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공화국-장기농성장

투쟁 10년··· "그래도 우리에겐 내일이 있다"

최민지 기자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인가’ 기획은 불평등, 노동 탄압, 특권 세습, 권력 독점, 법치 실종, 부정부패, 대의제 한계 등

‘민주공화국’의 부재와 위기를 7회에 걸쳐 진단합니다. 웹·모바일 특집페이지에 지면에 담지 못한 이야기를 싣습니다. 취재팀이 지난 8~9월 만난 노동자, 장애인, 활동가, 지식인 등 100여명의 육성을 르포와 인터뷰로 올립니다. 특집 페이지는 시대를 진단하는 아카이브로도 활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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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0일 오전 11시, 서울 여의도 새누리당사 앞 콜트·콜텍 농성장에 들어서자 더운 기운이‘훅’하고 얼굴을 덮쳤다.‘으아’ 소리가 절로 나왔다. 2~3평쯤 되는 농성장 안에는 오늘자 경향신문과 한겨레신문, 부채, 스마트폰 충전기가 널부러져 있었다. 바깥은 햇볕이 사정없이 내리쬐는 상황. 주인 없는 집이지만 일단 신발부터 벗고 들어가 앉았다. 비닐 소재로 된 바닥은 아스팔트 열기가 그대로 전해지는 탓에 후끈후끈했고 살이 닿자 찐득거렸다. 비닐 바닥 한켠에 깔려있는 대나무 돗자리 위로 피신했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앉은 지 10분도 안 돼 머리카락 안으로 땀이 주르륵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 아직 마르지도 않은 머리카락을 얼른 하나로 묶어 버렸다.

더위도 잊을 겸 농성장 안을 살폈다. 냄비 2개와 휴대용 가스버너, 휴지통 등 온갖 살림살이가 가득했다. 한쪽 구석에는 검정색 케이스에 담긴 기타 여러 대가 비스듬히 세워져 있고 그 옆에는 앰프와 전기 발전기도 있다. 농성장 한쪽 벽에 “무기한 노숙농성 311일째”라고 쓰인 빨간 플래카드가 눈에 띄었다.

지난해 10월 여의도 새누리당사 앞에서 김무성 당시 새누리당 대표에 사과를 요구하며 무기한 단식농성에 돌입한 방종운 콜트악기 지회장의 모습/ 채용민 PD

지난해 10월 여의도 새누리당사 앞에서 김무성 당시 새누리당 대표에 사과를 요구하며 무기한 단식농성에 돌입한 방종운 콜트악기 지회장의 모습/ 채용민 PD

지난해 10월, 콜트콜텍 해고노동자들은 여의도 새누리당사 앞에 농성장이 설치했다. 시발점이 된 건 지난해 9월 당시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가 한 발언이었다. 김 전 대표는 새누리당 최고위원회 회의에서 “강성노조 때문에 건실한 기업(콜트·콜텍)이 문을 닫았다”고 말했다. 노조는 “명백한 왜곡”이라며 반발했고 김 대표의 사과를 요구하며 새누리당사 앞 농성을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방종운 콜트지회장은 45일간 단식을 단행하며 병원에 실려 갔다. 이인근 콜텍지회장 또한 단식 농성을 벌였고 많은 시민들이 릴레이단식에 동참했다. 이날은 그렇게 기약 없는 싸움을 시작한 지 311일째 되는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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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분쯤 지났을까. 임재춘씨(54)가 농성장 안으로 들어왔다. 농성장 건너편 KFC건물 화장실에서 오는 길이라고 했다. 임씨는 더운 날씨에 어울리지 않게 흰색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그의 카키색 반팔 티셔츠에는 “노 콜트(NO CORT)”, “노 기타 노 뮤직(NO GUITAR NO MUSIC)”이라고 쓰여 있었다. 임씨와 인사를 하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또 한 명의 손님이 찾아왔다. 제주강정마을 활동가 달메씨(40)였다. 새카맣게 탄 얼굴에 장발을 한 달메씨는 한참동안 제주 감귤 이야기를 했다. 제주도에는 감귤 나무가 많아서 그냥 막 따먹는다는 이야기부터 강정마을에 놀러오면 귤 하나는 실컷 먹게 해준다는 이야기까지. 그러다 달메씨는 한 마디 덧붙였다. “이런 데서 귤농사 하면 잘 될 텐데”, “이런 데요?”, “여기가 비닐하우스잖아.”

