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담의 말에 업데이트는 있는가?
명절을 맞아 사거리마다 걸린 현수막을 유심히 들여다보니 현수막에 붙어 있는 얼굴들은 다 다른데 문구는 모두 같았다. 도지사도, 부지사도, 시의원도 입 모아 ‘행복하고 풍성한 한가위 보내세요’라고 인사를 건넨다. 나 역시 다르지 않다. 1년에 딱 한 번 쓰는 말이라서, 많은 사람에게 매번 새로운 말을 지을 여유가 없어서 고민을 유예하다 보니 결국 또 같은 말을 되풀이한다.
덕담은 그 시대와 사회가 중요시하는 가치를 담는다. ‘부자 되시라’, ‘건강하시라’, ‘평안하시라’ 말을 덧붙일 때도 있으나 언제나처럼 한가위에는 풍성함을, 크리스마스에는 축복을, 새해에는 복을 적는다. 말은 시대에 맞춰 진화하고 분화하는데, 덕담과 안부 인사가 나누고자 하는 ‘행복’과 ‘풍성’이 여전히 지금 이 시대에 맞는 지향점일까? 명절 덕담은 더 이상 발전할 수 없는 완성형 문장일까?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의 행복을 바라는 그 자체로 충분히 귀하다고 생각을 게을리하기엔 ‘덕담’이라는 말과 행위가 참 값지다. 관성적이고 뻔한 말로 흘려보내고 싶지 않다.
명절의 덕담이 행복과 건강, 대박과 부자에 머물러 있는 동안 스스로를 격려하는 셀프 덕담의 말은 풍성해졌다. 특별한 날이 아닌 일상에서, 남이 아닌 나에게 외치는 긍정 주문으로서 덕담이 업데이트되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주문 ‘행집욕부’는 인플루언서 ‘셍이’가 스스로를 격려하고자 “행복에 집중해! 욕심부리지 마! 행집욕부!”라고 박수를 치며 기합을 외친 릴스 영상의 흥행으로 시작되었다(현시점 조회수 850만). 이 주문에 영감을 받은 다양한 긍정 주문들이 계속 생겨나는 것을 보면, 이 주문은 본인만이 아니라 세상을 ‘행복’에 집중시켰다. ‘어할즐하’, ‘하해안어’, ‘운건건행’. 사자성어 같기도, 외계어 같기도 한 이 말들은 모두 긍정적 자기암시를 위한 줄임말이다. ‘어차피 할 거 즐겁게 하자’, ‘하기 싫어도 해야지 안 하면 어쩔 거야’, ‘운동해야 건강하고 건강해야 행복하지’처럼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인정하되, 자신의 에너지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전환하는 신조 덕담이다.
이 긍정적 주문이 20대 사이에서 인기라는 점은 반갑고도 어색하다. 기후 공포, 양극화, 실업률 등 사회면과 경제면은 부정적 기운이 가득한데도 그들은 현실에 맞서 자신의 ‘심리면’을 긍정으로 무장한다. 나날이 거칠어지는 세상을 향해 자꾸 긍정의 기합을 넣는다. 불안이 깊어지는데 긍정을 무기로 꺼내 든다. 요행을 바라는 대신 태도를 전환하며 스스로 자신이 행복을 구한다. 별수 없다. 나도 함께 긍정을 꺼내 내 행복을 구할 수밖에. 어떤 상황이든 자신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줄 것이라는 관점의 ‘원영적 사고’에 사람들이 감화받았던 것처럼, 우리는 여전히 긍정을 택한 사람들에게 마음을 쏟는다.
자신의 의무를 다하고 주어진 환경 속에서 최대의 행복에 집중하고자 희망의 주문을 외치는 사람들이 우리 곁에 있다. 기합을 외치며 스스로를 북돋는 목소리가 커지면 나같이 불안 속에 떨고 있던 사람들도 용기를 얻는다. 포기하려다가도 그냥 한다. 스스로를 위해 외치는 주문인데, 그 주문이 추운 겨울의 캐럴처럼 울려 퍼져 덕담이 된다. 그 주문을 들을 때마다 마음에 예쁜 알전구가 반짝인다. 그리고 어느새 나도 외친다. 욕심부리지 말고, 그냥 하자고. 행복에 집중하자고.
■정유라
2015년부터 빅데이터로 라이프스타일과 트렌드를 분석하는 일을 해오고 있다. <넥스트밸류>(공저), <말의 트렌드>(2022)를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