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주홍씨 마라톤 풀코스에 첫 도전… 불행으로 얼룩진 인생에 은둔하던 그, 마라톤 접한 후 안마 재능기부 등 세상과 소통
40㎞ 지점을 통과했다. 2.195㎞만 더 가면 된다. 옆에서 “힘내”라며 소리쳤지만 정신이 혼미했다. 햇빛도 분별하지 못하는 눈앞은 언제나처럼 캄캄한 어둠뿐이었다. 두 다리는 힘이 풀린 지 오래다. 그냥 주저앉고 싶었다.
심한 탈진으로 두 번이나 차를 타고 잠깐씩 이동했기 때문에 완주도 의미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다시 한번 이를 악물었다. 힘들고 어려운 시기를 겪던 그를 세상과 소통하게 해준 마라톤인 만큼 끝까지 달리고 싶다는 ‘의지’가 마지막 힘을 낼 수 있게 도와줬다.
따가운 가을햇살이 내리쬐던 지난 1일 오후. 마라톤 풀코스(42.195㎞) 완주에 처음 도전한 1급 시각장애인 윤주홍씨(50·안마사)는 충북 영동군의 한 시골 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 가난 때문에 치료 못받아… 명의 빌려줬다 곤욕도
윤씨의 마라톤 도전기는 이날 오전 9시5분 영동군민운동장에서 시작됐다. 그는 동반주자인 김인수 경향신문 편집2팀 부장(54)과 함께 제10회 영동포도마라톤대회 출발선에 섰다. 그의 얼굴에는 긴장감이 역력했다. 출발 신호가 울리자 윤씨는 김 부장과 힘차게 첫발을 내디뎠다.
윤씨가 풀코스 도전에 나선 것은 마라톤이 그의 인생에 한 줄기 빛이 됐기 때문이다.
마라톤을 만나기 전 윤씨 인생은 불행으로 얼룩졌다. 그는 충북 제천의 가난한 농가에서 4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그는 세 살 때부터 시력을 잃기 시작했지만 변변한 치료조차 받지 못했다. 가난 때문이었다.
초등학교를 겨우 졸업한 윤씨는 강원도의 한 맹학교에 입학했다. 그곳에서 점자를 익혀 정규교육을 받았고 대전과 서울에서도 맹학교에 다녔다. 당시 그는 어머니에 대한 원망이 컸다. 다른 장애인들이 “누구는 부모가 집을 팔아서, 누구는 논밭을 팔아서 큰 병원으로 갔다”는 얘기를 할 때마다 원망은 더 깊어졌다. 숨어서 혼자 울기도 했다.
그의 인생 위기는 30대에 찾아왔다. 안마사로 일할 때다. 1998년 안마시술소 실제 사업주에게 자신의 명의를 빌려준 것이 문제가 됐다. 윤씨가 명의상 사장이 되자마자 업소가 성매매 단속에 걸린 것이다.
사업주를 대신해 1년간 감옥살이를 했고 추징금 10억원, 탈세 추징금 등을 부과받았다. 그 뒤 세상과 담을 쌓고 은둔 생활을 했다. 그러나 추징금과 세금 독촉장은 계속 그를 괴롭혔다. 이런 그를 세상 밖으로 이끈 것이 마라톤이었다.
윤씨는 2011년 10월 한 시각장애인의 소개로 마라톤과 인연을 맺게 됐다. 올해 김 부장을 만나 마라톤 풀코스 완주란 목표를 세웠다.
그가 마라톤을 익히는 데는 어려움이 컸다. 달리기 자세를 눈으로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 부장의 온몸의 움직임을 더듬어 손끝 촉감으로 달리기 자세를 익혔다.
윤씨는 지금도 신용불량자다. 기초생활수급비·장애연금 등 한 달에 58만원을 지원받아 생활한다. 서울 광진구 구의동 작은 오피스텔에서 월세와 관리비 43만원을 내고 산다.
그러나 그는 더 이상 숨어 지내지 않는다. 마라톤으로 세상을 다시 만난 이후에는 경기 수원시에 사는 노인들을 찾아가 안마 바우처 활동을 하고 있다. 윤씨는 “나도 남을 위해 재능기부를 하고 봉사를 한다는 자부심이 생겼다”며 “사회의 건전한 구성원으로 거듭났음을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마라톤이 그의 삶을 변화시킨 것이다. 윤씨는 동반주자들과 어울리고 함께 떠들면서 ‘사람은 함께 사는 것’임을 처음 깨달았다. 대회에 나가면 모르는 사람들도 “파이팅”을 외쳐준다. 장애인으로, 외톨이로, 숨어 살아온 그는 한 번도 사람들의 응원을 받아본 적이 없다. 지금은 쏟아지는 응원소리에 신이 난다.
윤씨는 이날 두 번의 고비를 넘겼다. 27㎞쯤 달렸을까. 윤씨에게 첫 번째 위기가 왔다. 더위 속에 달리느라 탈진이 온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지나가는 차를 얻어 타고 1㎞ 정도를 가며 숨을 돌린 그는 차에서 내려 다시 뛰기 시작했다.