11시 40분 임재춘씨와 달메씨는 국회 앞 점심 시위를 하기 위해 피켓을 챙겼다. 재춘씨가 든 피켓 내용은 이랬다. “사장은 한국 재계 120위, 1200억의 재력가”, “뼈 빠지게 일한 노동자들은 정리해고로 10년간 길거리 신세”, “콜트·콜텍 자본의 부당한 정리해고에 맞선 노동자들의 단식, 고공농성, 본사점거 등 10년의 투쟁! 이제 국회가 해결해야 합니다”, “콜트·콜텍 사장은 무노조 경영의 야욕을 버리고 국내공장 정상화 정리해고 철회 해고 노동자 복직을 즉각 실시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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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서 5분 거리의 국회 정문 앞에 도착하자 임씨는 파란 쿨토시를 양팔에 착용하고 밀짚 모자를 쓴 뒤 1인 시위를 시작했다. 정문 앞에는 임씨 외에도 예닐곱명의 시위자가 있었다. 재춘씨는 기자를 데리고 다니며 다른 시위자들에게 일일이 소개를 하고는 기자에게 “난 이미 다 타서 괜찮다”며 밀짚모자를 양보했다. 이날 서울의 낮 최고기온은 34.8도였다.

지난 8월 10일 낮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콜트·콜텍 해고노동자 임재춘씨(오른쪽)와 제주강정마을 활동가 달메씨(왼쪽)가 피켓 시위를 벌이고 있다.  이날 서울의 최고 기온은 34.8도 였다. / 최민지 기자

지난 8월 10일 낮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콜트·콜텍 해고노동자 임재춘씨(오른쪽)와 제주강정마을 활동가 달메씨(왼쪽)가 피켓 시위를 벌이고 있다. 이날 서울의 최고 기온은 34.8도 였다. / 최민지 기자

1시간의 점심 시위를 마친 재춘씨와 달메씨는 농성장으로 복귀했다. 이제 점심을 먹을 시간이다. 또다른 해고노동자 김경봉씨(57)까지 합류해 근처 국수집으로 이동했다. 메뉴는 초계국수와 육계장, 만두육계장, 콩국수였다. 재춘씨 일행은 이 국수집에 가끔 온다고 했다. “삼시세끼 다 사먹어. 딱 4명이라 해먹기도 그렇고. 근데 먹는 메뉴가 거기서 거기라. 순대국 김치찌개 이런 거. 고기는 잘 안 먹고. (자주 가는 식당이) 10군데도 안 될거야. 근데 여의도 식당들이 다 맛있어. 회사가 많아서. 생각보다 안 비싸. 식당들보다 포장마차가 진짜 비싸. 안주 하나에 2~3만원씩 해.”

“국회 앞에서 시위하면 좋은 게 뭔 줄 알아? 경찰이 안 건드려 여기는. 지랄을 안 해. 그리고 웃긴 게 국회 들어갈 때 (노조) 조끼 입으면 벗으라고 한다. 알레르기 반응이야. 아주 웃겨. 경비나 잘하라 그래.”

점심 식사를 마친 후 농성장으로 돌아왔다. 김경봉씨는 한겨레 신문을 펴놓고 읽기 시작했다. 1면 톱은 이정현 의원의 대표 당선 기사였다. 이날은 이정현 의원이 새누리당 대표로 선출된 다음날이었다.

오후 2시, 김경봉씨와 달메씨는 스마트폰 배터리를 충전하기 위해 국회의사당역으로 이동했다. 역사 안 한쪽 벽 콘센트 옆에 자리를 잡았다. 마침 노트북 배터리가 아슬아슬하던 차에 잘됐다 싶었다. 노트북 배터리를 콘센트에 꽂았다. 경봉씨는 국회의사당역사가 농성장보다 깨끗하다며 그냥 앉아도 된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기자에게는 아까 읽던 신문을 건넸다. “비싼 노트북인데 이정현이라도 깔아.”

◇ 김경봉 조합원

지난 5월 서울 여의도 콜트-콜텍 농성장 앞에서 해고노동자 김경봉씨가 피켓 시위를 벌이고 있다. / 페이스북 페이지 ‘콜트콜텍 기타노동자의 친구들’

지난 5월 서울 여의도 콜트-콜텍 농성장 앞에서 해고노동자 김경봉씨가 피켓 시위를 벌이고 있다. / 페이스북 페이지 ‘콜트콜텍 기타노동자의 친구들’

■ “더위 이기는 노하우? 그런 건 없어요”

농성장의 하루는 아침 일찍 시작된다. 경봉씨는 일어나 더불어민주당사 근처의 국밥 집에서 아침 식사를 해결한다. “아침만 7시부터 10시까진가 9시까진가? 고 시간까지만 현금으로 하면 2500원이고 카드하면 3000원. 콩나물 국밥 하는 집 있고 시래기 국밥 하는 집이 있어. 현금으로는 2500원이라서 거기가서 먹어. 밥은 딱 고거랑 김치 조금 단무지 조금 계란후라이 하나 해서 먹어. 아침으로는 딱 먹기 좋게 나오지.”

