은 다소 당황할 것이다. 동네 장사는 늘 오던 사람들만 오고 연령대도 정해져 있다. 처음 보는 애매한 나이대의 여성이 나타나면 주인은 어정쩡한 미소를 짓거나 조금 긴장한 얼굴로 “뭐 찾으시는 거 있으세요?”하고 물어볼 것이다. 이건 사실 필요한 것을 찾아서 빨리 나가라는 말이나 마찬가지다. “찾는 거요? 바로 이곳입니다”라고 말하고 싶은 충동을 참아야 한다. 그럴 때를 대비해서 나는 훌륭한 답변을 미리 준비해뒀다. “카드나 엽서 있어요?”

그 어떤 문구점에도 카드나 엽서는 있다. 그리고 카드를 사는 행위는 누가 해도 이상하지 않다. 주인은 안심하고 카드가 있는 방향을 가리킬 것이다. 그럼 나는 카드를 고르면서 주변을 스캔하면 된다. 카드를 다 골랐다 싶으면 “구경 좀 더 할게요”라고 한다. 그러면 주인은 안심하고 다시 텔레비전에 집중할 것이다. 본격적인 탐험은 그때부터 시작이다!

오케이. 각본은 완성됐다. 이제 대흥문구라는 던전 안으로 들어가는 일만 남았다. 오래된 문구점에 들어갈 때면 좀 ‘오버’를 보태서 인천공항에서 여권을 들고 출국 수속을 하는 것 같은 기분마저 느낀다. 그렇다. 나에게 이건 작은 여행이다. 유리문 하나만 넘으면 어떤 사람이 오랫동안 만들어 놓은 세계에 들어갈 수 있다.

챠라랑-.

문을 열자 문 위에 붙어 있는 벨이 금속성의 소리를 낸다. 이거지. 이게 있을 줄 알았어. 들어가자마자 묵은 종이 냄새와 약간의 곰팡내를 느낀다.

짐작은 했지만 상상 이상이다. 가게가 한눈에 다 파악이 안 될 정도로 넓다. 그 공간에 물건이 산더미같이 쌓여 있다. 천장까지 빼곡히 올라간 책장이 공간의 구획을 나눈다. 통로 중간에도 양쪽으로 박스들이 빽빽하게 놓여 있어 복도가 좁다. 바닥에 놓인 박스들은 오픈되어 있고 그 안에 캐릭터 파우치며 필통 같은 것이 가득 들었다. 진열장 옆쪽에도 못을 박아 스티커며, 카드를 주렁주렁 몇겹이나 걸쳐놨다. 조명은 그리 밝지 않고 형광등 한 개는 깜빡이고 있다.

“어서 오세요-.”

카운터에 있는 주인아저씨는 무심하게 핸드폰을 보고 있을 뿐 나에게 관심이 없다. 행운이다! 하지만 대비하는 의미로 미리 물어보기로 한다.

[이다의 도시관찰일기]방울이 울리면  ‘발굴 탐험’이 시작된다

“카드나 엽서 있어요?”

아저씨가 가리킨 방향으로 가본다. 가자마자 카드의 양에 충격을 받는다. 보통 카드는 칸이 나뉜 투명한 비닐에 칸칸이 들어 있다. 이걸 걸어서 진열해 놓는다. 새로운 물건이 들어오면 그 위에 건다. 그래서 문구점에 가보면 보통 서너 겹 정도 카드 걸개가 겹쳐져 있다. 그런데 여기는 15개도 넘게 겹쳐 걸려 있다. 나약한 고리는 불어난 양을 감당하지 못하고 아슬아슬, 내가 손을 잘못 대면 금방이라도 끊어져 버릴 것 같다. 그런 뭉텅이가 대여섯 개 있다. 그것도 유행이 한참 지난 것이 잔뜩이다.

뽀샤시한 배경, 안개꽃에 둘러싸인 장미꽃, 그리고 ‘for you…’가 적힌 촌스러운 디자인. 90년대에 유행하던 디자인이다. 이제 이런 건 돈 주고 사려고 해도 살 수 없다. 그렇다고 인터넷이나 박물관에서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 이런 애매한 시기의 물건들이다.

아직까지 사람들이 가치를 두지 않아서 가격은 싸지만 나는 그것의 아름다움을 알고 있는 것들 말이다. 이럴 때는 마치 유적을 발굴하는 듯 신성한 마음이 된다. 그래, 난 단순한 호기심 변태가 아니라 일종의 고고학자다!

