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로나 비치·초콜릿 언덕·반딧불이 투어 등 ‘장관’
입고간 두툼한 외투를 공항 의류보관실에 맡겨놓고, 한결 가벼워진 옷차림으로 비행기에 오르는 순간, 동남아 여행은 겨울이 제 맛이라는 걸 실감하게 된다. 필리핀은 이 무렵 날씨가 가장 좋다. 아침저녁으로 불어오는 선선한 바람이 동남아 특유의 ‘습습하고 콤콤한’ 공기를 말끔히 씻어준다.
필리핀은 7000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나라다. 그중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알려진 곳은 세부, 보라카이 등 몇 손가락에 꼽을 정도다. 필리핀의 수도 마닐라에서 정남쪽으로 약 700㎞, 세부 막탄섬에서 동남쪽으로 70㎞ 거리에 위치한 보홀은 필리핀에서 10번째로 큰 섬이다. 사면이 섬으로 둘러싸여 있어 폭우뿐 아니라 태풍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는 천혜의 지형적 요건을 갖춘 열대 천국이다. 해변의 곡선은 부드럽고, 백사장은 드넓으며, 검은 산호 숲은 신비롭다.
인천국제공항에서 마닐라까지 3시간, 마닐라에서 다시 1시간 남짓 걸려 보홀(보홀섬)의 관문 탁빌라란 공항에 도착했다. 아열대의 스콜이 막 지나갔는지 대지는 촉촉하고, 열대의 나무들은 막 샤워를 하고 나온 여인처럼 깨끗하고 싱그럽다. 탁빌라란은 보홀의 관문이자 중심 도시. 관공서와 학교, 시장과 쇼핑몰, 각종 상업시설이 모여있다. 보홀을 찾는 여행객들에게 탁빌라란은 지나가는 도시이다. 하지만 여행을 하다 보면 목적지보다 지나가는 길에 본 어떤 도시, 스쳐 지나가는 어떤 사물이 더 인상적일 때가 있다. 탁빌라란이 그랬다. 마치 고장난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와 현재를 덜커덩거리며 왔다갔다하는 듯한….
1차선인지 2차선인지 분간이 안 가는 도로를 중앙에 두고 양 옆으로 ‘빨간 책’과 ‘19금 비디오’의 조악한 포스터를 붙여놓고 호객행위를 하는 만화방과 비디오가게, 라디오 수리점과 잡화상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그 사이를 비집고 맥도널드와 프라이드 치킨, 월드뱅크의 ATM기와 휴대폰 판매점의 럭셔리한 매장, 글로벌 석유회사 쉘의 미끈한 간판들이 몸을 섞고 있다. 울퉁불퉁한 도로엔 매연을 푹푹 뿜어대는 낡은 자동차, 오토바이를 개조한 트라이시클, 군용트럭을 버스로 만든 지프니와 등하교 학생들의 자전거가 뒤엉켜 달린다.
세부나 보라카이가 세련된 휴양지라면, 보홀은 소박한 시골 마을 같다. 흙먼지 풀풀 날리는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에 집에서 기르는 닭들이 푸드덕 뛰어들기도 하고, 우리를 뛰쳐나온 새끼 돼지가 질주를 한다. 수천년 쌀농사를 주업으로 해 온 나라답게 들판은 온통 허수아비 천지다.
‘보홀의 꽃’은 뭐니뭐니해도 팡라오의 알로나 비치다. 순백색의 부드럽고 고운 모래, 야자수 군락은 열대의 정취를 물씬 풍긴다. 야자수 그늘에 앉아 망망대해를 바라보며 마시는 산미구엘(필리핀 맥주)의 맛은 두고두고 기억날 것이다. 보홀의 명소로 초콜릿힐도 빼놓을 수 없다. 섬 중앙의 평원에 우뚝 솟은, 경주의 왕릉 같은 1268개의 언덕들이 장관이다. 200만년 전 바닷속 자연이 솟아오르면서 육지가 되고, 산호층이 엷어지면서 언덕처럼 변했다. 초콜릿힐이라는 이름은 건기 때 갈색 초지로 뒤덮인 모습이 키세스 초콜릿을 닮았다고 해서 붙여졌다. 초콜릿힐 전망대 계단도 초콜릿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밸런타인데이(2월14일)에 맞춰 214개로 이뤄졌다. 아침 해가 솟아 오를 때, 혹은 저녁 노을 질 무렵이 특히 아름다운 초콜릿힐은 신혼이나 연인 여행객들이 가장 선호하는 포토존이기도 하다.