식사를 마친 후에는 8시부터 9시까지 새누리당사와 더불어민주당사 앞, 국회의사당 앞에서 각각 1인 시위를 해요. 그리고 12~1시에 각각 또 1인 시위를 하고. 오후에는 우리 집회나 연대집회를 하고. 보통 연대 나가는 건 저녁 5시 이후니까. 갔다오면 10시 넘어가니까 자고.”

씻는 건 근처 건물 화장실이나 사우나에서 해결한다. “씻는 건 하도 보수적인 경비아저씨들도 많아서 씻고 이런걸 되게 못마땅하게 생객해. 몰래몰래 씻긴 씻는데 왠만하면 목욕탕 가서 일주일에 한번 수요일이나목요일에 갔다오고, 주말에 집에 가서 씻고 오고. 주말에 집에 있다가 월요일에 오면 이틀 지나면 수요일이잖아. 주말에 집에 가니까 중간인 날을 택해서 그렇게 하는 거지. 너무 오랫동안 있으면 냄새나니까. 사우나가 꽤 비싸더라고. 현금으로 매일 가면 12000원인데 한 열장씩 끝으면 10만원 정도. 그 동안은 작년 10월부터 있으면서 땀이 별로 안나니까 그냥 한번씩 가고 했는데 요즘은 워낙 더워서. 여의도 길 건너면 7000원짜리가 있더라고. 그래서 거기로도 가끔 가고 그래. 각자 자기가 가고 싶을 때 가지. 누군가는 농성장을 지켜야 하니까.”

건너편 KFC 건물 화장실을 이용한다. 이 건물은 24시간 개방되어 있다고 했다. “거긴 24시간 개방돼있는 공간이라 그런지 또 화장지가 없어. 이쪽 앞에 건물 가면 깨끗하고 사람도 없고 화장지가 항상 비치돼있어서 볼일보러 갈 때 그리로 가고. 간단하게 씻을때도 이쪽으로 가요. 새누리당 맞은편 건물인데 이름을 모르겠네. 거기는 지하에 식당이 한군데 밖에 없었어. 이번에 지하에 한군데 더 생겨서 사람이 좀 있어. 식당 한 군데라 저녁에 퇴근하고 나면 밤에만 하는 노래방이 있어서 씻기 좋았단 말이야. 사람 왔다갔다 식당이 많고 하면 씻지를 못하는데 저녁에는 식당이 일찍 닫으니까 사람이 왕래가 적어서 간단하게 씻을때는 거기가 좋더라고.”

오랜 농성으로 산전수전 다 겪은 그지만 더위에는 버틸 재간이 없다. “더위 이기는 방법 같은 건 없어. 더울 땐 어떻게 하면 그늘 속에 가 있을까 이런 생각밖에 없지. 자기 스스로 덜 더운곳을 찾아야지 요기(지하철역) 오는 것도 사실 부담이거든요. 시원한 데 가있는게 뭐가 부담이냐 하겠지만 농성장을 바라보면서 있어야 하는 게 맞거든. 언제 또 누가 올지 모르잖아. 자기가 더우면 더운대로 덜 덥게 그늘쪽에 가서 있으면 되는거고. 노하우? 그런거 없어요.”

그래도 장마 땐 걱정 없었다. 비가 오면 농성장 옆에 친 통비닐을 풀어 내려 농성장 전체를 싹 덮었다. 바람이 많이 불어도 끄떡 없었다. 경봉씨는 “비닐이 완전 바닥까지 다 내려지는 거라 그런 거 없다”며 “저절로 생기는 노하우”라고 웃으며 말했다.

