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하지 않을 거면 뭐 하러 술을 마셔?”
예상한 바였다. 저녁 식사 자리에서 논알코올 맥주를 주문한 나에게 친구의 질문이 날아든 건. 하지만 일반 맥주만큼 맛있으면서 술자리 분위기도 즐길 수 있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무엇보다 건강과 웰빙에 대한 젊은 세대의 관심이 커지며 논알코올 주류를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졌다. 논알코올은 현재 전 세계 주류시장에서 가장 뜨겁게 떠오르는 키워드다.
헤지펀드 트레이더가 만든 논알코올 맥주,
미국 맥주시장을 뒤흔들다
대학 시절 미식축구 선수였던 빌 슈펠트는 매일 아침 5시 반에 일어나 운동하고 6시 반까지 사무실로 출근하는 헤지펀드 트레이더였다. 업무 강도가 높기로 유명한 미국 금융투자업계에서 언제나 ‘평균 이상’의 성과를 내던 그는 일주일에 5~6일 술을 마셨다. 주중엔 일과 관련된 비즈니스 식사, 주말엔 바비큐 파티와 결혼식 등 지인들과 모임에서였다. 슈펠트는 언제부터인가 술이 그의 ‘고성능 라이프’에서 유일하게 일관성 없는 요소이며, 그가 하는 일들이 술에 방해받고 있음을 깨닫는다. 그래서 그는 술을 끊었다.
술을 끊은 후 슈펠트는 몇가지 사실을 더 발견하게 된다. 저녁 식사와 모임 자리에서 논알코올 맥주를 주문하는 것은 매우 불편한 일이라는 것, 그리고 웨이터가 냉장고 뒤에서 꺼낸 먼지투성이의 오래된 논알코올 맥주들은 대부분 맛이 없다는 것이었다. “논알코올 맥주를 주문하는 순간 식당의 음악이 멈춘 것 같았어요. 맛을 보고 난 뒤에는 왜 사람들이 논알코올 맥주를 마시지 않는지 알게 됐죠.”
2014년 아내와 함께 나간 저녁 식사 자리에서 맛없는 논알코올 맥주에 대해 불평하던 그는 ‘사람들이 기꺼이 마시고 싶어 할 새로운 종류의 논알코올 맥주’를 직접 만들기로 마음먹는다. 그리고 2년 동안 사업계획서를 쓰고 자신과 일할 양조 전문가를 찾아 나선 끝에 2017년 양조업자 존 워커와 함께 논알코올 맥주 브랜드 ‘애슬레틱 브루잉 컴퍼니(Athletic Brewing Company)’를 차리게 된다. 120번의 투자 미팅, 200여명의 양조사에게 거절당한 후였다.
사람들은 그가 만든 논알코올 맥주를 좋아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애슬레틱 브루잉은 ‘대박’이 났다. 슈펠트와 워커는 홉 향이 풍부한 IPA를 비롯해 맛이 진한 에일과 포터 맥주 등 수제 맥주의 맛과 풍미를 갖추면서도 알코올 함유량이 0.5% 이하인 맥주를 만드는 데 성공했고 시장에 돌풍을 일으켰다. 맥주산업 컨설팅회사인 범프 윌리엄스에 따르면 애슬레틱 브루잉은 지난해 미국 논알코올 맥주 시장에서 20% 가까운 점유율로 1위를 차지했으며, 올 초에는 미국의 식료품점 체인인 홀푸드마켓에서 하이네켄과 버드와이저 등 업계 전통 강자들을 제치고 가장 많이 팔리는 맥주에 등극했다.
정체된 맥주시장에서 ‘논알코올’ 나 홀로 성장
애슬레틱 브루잉은 지난해 9000만달러(약 1244억원)의 매출을 올리며 설립 6년 만에 기록적인 성과를 거둔다. 기네스, 하이네켄 등 대형 주류회사들이 더 건강한 맥주 옵션을 만드는 데 돈을 쏟아붓고 있는 상황에서 말이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이 회사의 성공 배경으로 뛰어난 양조 기술과 영리한 마케팅, 그리고 젊은층의 알코올 소비 감소를 꼽았다. 최근 갤럽 조사에 따르면 미국의 34세 미만 성인 중 술을 마시는 비율은 62%로 10년 전 72%에 비해 10%포인트 떨어진 것으로 나타났다. 젊은층의 주류 소비 감소가 논알코올 맥주 시장 성장에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다. 실제 미국 식료품점과 편의점, 주류 매장에서 논알코올 맥주 판매는 2019년 이후 거의 3배 증가했으며, 지난해 전체 맥주 판매 성장률이 1% 수준에 머문 데 비해 논알코올 맥주 판매는 35% 늘었다.
