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 공간과 이웃들, 도시를 만드는 그 사람들

허남설 기자

(9) 빈틈의 확장…서울 성수동 ‘도만사’

‘북성수’라고도 불리는 서울 성동구 성수동2가에 있는 ‘도시를 만드는 사람들’. 50년쯤 된 상가 1층 점포를 빌린 이곳에선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전시회·음악회가 열린다.  도시를 만드는  사람들 제공

‘북성수’라고도 불리는 서울 성동구 성수동2가에 있는 ‘도시를 만드는 사람들’. 50년쯤 된 상가 1층 점포를 빌린 이곳에선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전시회·음악회가 열린다. 도시를 만드는 사람들 제공

서울 성수동2가 299-129번지, 50년쯤 된 상가 1층 점포. 이곳에 그 할머니들이 들이닥친 때는 지난해 여름이었다. ‘도시 이곳저곳을 여행하는 병풍’을 상상하는 전시회가 열린 날. 할머니들은 여기에서 전을 부치고 송편을 빚었다. 음, 이건 대관절 무슨 퍼포먼스일까? 전시를 보러 온 사람들이 입구에서 어리둥절. 어떤 외국인 관람객은 엉겁결에 할머니들이 건넨 찐 감자를 받아 먹었다. 그날 이후 할머니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이곳을 점거하고 또 점거했다. ‘병풍의 여행’이란 콘셉트와 어울리게 전시공간에 커다란 평상을 두고 문을 활짝 열어둔 게 좋은 핑계가 됐다. 무릇 평상이란 원래 그렇게 쓰는 물건이니까. 누구도 할 말이 없는 광경. 할머니들은 그해 여름을 그렇게 ‘도시를 만드는 사람들’에서 보냈다.

[허남설 기자의 집동네땅]열린 공간과 이웃들, 도시를 만드는 그 사람들

문 활짝 열어두고 커다란 평상 설치하니 삼삼오오 모인 동네 할머니들
‘주차장 쉼터’에선 아이들과 즐기기도…내일 성수아트홀에서도 다 같이 놀아요

도시를 만드는 사람들, 줄여서 ‘도만사’라 하는 이곳의 주인장은 근처 건축사사무소에서 일하는 조영하씨. 그가 이 점포를 임차했을 때는 2020년 2월이었다. 사정을 대략 듣자 하니, 시작에 어떤 치밀한 밑그림이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늘 지나는 길에서 우연히 임대 광고를 본 게 전부. 원래 있던 이발소가 하루아침에 자리를 떴다고 들었다. 조영하씨는 우리가 사는 도시의 일을 행정가, 도시계획가, 건축가 등 전문가 몇몇이 결정하는 데 늘 의구심을 품던 차였다. 그래서 “조금 자유롭게, 분야와 계층과 성별과 나이에 상관없이 다양한 사람들이 같이 만들어가는 공간”을 상상했다. 이름도 그런 의미를 담아 지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무섭게 창궐하기 시작한 무렵의 일. 집합 금지의 시대에 집합을 꿈꾸는 공간을 연 셈이다.

도만사는 ‘북성수’라 불리는 동네에 있다. 우리가 아는 ‘힙’한 성수동은 ‘남성수’. 북성수는 거기서 북쪽, 지하철 2호선 고가철로 밑을 지나면 만나는 지역이다. 원래 공장지대였던 성수동의 시간은 철로를 경계로 다르게 흐른다. 남성수는 서울에서 얼마 안 남은 공단의 이질적 풍경 속에서 먹고 마시는 거리로 빠르게 진화했다. 북성수에선 여전히 골목마다 지게차가 누비고, 날카로운 쇳소리가 들린다. 요즘은 ‘지식산업센터’라고 불리는 아파트형 공장과 진짜 공장, 진짜 아파트가 뒤섞여 정체성을 알 수 없게 됐다. 그 틈바구니에서 난데없이 정겨운 단독주택 골목을 만나기도 한다. 유난히 이런 풍경에 자극받는 부류가 있는데, 그 애매한 복잡성·모호성 속의 빈틈을 비집고 들어가 그 일원이 되는 걸 즐긴다.

하지만 어느 동네에서든 무리에 낀다는 건 생각보다 꽤 어렵다. 어딜 가나 터줏대감이 있고, 그들에게 인정받는 게 중요한 문제가 된다. 북성수의 터줏대감은 그 문제적 할머니들이었다. 동네 슈퍼마켓의 영업과는 아무 관계도 없지만 어쨌든 그 앞 평상에 매일같이 모이는 그런 할머니들. 그들의 눈에 도만사는 어느 날 갑자기 출현한 이상한 존재였던 모양이다. 도만사에서는 누구나 그냥 볼 수 있는 전시회·음악회가 종종 열렸는데, 이렇게 ‘열린 공간’을 만든답시고 밤새 전등을 켜놓자 할머니들은 “너희는 왜 이렇게 돈을 낭비하느냐”고 타박하곤 했다. 그땐 몰랐던 사실이 언젠가 슈퍼마켓이 편의점으로 바뀌고 평상이 사라지면서 드러났다. 실은 이 할머니들이 그 누구보다 도시의 빈틈, 열린 공간, 커뮤니티를 갈구했다는 거다. 전시회를 끝내야 하는데 할머니들은 점거를 풀지 않았고, 심지어 동네 유지를 하나씩 불러 들들 볶았다. “난 이런 데 필요해. 이거 치우지 말든가 새로 하나 좀 만들어주든가.” 그해 여름 할머니들의 도만사 점거 사건은 겨우 끝났다.