김경봉씨를 포함한 4명의 해고노동자가 지내는 여의도 농성장은 주차장 건물 앞에 자리하고 있다. 이들은 공간사용비용으로 하루 2만원씩 월세 50만원씩 내왔다. 그러다 최근 건물주가 바뀌면서 주차비를 받지 않도록 했다고 했다. 좋은 일일 거라 생각했지만 경봉씨 생각은 반대였다. “이게 좋은 게 아니야. 결국 이걸 빌미로 해서 쫓아내겠다 하는 계산이 깔려있는거야. 수익을 내기 위해서 이걸 만들어놓은건데 그 자리를 돈을 안 받는다는 건. 처음 시작할 땐 하루 6만원 씩 달라고 했어. 종일 주차가 2만원이라 해서 종일주차로 해서 2만원으로 하겠다 합의를 본거거든. 근데 대표 바뀌면서 이렇게 됐는데 이면에는 결국 이 문제를 가지고 정리하는 데 쓰지 않을까. 이런 생각이 들어. 지금까지 아무말도 안 하는게 이상스러워.”

2011년 9월 콜트·콜텍 해고노동자들의 투쟁기를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꿈의 공장’이 개봉했다. / ‘꿈의 공장’ 포스터

2011년 9월 콜트·콜텍 해고노동자들의 투쟁기를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꿈의 공장’이 개봉했다. / ‘꿈의 공장’ 포스터

■ 대한민국 정치 1번지 여의도…관심은 “글쎄”

콜트·콜텍 해고노동자들이 여의도 농성을 시작한 지 1년이 됐다. 여의도 농성은 어떤지 물었다. “농성은 크게 다른 건 없어요. 부평 농성장 있을 때는 인도하고 농성장하고 차도하고 구분이 확실히 있었는데 지금은 구분이 없으니까 우리가 앉아있는 공간에도 다른 사람들이 빤히 보여지는 게 싫을 때도 있어요. 그런 것들이 좀 낯설기는 하더라고. 내가 투쟁하는 건 하는 거지만 내가 우리가 생활 공간이 남들한테 보여지는 게 싫은 것도 있고. 길바닥에서 자고 하는 건 얼마든 하지만 생활 공간이 비춰지는 건 아직도 싫어. 사생활이 없는 게 불편하지. 이렇게 더울땐 반바지 짧은 거나 팬티만 입고 자고 싶은데 가리고 자야 하니까.”

여의도는 사무실이 밀집되어 유동인구가 많은 곳이다. 지나다니는 시민들의 관심은 어떨지 궁금했다. “물어보는 사람 있고 상황 설명도 하고. 그런 사람이 있는가 하면 욕하고 가는 사람도 있고. 투쟁장 어디나 그렇겠지만 양극화는 항상 있는거니까요. 보통 뭐라고 하는 사람보다 뭐라도 먹을거 주면서 얘기해주는 사람이 더 많아요 사실. 고마운 마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정당하게 얘기를 권하지 자기가 욕하는 사람들은 뭣때매 하는지 모르지만 욕을 하는 사람이 딱 정해져 있어. 어쩌다 한 두명 정도지. ‘고맙다’ 아니면 ‘수고한다’, ‘고생한다’ 하는 사람이 훨씬 많아. 없을 때도 있고 많을 때는 한 2-3명 올때도 있고. 지금까지 행패부린 사람은 없었어요.”

언론의 관심은 끊어진 지 오래다. 농성장 바로 옆 새누리당과 더불어민주당사에는 수많은 기자들이 매일같이 드나들지만 농성장 안을 들여다보는 경우는 많지 않다. “언론에서 관심을 가져주긴 쉽지않아. 새누리당이나 더민주나 언론들이 그렇게 와도 우리 하나 비추질 않지. 언론이라는 게 그렇잖아. 먹잇감이 돼야 언론이 와서 붙어 얘기하는거지. 먹잇감 되지도 않는 데 와서 취재하겠어? 더군나다 요즘 언론이 다 보수꼴통화돼서 사회 일어나는 일들은 비춰주지 않고 권력에 의해서 짜여진 대로만 비춰지는 세상에서 노동에 관심이 있겠냐고. 없지. 저 사람들이 왜 저기서 저렇게 해야만 하는지 이런거에 대한 관심이 전혀 없는 거잖아. 어떻게하면 저것들을 빨리 치우나 하는 생각밖에 없는 거 같아.”

해고된 후 경제 활동을 못한 탓에 생계는 많이 힘들어졌다. 경봉씨는 ‘투쟁기금’이 없었다면 견디기 힘들었을 거라고 말했다. “개인돈으로 사먹는 건 어림도 없지 지금 집에 생활비도 어려운데 그것까지 할 수 없고. 투쟁사업장은 공동의 투쟁기금이 있어서 그걸로 다 해결을 하는거지. 지부에서 결의금 조금씩 나오는 걸로 밥 먹고 경비 쓰고. 또 많은 시민단체가 조금씩 조금씩 알게 모르게 후원해주시는 분들 있어요.”