논알코올 맥주의 인기는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 주요 맥주 소비국에서 공통으로 나타나고 있는 현상이다. ‘맥주의 나라’ 독일에서는 해마다 맥주 소비량이 줄어들고 있는 가운데 지난해 논알코올과 무알코올 맥주 시장 점유율이 7%에 달했다. 홀거 아이헬레 독일양조장협회 대표가 “맥주업계에서 최근 10년간 이만큼 성장한 분야는 없었다”고 언급했을 정도. 조만간 독일에서 만드는 맥주 10병 중 1병은 논알코올 맥주가 될 것이라는 게 독일 맥주업계의 전망이다.
무슬림 인구 비중이 높은 중동, 전채요리인 타파스에 무알코올 와인이나 음료를 곁들이는 스페인, 맥주를 음료처럼 즐기는 일본도 논알코올·무알코올 시장이 빠른 속도로 성장 중이다.
우리도 예외는 아니다. 글로벌 시장조사업체 유로모니터에 따르면 국내 맥주시장에서 논알코올 맥주 판매액은 2016년 처음으로 100억원대를 돌파한 뒤 올해 600억원을 넘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지난 5월 주류 면허법 시행령 개정으로 그동안 가정용에 국한됐던 논알코올 주류가 식당·유흥주점에서도 판매가 가능해지며 올여름 국내 맥주시장은 논알코올 맥주들의 격전지가 됐다. 오비맥주, 하이트진로, 롯데칠성 등 대형 주류 3사를 비롯해 제주맥주와 세븐브로이 등 수제 맥주 업체들도 속속 논알코올 라인업을 강화하는 중이다. 업계는 내년까지 국내 논알코올 맥주 시장 규모가 2000억원 수준으로 팽창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술보다 분위기에 취할래, Z세대에 인기
논알코올이 떠오른 것은 술을 건강하게 즐기는 방향으로 음주 문화가 변화한 것과 관련이 깊다. 코로나19 팬데믹과 사회관계망서비스(SNS)의 유행을 계기로 웰빙 트렌드가 다시 급부상하며 술자리도 각자 체질과 컨디션에 맞춰 무리가 가지 않는 선에서 즐기려는 성향이 강해진 것이다. 글로벌 컨설팅기업 매킨지는 소비자들이 영양가 높은 음식, 깨끗한 제품, 수면의 질 개선과 더 나은 신체적·정신적 건강을 추구함에 따라 관련 제품과 서비스의 성장이 더욱 두드러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젠지(Z세대·1990년대 중반에서 2000년대 초반 태어난 세대) 사이에서 ‘소버 큐리어스’(Sober Curious·건강을 위해 음주를 의도적으로 멀리하는 것을 뜻하는 신조어로 술을 마시고 취하는 행위에 의문을 표하는 현상), ‘나다운 선택’을 하는 드링크 문화가 확산한 것도 배경이 됐다. 이들에게 술이 싫다면 그냥 물이나 음료수를 마시라는 말은 통하지 않는다. 파티나 콘서트장에서 취하지 않고도 술을 마시는 기분을 낼 수 있는 논알코올 음료가 사회적으로 허용되는 완벽한 대안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논알코올의 미래는 젠지가 주도하고 있지만 실질적 소비는 음주인들이 하고 있다는 분석도 있다. 업계 관계자들은 아예 술을 마시지 않는 사람보다 기존에 술을 좋아하고 자주 마시는 사람 중 논알코올 제품을 찾는 이들이 많다고 말한다. 이들은 술자리에서 과하게 취하는 걸 막고 자신만의 페이스를 유지하기 위해 알코올과 논알코올을 번갈아 마신다. 최근 제품군이 다양해지며 마실 것의 새로운 카테고리로 논알코올을 탐험하는 ‘애음(飮)가’들도 생겨나고 있다. 한 주류업계 관계자는 “외국에선 논알코올을 대체재가 아닌 보완재로 선택하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다”며 “글로벌 주류회사들은 ‘등산이나 운동 후 마시는 술’ ‘스마트 드링킹’과 같은 슬로건을 내걸고 논알코올 제품 마케팅에 힘을 쏟고 있다”고 말했다.
또한 논알코올 맥주는 주세법상 술이 아니기 때문에 주세를 내는 일반 맥주나 관세가 높은 수입 맥주보다 가격이 저렴하다는 이점이 있다. 실제로 시중에 유통되는 논알코올 맥주 가격은 일반 맥주의 3분의 2 수준이다.
논알코올은 밍밍하다고? 이제 달라졌다
오랜 기간 논알코올 맥주는 소비자들에게 디카페인 커피나 콩고기와 같은 존재였다. 술을 마실 수 없는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찾게 되는 대체품이다 보니 맛에 대한 기대 역시 크지 않았던 것이 사실. 하지만 최근 양조 기술의 발달로 논알코올 맥주도 일반 맥주와 맛이 흡사해졌다.
