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해외여행 전면 자유화 조치 이후 수많은 사람들이 비행기에 올랐다. 길을 떠나는 젊은이들의 목적과 방식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 조금씩 달라졌다.
처음 해외여행을 할 수 있다는 흥분에 들뜬 한국인들은 80년대 후반 깃발을 앞세우고 동남아 휴양지로 향했다. 상대적으로 물가가 싸고 물빛이 아름다웠던 그곳에서 관광객들은 이국의 정취에 빠졌다. 오직 한국인만을 위한 보신 코스도 간간이 끼어 있었고, 사람들은 마치 일행을 놓치면 큰 일이라도 나는 양 단체로 뭉쳐다녔다.
90년대 초반은 대학생 배낭여행이 본격화된 시기였다. 대학생들은 기나긴 여름방학을 이용해 너도나도 유럽행 티켓을 끊었다. 여러 나라가 인접한 유럽의 특성을 살려 ‘최소비용, 최장기간, 최대국가’가 목적이었다. ‘얼마나 덜 쓰면서 얼마나 많이 보았는가’를 자랑이라도 하듯, 학생들은 여권에 되도록 많은 국가의 도장을 받으려 했다. 이름 모를 역전에서의 노숙 체험은 멋진 무용담이었다.
일하면서 해외에 체류하는 ‘워킹 홀리데이’도 이 같은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됐다. 90년대 중반 이스라엘 키부츠, 호주 우프 체험은 고되지만 젊은이들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으로 여겨졌다.
90년대 후반부터 여행의 양보다는 질에 눈을 뜨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유럽의 미술관만을 도는 테마여행이라든가, 한 나라에 오래 머무는 프로그램도 생겼다. ‘저비용으로라도 일단 나가보자’는 사람들보다 ‘돈을 들여서라도 제대로 계획을 세우자’는 사람들이 많아진 것이다.
2000년대 이후 젊은이들의 배낭여행은 ‘탑덱(Topdeck)’이라 불리는 다국적 여행으로 변모하고 있다. 세계 각국에서 모여든 18∼39세의 젊은 배낭여행자들이 투어리더, 요리사, 운전기사와 함께 여행을 하는 형태다. 유럽 여행의 경우 주로 영국 런던에서 출발하고, 혼자 오는 여행객이 많으므로 굳이 한국에서 동행자를 구할 필요가 없다. 유스호스텔에 머물 때는 탑덱 친구들과 한 방을 쓰기 때문에 전혀 알지 못하는 외국인과 묵는 경우보다 도난 걱정 등이 덜하다는 장점도 있다.
초고속 인터넷망이 빠르게 확산됨에 따라 여행정보의 공유도 더욱 활발해졌다. 90년대 초반 PC통신 시절부터 여행 마니아들은 자신만의 정보를 활발히 공유했으나, 이젠 블로그에 정보뿐 아니라 사진과 감상문까지 올리는 ‘모든 여행객의 여행작가화’가 이뤄지고 있다. 여행사를 찾은 손님이 직원보다 많은 정보를 갖고 오는 경우도 흔하고, 여행사가 대형 여행 커뮤니티와 사업제휴를 하기 위해 손을 벌리기도 한다.
90년대 초반부터 주로 젊은이들을 위한 여행상품을 개발해온 신발끈여행사의 김지영씨는 “지금 여행은 ‘보는 여행’에서 ‘체험하는 여행’으로 옮겨가는 추세”라며 “앞으로는 갔던 지역을 다시 찾는 ‘리피터(repeater)’들도 조금씩 늘어날 것”이라고 전망했다.
성 야고보의 유해가 묻힌 스페인 북부에서 출발해 850㎞를 걷는 산티아고 도보여행은 대표적인 ‘체험 여행’이다. 킬리만자로의 자연을 벗삼는 트레킹 코스도 나와 있다. 100여년 전 노르웨이인 아문젠과 영국인 스콧이 사나이의 자존심을 걸고 승부를 벌였던 남극탐험 프로그램도 있다. 아시아, 유럽, 북미에서 벗어나 남미와 아프리카까지 한국 여행객들의 발걸음이 옮겨가고 있는 추세다.
〈백승찬기자 myungworry@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