경봉씨가 투쟁하는 동안 자녀들은 성인이 됐다. “막둥이가 늦둥인데, 둘째하고 10년 차이가 나. 큰 애하고 12년차이나고. 막둥이가 대학교 2학년이거든. 걔만 졸업하면 되는거고. 나머지는 다 각자 자기 경제 생활 하니까. 막둥이 하나 건사하는 것도 힘들어. 등록금이 제일 문제지. 그래도 나는 3자녀 국가장학금 받으니까 그래도 괜찮아. 한 80만원인가 그 정도면 내면 되고 나머지는 다 장학금으로 되니까.

■ 기타공장 해고노동자, 해고 후 비로소 기타를 알다

농성장 안 기타의 정체에 대해 물었다. “베이스도 있고 기타도 있고. 시간날때 연습하려고 갖다놨는데 완전히 놨어 더워서. 매주 화요일날 우리가 문화제 하니까 낮에 조금씩 하는거 그거지 뭐. 콜트 콜텍 기타 는 없어요. 성음악기랑 크라프트 기타. 나는 공장 다닐ㅤ때는 기타를 쳐보질 않아서 어떤 음색을 띄어야 좋은 기타인지 잘 몰라. 클럽에서 문화제 하면서 뮤지션들이 얘기하잖아. 콜트 기타 하면 홍대 지역에서 음악활동하는 사람들은 안 써본 사람들이 없다고. 인디뮤지션들이 다 가난하잖아 음악하고 싶은데 좋은 기타 못사니까 그 중에 외국기타에 버금가는 기타가 한국 콜트 기타라서 많이들 썼대. 콜텍 기타가 좋다는 것을 그때 안거죠. 내가 만들었어도 왜 이게 좋은건지 확실히 몰랐는데 투쟁하면서 홍대에서 뮤지션 만나 얘기듣고 확실하게 알았지.”

4명의 해고노동자들은 2008년부터 한달에 한번 홍대 클럽 ‘빵’에서 공연을 하고 있다. 경봉씨는 이 공연이 일상에 활력소가 되냐는 질문에 “일상에 활력소라기 보다는 우리 투쟁 위해 노력해주시는 분들한테 고마움을 더 느끼는 그런 날”이라고 대답했다. “연습 꾸준히 해야되는데 지금은 연습 안하고 있어. 그전에는 조직적으로 해서 선생님도 오고 그랬는데 지금은 선생님도 없고 이렇게 되니까 연습이 게을러 지는거지. 우리자작곡이 4개가 있는데 그것만 하다보니까 손에 익어서 각자 조금만 연습해도 할 수 있어요. 그래서 더 연습을 안해.”

■ “서로 아픈 사람들이니까 격려하고 인사하고 지내는 거죠”

여느 농성장과 마찬가지로 콜트콜텍 노동자들에게 연대는 중요한 가치다. 연대하는 이유에 대해 경봉씨는 이렇게 말했다. “다 동병상련 아닌가요 ? 우리 투쟁할 때 필요한게 연대하는 사람 이 많으면 좋겠다. 우리한테 힘 좀 줬으면 좋겠다. 이게 연대잖아요. 내가 바라는 만큼 다른 투쟁하는 사람들이랑면 그런 생각 할거란 말이지. 내가 가서 연대함으로써 그 사람들이 연대를 또 오는거고. 서로 덩치가 커보이기 위해서. 서로 같이 그래도 한두사람이 더 많으면 많을수록 힘이 나고 기분이 좋아지잖아요. ‘내가 문화제 할 때 사람이 많았으면 좋겠다’ 하는 마음이 다른 사람들도 똑같이 있을거란 말이지. 힘들 땐 힘을 나눠줄 수 있는게 연대거든요. 기분이 좋기도 하고.”

경봉씨가 연대하는 곳은 한두군데가 아니다. “하이디스, 세종호텔, 동양시멘트, 티브로드. 주로 이쪽이죠. 그 외에는 한번씩 가는 데가 삼성반도체. 투쟁사업장이라면 안 가는 데가 없어요. 다 가지. 주로 하이디스나 이쪽으론 공동투쟁단이 있어서 한달에 한 번 공동투쟁을 하기 때문에 각별히 애정이 가는 곳이지. 유성 같은 경우에도 무슨 일 있음 꼭 가야한다는 생각이 늘 있어요.”