37㎞ 지점에서 또다시 위기가 찾아왔다. 그는 김 부장에게 “더는 못 뛰겠다”며 “구급차에 태워달라”고 말했다. 김 부장은 여기서 포기할 수 없다는 생각에 구급차가 아닌 지나가는 차를 얻어 타기로 했다. 구급차에 타면 사실상 ‘경기 포기’를 의미해 지금까지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 끝까지 달리고 싶다는 의지로 두 번의 고비 넘겨
차를 타고 이동하며 윤씨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10여년 전 세상을 떠난 어머니가 떠올랐다. 어머니가 자신을 돌보기에 너무 가난했다는 사실을 서른 살이 넘어 뒤늦게 깨달은 것이 후회가 됐다.
그는 차에서 내려 달리기 시작했다. “은둔 생활을 하던 내가 세상으로 나오게 도와준 것이 마라톤이기 때문에 꼭 완주를 해보고 싶었습니다.”
얼마 후 “(결승선이 있는) 영동군민운동장이 보인다”는 김 부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후 2시22분. 윤씨와 김 부장은 영동군민운동장에 들어섰다. 많은 사람들이 박수와 함성을 보내줬다. 골인 지점을 통과하자 대회본부는 두 사람에게 5시간17분59초가 적힌 완주증을 주었다. 윤씨는 “형님, 완주를 못해서 미안해요”라며 울먹였다. 김 부장도 “내가 더 미안해. 완주하도록 끌어주지 못해서”라며 눈물을 흘렸다.
중간에 두 번이나 차를 타고 이동해 진정한 의미의 완주는 아니었다. 기록도 대회 기준시간인 5시간을 넘겨버렸다.
20년 동안 마라톤과 철인3종(수영·사이클·마라톤)을 즐겨온 김 부장도 이날 ‘동반주자’라는 아름다운 동행에 합류하면서 처음으로 완주를 포기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힘든 도전을 이겨냈다는 것에 부둥켜안고 기쁨을 만끽했다.
윤씨는 “마라톤을 할 수 있어 기쁘고 행복하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영동 | 천영준 기자 yjc@kyunghyang.com>
장애인 동반주 위해 8개월간 1900㎞ 달려
국내 마라톤 동호회의 효시인 ‘런너스클럽’은 10여년 전 국내 처음 시각장애인들의 동반주자 봉사활동을 했다. 그러나 서로 힘이 들어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중단됐다. 지금은 여러 동호회 마라토너들이 동반주자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기자(김인수 경향신문 편집2팀 부장)는 런너스클럽 창립 때부터 회원으로 활동했다. 과거 장애인 봉사활동을 정성껏 하지 못한 점을 만회하고자 올 1월부터 동반주 준비를 했다. 봄부터는 한국시각장애인마라톤 클럽의 자원봉사 동반주자로 활동했다. 8개월 동안 개인훈련, 동반주자 훈련, 대회 출전 등을 합해 약 1900㎞를 달렸다.
이철성씨(47)는 시각 및 청각 복합 중증 장애인으로 국내 장애인 마라톤 일인자다. 42.195㎞ 풀코스 기록이 2시간59분이다. 기자는 이씨의 동반주자로 두 번 훈련했다. 그때마다 다리 근육통으로 밤새 신음했다. 아내는 “마라톤 동반주하면서 (매를) 맞았느냐”고 물었다.
기자는 훈련 때, 1급 시각장애인 정운로씨(42)의 마라톤 동반주자로 자주 달렸다. 정씨는 2008년 사하라 사막 260㎞ 마라톤대회에서 완주한 건각이다. 정씨와 철인3종의 한 종목인 사이클 훈련에서 중랑천을 따라 서울~의정부를 왕복해 달리곤 했다.
지난 6월2일 아침, 서울지하철 여의나루역 2번 출구에서 시각장애인 마라토너들과 동반주자들이 서성거렸다. 세계일보 주최 제10회 새벽강변국제마라톤대회 풀코스에 나가는 장애인 차승우씨(48)의 동반주자가 교통편 사정으로 출전할 수 없게 됐던 것이다. 차씨는 마라톤 풀코스 90여회와 철인3종을 완주했다. 기자는 ‘훈련 단짝’인 정씨와 차씨를 응원하러 여의나루역 출구로 갔다.
기자는 훈련 때 시각장애인 3명을 동시에 이끌어 달리곤 했다. 정씨를 옆에 세워 끈으로 팔을 묶고, 차씨와 다른 장애인 등 2명을 뒤에 세워 큰 목소리로 레이스를 안내했다. 대회 때와 달리, 훈련 때는 자원봉사 동반주자가 모자라서였다.
기자는 나흘 뒤 윤주홍씨(50)의 동반주자로 하프코스를 달리기로 한 약속이 부담스러웠다. 그러나 차씨의 손을 잡고 출전했다. 맨손체조도 못하고 출발했지만 차씨는 기자와 함께 풀코스 장애인 1위로 골인했다.
나흘 뒤, 기자는 서울 한강공원에서 열린 올레마라톤대회 하프코스에서 윤씨와 완주했다. 그 뒤 두 달여 기간 기자는 윤씨가 9월1일 영동마라톤대회 풀코스에 도전하도록 개인훈련을 시켰다. 장마와 폭염 속에서 서울 남산 산길과 한강공원 길을 함께 달렸다.
많은 시각장애인들이 마라톤과 같은 운동을 하고 싶어 하지만, 어려서부터 시력을 잃은 중증 장애인은 이마저도 여의치 않다. 이들은 성장기 이후 시력을 잃은 장애인들보다 운동을 배우는 데 어려움이 훨씬 크다.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맨손체조와 같은 기본동작조차 가르치는 사람의 몸을 손으로 더듬어서 배운다.
<김인수 기자 kis@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