논알코올 맥주를 만드는 방법은 크게 3가지로 나뉜다. 일반 맥주를 양조한 후 알코올만 제거하는 방법, 양조 단계부터 알코올 발생을 최소한으로 줄이는 방법, 알코올과 유사한 풍미를 내는 재료를 섞어 양조하는 방법이다. 그간 논알코올 맥주 맛이 밍밍하게 느껴졌던 것은 알코올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맥주 특유의 맛이 사라졌기 때문. 최근에는 맥주 본연의 맛과 풍미를 손상하지 않고 알코올을 뺀 다양한 스타일의 논알코올 맥주들이 출시되고 있다. 이에 힘입어 논알코올 맥주는 맛이 없다는 소비자 인식도 점점 개선되는 추세다.
프리미엄 논알코올 수제 맥주 ‘어프리데이’(아래 사진)를 만드는 ‘부족한녀석들’의 황지혜 대표는 최근 달라지고 있는 분위기를 체감한다. 국내에서도 논알코올 맥주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며 여러 주류회사를 비롯해 식음료업체들의 제조위탁 문의가 늘었다. 소비자들의 요구에 업계가 먼저 반응하고 있는 것이다. 황 대표는 “2~3년 전까지만 해도 논알코올 맥주에 관한 인식이 별로 없었는데 요즘에는 기호식품으로 즐기는 수요층이 늘었다”며 “20대, 여성들뿐 아니라 30~40대 남성들도 논알코올을 즐겨 찾는 구매층”이라고 말했다.
논알코올 제품을 전문으로 판매하는 플랫폼도 생겨나고 있다. ‘마켓노드’의 김소희 대표는 전 세계의 다양한 논알코올 제품을 찾아 마시다 이를 전문적으로 소개하는 온라인 플랫폼을 열었다.
술 한 잔만 마셔도 얼굴이 빨개지는 체질이지만 좋아하는 사람들과 술잔을 기울이며 함께하는 시간을 즐기는 스타일. 김 대표는 생각보다 자신과 비슷한 사람이 많다는 걸 발견하고 대안책을 찾았다. 마켓노드에서는 음주 문화는 즐기고 싶지만 체질, 건강, 취향 등 각기 다른 이유로 술을 잘 마시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논알코올 제품을 판매한다. 흔히 ‘논알코올’ 하면 맥주를 떠올리는데 와인과 칵테일, 위스키, 진 등 여러 가지 논알코올 제품이 출시되고 있다.
김 대표는 논알코올을 즐기는 방법이 일반 주류를 마실 때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단, 논알코올에도 미량의 알코올이 포함될 수 있기 때문에 알코올에 예민한 사람이라면 제품 설명과 라벨을 꼼꼼히 읽을 것을 권했다. 그는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평소 본인이 선호하는 스타일에 따라, 술을 못 마시는 사람이라면 가볍고 달콤한 스타일부터 하나하나 시도하다 보면 논알코올로 즐길 수 있는 새로운 분위기와 매력을 발견하게 될 것”이라고 조언했다.
Q. 무알코올·논알코올·비알코올 차이는 무엇?
A. 국내 주세법상 알코올 함량이 1% 미만이면 주류가 아닌 성인용 음료(식품)로 구분되는데 이 중 알코올이 일절 포함되지 않은 제품은 무알코올, 알코올이 조금이라도 들어 있는 제품은 논알코올(비알코올)에 해당한다. 보통 논알코올 제품은 0.0%, 무알코올 제품은 0.00%로 표시된다. 논알코올의 기준은 나라마다 다르다. 미국과 영국의 경우 알코올 함량 0.5% 이하일 때 논알코올로 분류된다.
Q. 논알코올 맥주 마시고 운전해도 될까.
A. 알코올이 전혀 함유되지 않은 무알코올 맥주는 당연하게도 혈중알코올농도를 높이지 않는다. 알코올이 극소량 포함된 논알코올 맥주는 매우 짧은 시간 내 대량으로 마시지 않는 이상 혈중알코올농도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하지만 개인마다 알코올에 반응하는 정도가 다를 수 있으므로 본인의 몸 상태에 따라 조절해야 한다. 특히 임신부나 환자 등 알코올에 민감한 경우 알코올이 없는 무알코올 음료를 선택하는 것이 좋다.
Q. 청소년이 살 수 있나.
A. 무알코올과 논알코올 주류 모두 성인용 음료이기 때문에 청소년은 구매할 수 없다.
Q. 온라인으로 구매할 수 있나.
A. 알코올 함량이 1% 미만인 논알코올 및 무알코올 제품은 주류로 구분되지 않아 온라인에서 구입이 가능하다. 단 성인인증을 거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