“거기 오는 사람들은 사회 부조리 때문에 왔잖아요. 억울하고 국가가 이것은 잘못했다 이런 사람들이 오는거잖아요. 각자 자기 문제로 오는건데, 다 내 문제지. 다른 사람 문제도 곧 내 문제니까. 개인이 하는 경우도 있고 단체가 오는 경우도 있는데 그 속에는 내가 억울한 일 당했다는 그 자체가 깔려있잖아. 서로 아픈 사람들이니까 격려하고 인사하고 그렇게 지내는거지. 그렇다고 같이 막 연대를 하고 이런 관계는 전혀 아니야. 한군데도 없어 거기에는. 그래도 1인 시위 하는 마음은 똑같을 거라고 생각하고 한번을 보더라도 마음을 알 수 있는 게 있기 때문에 인사를 하고 그렇게 하는 거지. (그 사람들 사정을)다 알진 않고 ‘저분이 저런 이유 때문에 하는구나’ 이 정도만 알지요. 그 분이 어떻게 투쟁을 하고 하는 건 속속들이 알진 못하지만. 물론 내가 봤을 땐 저건 안해도 되는거 같은데 싶은 이런 것도 있지만 그 사람은 그 사람 나름대로 억울한 게 있고 해서 하는 거기 때문에.

영화 ‘꿈의 공장’ 속 김경봉씨의 모습/ 영화 스틸컷

영화 ‘꿈의 공장’ 속 김경봉씨의 모습/ 영화 스틸컷

■ 투쟁 10년…“인간답게 살기 위해 투쟁합니다”

오랜 투쟁을 이어가는 이유를 물었다. 경봉씨는 “요즘 들어 가장 많이 듣는 질문”이라며 “이유가 따로 없다”고 말했다. “처음 시작할 때는 억울해서 싸운거고. 내가 정당하기 때문에 금방 끝나고 회사로 들어갈 수있을거라는 마음으로 투쟁했어. 도 “싸우면 이길 수 있어. 이건 아닌데” 하면서 하다보니 지금까지 왔지. 이제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억울한 게 남아있으니까. 많은 사람한테 알려야 하고 사회 흘러가는 모든 흐름도 봤고 이런 것들이 눈에 들어오다보니 싸움 한거지. 단지 내 문제만 갖고 억울해서 할 것 같으면 난 못햇다고 생각해. 내가 앞으로 어떻게 될 줄 알았다면 솔직히 안했을지도 모르지요.”

그는 이어 “(이길 거라는)확신은 없어. 하다보면 사람들 의식이 바뀌다보면 좋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만 하는거지 이렇게 하다보면 뒤집어질거야 확신을 할 순 없다”고 말했다.

그에게 대한민국에서 노동자가 살아가는 건 어떤지 물었다. “투쟁하는 노동자들이라면 다 그런 생각을 할테지만 이 나라에서 노동자로 사는건 너무 힘들어. 우리 상황만 봐도 그렇잖아. 노동조합 없을 땐 개돼지처럼 부려먹으면서 돈 조금 주고 했지. 그것이 잘못됐다고 인간답게 살아보자고 조합 만들었더니 하루아침에 회사 문닫고 도망가버렸잖아. 저들은 노동자나 국민은 노예라고 생각하는 거 같아. 노동조합을 없애려고 하고 노동자들 권리를 말살하려는 시대에 노동자들이 살아가기 쉽지 않다고 생각해. 그래서 권리 빼앗기지 않으려고 노동자들이 단결하고 투쟁하고 하는 거지. 노동자로서 인간답게 살기 위해 투쟁하는거라 생각해요.”

■ “잘못된 걸 알면서도 이야기하지 않으면 그건 결코 잘못된 게 아니거든요”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이냐”는 질문을 던졌다. 답이 돌아오는 데 채 1초도 걸리지 않았다. 그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 아니”라고 말했다. “이명박 땐 하나의 기업이었죠. 기업을 키우기 위해서 노동자들의 모든 것을 뺏으려고 한 게 이명박이었다면 박근혜는 그 뒤를 이어 노동자들을 모두 다 때려잡으려고 하고. 5공때나 있었던 그런 일들을 자행하고 있는 거지. 나라가 선진화되고 민주화돼야 하는데 더 후퇴하고 민주는없어지고요. 괜히 신자유주의냐고. 자유는 있으되 자유롭게 살지 못하는 게 신자유주의다. 그건 곧 돈이 자유다. 돈이 자유를 결정짓는다. 그게 신자유주의 아냐? 그래서 신분제가 나오는 것이고. 돈만 있으면 모든 게 다 해결되고. 돈 앞에서는 노예될 수 밖에 없는 이게 신 자유쥬의 아니냐고?”