지난해 9월 서울 송정동 ‘우리동네 리어카’ 주변에 아이들이 모여든 모습. 도시를 만드는  사람들 제공

지난해 9월 서울 송정동 ‘우리동네 리어카’ 주변에 아이들이 모여든 모습. 도시를 만드는 사람들 제공

이 사건은 우연히 일어난 것처럼 보였지만, 조영하씨는 사실 내내 바라던 것이라고 했다. “도만사가 ‘커뮤니티다움’을 추구했는데, 그게 오랜 시간이 지나고서야 조금 뭔가 실현된 것 같았어요.” 커뮤니티, 분야와 계층과 성별과 나이에 상관없이 다양한 사람들이 뭔가 같이 만들어가는 공간. ‘그게 대체 뭔데?’라며 냉소적으로 반문할 사람들에게 할 말이 생겼다. ‘도시를 만드는 사람들’이 만들고자 하는 도시는 이런 모습이라고.

도만사가 하는 일은 낯설어 보일 수 있다. 굳이 계보를 찾자면 해외에 좀 있는데, 가장 널리 알려진 건 미국 뉴욕의 비영리 단체 ‘스트리트 랩(Street Lab)’이다. 이름에 걸맞게 거리를 하루아침에 거대한 어린이 놀이터나 도서관으로 바꿔버리는 실험을 한다. 이들의 작업은 자동차가 지배했던 공간이 어떻게 아이들에게 안전한 공간으로 바뀌는지, 늘 지나치기 바빴던 이웃들이 어떻게 머물며 서로 사귀는지 보여준다. 이런 식의 활동을 보통 ‘태티컬 어바니즘(Tactical Urbanism)’ 혹은 ‘게릴라 어바니즘’이라 부르는데, 그냥 무단 점거하는 행위가 아니라 그쪽에서는 기업, 지방자치단체, 주변 상권, 주민 조직이 함께 기획하고 실행하는 일종의 거버넌스로 정착돼 있다. 이들이 모두 ‘도시를 만드는 사람들’인 셈이다. 그래서 통틀어 ‘참여형 어바니즘’이라고도 한다. 참여의 수준은 다양할 수 있는데, 프랑스에서 활동하는 공공디자인 협동조합 캬바농 벡티칼(Cabanon Vertical)은 진짜 다 같이 ‘만든다’. 공공시설물을 제작하면서 그 동네 10대 청소년들을 시공에 참여시키는 것이다. 도시가 뭐 별건가. 이렇게 사람의 손이 닿은 구조물, 사람들이 머문 장소 하나하나가 모여 도시를 이룬다. 결국 도시를 만드는 건 사람들이다.

지난 5월 서울 성수동에서 시도한 ‘파클릿’. 주차장에서 할머니들은 전을 부쳤고, 아이들은 게임을 했다. 도시를 만드는  사람들 제공

지난 5월 서울 성수동에서 시도한 ‘파클릿’. 주차장에서 할머니들은 전을 부쳤고, 아이들은 게임을 했다. 도시를 만드는 사람들 제공

도만사도 거리로 나서곤 한다. 지난해 가을, 성동구 송정동 뚝방길 옆 골목에 ‘우리 동네 리어카’를 펼친 적 있다. 한마디로 1t 트럭을 개조해 만든 ‘트랜스포머’다. 이 리어카가 멈춰선 장소는 소극장이 될 수도 있고, 도서관이나 교실이 될 수도 있다. 길을 지나가다 보면 그 낯선 생김새만으로 호기심을 자아낸다. 절대불변 용도를 타고난 공간은 없다. 장소의 성격은 바뀔 수 있다. 지난봄, 북성수 골목에서 ‘파클릿(parklet·주차장을 점유해 일시적으로 작은 공원·쉼터로 바꾸는 행위)’을 시도했을 때는 도만사를 점거했던 할머니들이 달라진 공간의 가능성을 즉각 알아챘던 모양이다. “얼른 파하고 부추 좀 사 와. 여기서 전 부쳐 먹게.” 한쪽에선 기름이 지글지글 끓고, 다른 쪽에선 동네 아이들이 보드게임에 열을 올렸다. 차가 있거나 없거나, 주차장일 때 딱 두 개뿐이던 경우의 수는 얼마나 더 확장될 수 있을까?

도만사의 실험은 계속된다. 이 도시에는 북성수의 할머니들처럼 평상 같은 공간을 갈망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을까? 도만사는 직접 구석구석 다녀보기로 했다. 주택가 골목, 주차장, 공원 등 주변에 한번 잘 살려 하루 신나게 놀고 싶은 장소가 있다면 도만사에 신청하면 된다. 움직이는 서가, 움직이는 놀이터인 ‘우리 동네 리어카’가 항시 대기 중이니까. 이른바 ‘열린 도시 프로젝트: 도시팝’, 그 첫 나들이 장소는 오는 7일과 14일 성수아트홀 앞. 여기는 북성수가 아니라 MZ들이 많이 다닌다는 남성수다. 이날만큼은 이 거리에서 어린이들이 읽고, 그리고, 노래를 따라부르는 모습을 보게 될 것 같다. 성수동이 요즘 팝업으로 매일같이 난리라는데, 이런 팝업 하나쯤은 있어도 괜찮겠지 싶다. 할머니도, 청년도, 아이도 알고 보면 모두 ‘도시를 만드는 사람들’이다.

허남설 기자

허남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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