초콜릿힐에서 1시간 거리에 있는 로복강은 선착장에서 폭포까지 3㎞ 구간을 필리핀 전통 목선인 방카를 타고 간다. 방카에는 필리핀 전통 음식이 뷔페로 차려지고, 로복 출신 음악가들의 라이브 공연이 펼쳐진다. 코코넛, 야자수 등 열대 수목이 울창하게 드리워진 로복강은 물결이 잔잔해서 선상 식사가 전혀 불편하지 않다. 강 끝에서는 원주민들의 수상공연이 손님을 반긴다.
로복강 선착장 근처 농원에서는 세계에서 가장 작은 타르시어 원숭이를 만날 수 있다. 보홀에서만 서식하는 이 원숭이는 몸 길이가 13㎝에 불과해 손바닥에 올려놔도 될 만큼 작다. 커다란 눈이 마치 안경을 쓰고 있는 것 같아 ‘안경 원숭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야행성으로 낮에는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다가 밤이면 메뚜기 등을 사냥한다. 관광객이 카메라를 갖다대면 렌즈 쪽으로 눈을 돌려 귀여운 포즈를 취하기도 한다.
아바탄강 맹그로브숲의 반딧불이 투어는 보홀 여행의 백미다. 어둠이 내릴 무렵, 아바탄강 어귀에 들어서면 삼파귀타(필리핀 국화)를 머리에 꽂고 향로를 든 소녀들이 여행객을 맞는다. 향불 의식을 마친 뒤에야 반딧불이를 찾아 카약에 오른다. 불빛과 소음을 최대한 줄인 카약은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어둠 속의 강을 서서히 거슬러 올라간다. 사공이 손전등을 반복해서 켰다 껐다 해가며 반딧불이들이 모여 있는 나무를 비춘다. 일순간 강물 위로 신기루가 나타났다 사라지는 듯하고, 별무리가 떠다니는 것 같기도 하다. 수만마리의 반딧불이들이 춤추는 나무 밑으로 카약이 다가가는 순간, 맹그로브 나무는 초대형 성탄 트리 같은 황홀경을 연출한다. 어둠의 끝자락에 순수 자연이 수놓은 빛의 축제, 여행객의 기억 속에서 오래오래 반짝거릴 것이다.
보홀은 항공 직항편이 없어서 ‘둘러둘러’ 가야 하는 여행지다. 편리함과 빨리빨리를 외치는 한국 여행객들에게는 어쩌면 보홀은 불편한 여행지일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보홀은 우리가 잊고 산 자연이 주는 원초적 편안함과 휴식을 일깨워준다.
■ 항공:보홀 직항은 아직 없다. 세부에서 보홀로 들어가거나, 마닐라에서 보홀로 가는 방법이 있다. 필리핀항공은 매일 인천~마닐라 노선을 운항하고, 마닐라~탁빌라란(보홀)노선도 하루 3번 운항한다. 인천공항에서 세부 직항을 이용한 뒤 배로 이동하는 방법도 있다. 세부에서 페리 이용시 보홀까지 1시간30분 정도 걸린다.
■ 언어:세부아노어(비사야어), 보호라노어를 사용하며 영어도 함께 사용한다.
■시차 및 기후:한국보다 1시간 느리다. 보홀은 명확한 우기도 건기도 없는 기후가 특징이다. 해변가는 일반적으로 따뜻하고 건조하며, 내륙은 아침저녁은 쌀쌀하지만 일년 내내 온화하다. 루손섬이나 비사야의 북부 지역과 다르게 보홀은 필리핀에 피해를 주는 태풍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는다. 태풍이 발생해도 순식간에 지나가며, 레이트와 사마르 지역의 산을 넘어오면서 세력이 약해져 큰 피해가 없다. 연평균 기온은 27.8도.
■ 화폐:필리핀의 화폐단위는 페소(PHP)이다. 10페소가 한화로 260원 정도. 10페소는 필리핀의 마을버스에 해당하는 지프니 요금을 치르고 2페소를 거슬러 받을 수 있는 금액이다. 달러를 받는 곳은 공항 외에는 거의 없다. 여행시 반드시 페소로 환전해야 불편함이 없다.
■ 숙소:대부분의 숙소들이 팡라오섬 알로나 비치를 중심으로 퍼져 있다. 지난해 개장한 ‘팡라오 블루워터’를 비롯해 휴양형 리조트 ‘풀빌라’가 조용하다. 허니문 여행객들에 인기가 높다.
문의: 필리핀 관광청 서울사무소(www.7107.co.kr)에서 더 많은 여행정보를 얻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