그는 이어 “할 말 못하는 혹은 안 하는” 한국 언론을 꼬집었다. 김씨는 한국 언론이 잘못된 것을 아니라고 이야기하지 못하고 있다고 있다고 비판했다. “언론에서 밀양 송전탑을 세워야하는 이유를 엉뚱하게 이야기하잖아. 이건 꼭 필요하다고 강조를 해놔서 필요한가보다 생각을 하지만 절대 아니라는거야. 절대. 이런 것들 자꾸 들춰내서 아니라고 얘기를 해줘야 하는데 그걸 못하고 있잖아. 잘못된 거 알면서도 누가 얘기하지 않으면 그건 결코 잘못된게 아니거든. 결국 세워질 망정, 그게 재현되지 않으려면 방지하는 차원에서도 누가 계속 잘못됐다고 해줘야 돼.”

2014년 대법원은 콜텍의 해고노동자들의 해고를 확정했다. 사실상의 사법적 결정은 다 끝난 셈이다. 그럼에도 계속 투쟁을 이어가는 것은 희망이 있어서일까? 경봉씨는 “희망을 좇아서 하는 건 아니”라고 잘라 말했다. 다만 “잘못된 것이니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누가 봐도 이건 법 결정이 잘못됐다는 건 누구나 인정하는 거잖아. 알려야하니까 남아서 하는거지. 법원 결정됐다고 해서‘그래 잘했어’ 하고 끝나는 게 아니잖아. 지금 흑자는 나고 있지만 미래에 다가올지 모르는 경영상 위기로 해고 가능하다면 대한민국에 남아있을 회사가 어딨어? 솔직히 말해서 돈 가지고 법을 사는 거잖아. 해고할 때 회사에 경영 위기가 있어야 하잖아. 해고 회피 노력 했느냐. 근데 100억 이상 흑자 내고 있는데 문 닫을 경영상 위기가 있는 회사냐 이거지. 전혀 아니잖아. 걱정되는 건 우리 판례를 하이디스든 이런 데서 다 쓸 거 아니야. 그럼 안되는 건데.”

김씨는 이어 사법부에 대한 강한 불신도 드러냈다. 그는 2014년 해고를 확정한 대법원이 ‘점집’ 같았다고 말했다. “사법부는 점집도 아닌데 점짐 행세 하는 게 큰일이지. 신문 보면 비리 제일 많이 걸려있는 게 사법부 아니야. 이런 사법부를 누가 믿겠냐고. 전관이기만 하면 다 이기게 해주고 이게 뭐야. 고등법원에서 완벽하게 승소했는데 대법원에서 미래 다가올 경영 위기 이거 인정된 거 아냐. (노동자들이 전관예우 썼다면) 이기고도 남았지. 누굴 쓰고 안 쓰고 떠나서 올바른 사법부였다면 100프로 이겼지. 고등에서 완벽하게 이겨서 올라간 게 대법에서 뒤집어지기가 쉽냐고. 중립이란 건 없어 세상에.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에는 중립이라는 건 없어. 자본은 감추기 위해 있는 거고 우리는 들추기 위해 있는 거잖아. 감추는 놈이 이길 확률이 많지. 찾으려는 놈이 이길 확률이 높겠어? 자본 손을 들어주는 나라에 무슨 기대가 있겠냐고. 그래도 워낙이건 아니다 싶으니까 투쟁 하는 거지.”

한참 이야기를 나누다 시계를 보니 2시간 가까이 흘러있었다. 노트북 배터리는 ‘완전히’ 충전됐다. 경봉씨의 스마트폰은 아직인 듯 했다. 더 있을 것인지 묻자 그는 “응 그럼. 이거 핑계 삼아 있는건데”라며 웃었다. 그리고는 “미안하네 도움이 돼야 하는데 괜히 동문서답이나 하고. 한 말 또 하고 한 말 또 하고 미안해요”라며 연신 미안해했다. 경봉씨를 두고 농성장으로 돌아왔다. 농성장에는 이인근 콜텍지회장과 서너명의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5시에 있을 공대위(정식명은 콜트콜텍기타노동자 부당해고문제의 사회적 해결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 회의를 위해 모인 사람들이라고 했다. 공대위는 문화연대 등 여러 사회단체 회원들과 노동당 및 정의당원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날 회의에서는 김무성 전 대표의 사과와 향후 투쟁 계획에 대해 이야기할 예정이었다. 회의 시작 전 이인근 지회장(51)과 이야기를 나눠보기로 했다.