어릴 때도 나는 문구점을 정말 좋아했다. 살 게 없어도 하교할 땐 무조건 들러서 봐야 했다. 펜꽂이에 가득 꽂힌 펜을 괜히 꺼내 보고, 끝에 달린 구슬을 손으로 만져봤다. 지우개는 왜 이렇게 귀여운 것들이 많은지! 고양이 모양, 옥수수 모양,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모양은 아동용 지우개로 만들어진다. 이런 지우개는 잘 지워지지 않고 가끔 색소를 종이에 남기기도 하지만 그래도 괜히 한번 만져본다. “안 살 거면 만지지 마레이.” 수없이 들었던 주인아줌마의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쟁쟁하다.

마침 가게에 틀어 놓은 라디오에서 90년대 가요가 흘러나오고 있다. “나는 매일 학교 가는 버스 안에서 항상 같은 자리 앉아 있는 그녈 보곤 해.” 이럴 수가. 완벽하다. 나는 어느새 어린아이로 되돌아간다. 대체 언제부터 놓여 있었는지 짐작도 안 가는 엽서 더미에서 무려 <타이태닉> 엽서를 발견했다. 그 옆에 배우 이승연씨의 엽서도 있다. 모닝글로리에서 나온 엽서에는 ‘우리 선생님 별명은 에이즈, 걸리면 죽으니까!’라는 꺼림칙한 그 시절 유머가 쓰여 있다. 나비 한 마리를 그대로 코팅해버린 엽서는 차마 집어 올릴 수도 없다.

고고학자의 마음으로 한 칸 한 칸 탐색한다. 즐겁다. 봐도 봐도 끝이 없다. 올려도 올려도 새 영상이 나오는 유튜브 쇼츠를 보는 느낌이다. 연필 코너에서는 아무리 봐도 80년대 전에 만들어진 연필까지 발견했다. 요즘같이 연필에 인쇄된 게 아니라, 스텐실 기법으로 그림을 찍었다. 와, 이건 진짜 내가 보존해야지(이렇게 사들인 물건이 10t이다).

지하 공간으로 내려가 본다. 입구부터 천장까지 종이 뭉텅이들이 쌓여 있다. 서늘한 공기에 무언가 튀어나올 것 같은 스릴이 더해진다. 구석에서 놀라운 것을 발견했다. 각종 학습에 필요한 사진을 오려쓸 수 있는 자료집이다. 딱 봐도 30년은 되어 보인다. 종이는 아주 얇고, 인쇄상태도 조악하다. <서울 600년 역사>라는 것을 들춰 보니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 1층에 있는 경천사 10층 석탑이 경복궁에 있을 때의 사진이 실려 있다! 그 옆에는 구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 사진이 있다. 자료집은 농경, 관혼상제, 농기구, 정보통신, 관공서, 환경오염 등 주제도 다양하다(심지어 ‘반공’도 있다). 가격은 모두 1500원. 지금같이 이미지가 흔하지 않았던 시절에는 이것을 오려 수업자료로 썼던 것 같다. 이건 당연히 사야 한다. 시의성 있는 <서울특별시>와 <서울 600년 역사>를 챙겼다.

시계를 보니 들어온 지 벌써 1시간이나 지났다. 라디오에서는 룰라의 ‘날개 잃은 천사’가 흘러나온다. 슬슬 배가 고프다. 그래, 이만하면 됐다. 계산대로 가니 주인아저씨가 늘 있던 일처럼 덤덤하게 계산을 해준다. 오래된 물건이 엄청 많다며 나름의 칭찬을 건넸더니 “날 잡고 싹 버려야 하는데”라는 대답을 들려준다. 휴, 역시 오늘 와서 발굴(?)하길 잘했다.

문을 닫고 가게를 나온다. 챠랑-하는 방울 소리가 나를 배웅한다. 어느새 양손은 먼지로 새까매져 있다. 오늘 입은 하얀 바지에도 여기저기 때가 묻었다. 하지만 괜찮다. 발굴 여행을 다녀온 건데 당연하지. 지도 앱을 꺼내 대흥문구에 별표를 찍어둔다. 이제 나는 언제든, 이곳으로 짧은 여행을 떠날 수 있다.

▲이다|일러스트레이터
저서로는 <이다의 자연관찰일기> <내 손으로 치앙마이><걸스토크><내 손으로, 시베리아 횡단열차> 등이 있다. 그림으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보는 것이 소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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