◇ 이인근 콜텍 지회장

[민주공화국-장기농성장] 투쟁 10년··· "그래도 우리에겐 내일이 있다"

■ “노동문제는 자기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역시나 첫 대화 주제는 ‘더위’였다. 도심 한복판 여의도에서 처음 맞는 여름은 뭐가 달라도 다르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심플’했다. “더워요.” “이 주변에 보면 빌딩 밖에 없잖아요 나무 숲도 없고. 그러다보니 지열이 아스팔트에서 올라오는 지열이 상당히 뜨겁고 바람 자체도 뭔가 좀 숲에서 불어오는 신선한 바람이라기 보다 후텁지근하면서 매캐한 공기가 여의도 빌딩숲의 삭막함을 더욱 더 절실하게 느끼게 해주는 거 같아. 거기에다 오가는 사무직 노동자들의 무관심함. 이게 결코 우리의 문제만이 아닐 건데 어떻게 저렇게 철저하게 무관심할수가 있나? 그런 것에서 오는 아쉬움이나 섭섭함 같은 게 있어요. 그런 것들이 같이 곁들여지면서 더욱더 삭막하고 쓸쓸하고 외롭다는 생각을 더 많이 하죠.”

10년간 투쟁을 이어온 그에게 여의도 농성은 이전 농성들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 “도심 한복판에서 하면 뭔가 다를 거 같지만 다르지 않아요. 천막 같은 게 차려지면 왜 차려졌는지 저 사람들이 요구하는 건 뭔지 이런 관심을 시민들이 보여주면 구석에 있는 것보다 대한민국 정치 1번지라는 곳에 나와서 하니 시민들이 관심 갖는다고 생각을 할 수 있을 건데 전혀 그런 게 없어요. 거기 있을 때나 여기 있을 때나 그냥 한 번 쳐다보고 말아. 다 자기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노동문제는.”

하지만 농성장을 꾸준히 찾는 연대자들도 분명 존재한다. 이 지회장은 그 사람들이 있어 계속 버틸 수 있다. “그런 분들로 인해 삭막함 외로움 이런 것들이 미약하게나마 해소가 돼요. 우리가 인원이 많지 않다보니 할 수 있는 것도 없고요. 꾸준히 찾아주는 분들이 있어서 그 힘으로 계속 해나갈 수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물론 꾸준히 오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진 않아요. 오늘은 회의하는 날이고 해서 많은 사람들이 온 건데. 사실 그렇게 많이 찾아오진 않아요.

길어진 투쟁은 이제 이씨의 생활이 됐다. 그래도 그에게 후회나 아쉬움은 없는 듯 보인다. “내가 선택한 거니까. 만약 내가 하기 싫다고 하면 언제든 그만둘 수 있잖아. 단지 가족들에게 미안하죠. 죄스러움도 있고요. 나같은 경우는 처음 투쟁시작할 때 큰애가 중학교 1학년, 작은애가 초등학교 5학년이었어요. 10년이 지난 지금 큰애는 대학원 졸업했고 작은애는 고등학교 졸업하고 취업했고. 그러는 동안 아빠로서 역할 이런 것들을 못해준 것에 대한 죄스러움이 있어요. 이 일로 인해 이혼을 하다보니 가정을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한 죄스러움도 있고요. 그런 게 아쉽고 안타깝죠.”

후회는 없지만 화날 땐 있다. 이 지회장은 그들의 투쟁이 왜곡될 때 가장 화가 난다. “간혹 그런 분들 있어요. ‘해고 됐으면 다른 직장 찾으면 되지 10년동안 이게 뭐하는 짓이냐’ 하는 사람 있어. 그럴 때 울화가 치밀죠. 그걸 몰라서 안 하는 건 아니잖아요. 물론 얼마든지 그 말대로 때려치우고 다른 일자리 찾아서 갈 수도 있지만 언제까지 이런 걸 반복해야 하냐고요. 내가 다른 곳 간다치더라도 거기서 해고당하지 말라는 법도 없잖아. 거기서 해고되면 또 다른 직장 찾아야된다? 그건 아니잖아. 우리가 이 회사가 법에서 정한 것처럼 경영이 어려워서 노동자들을 정리해고 한 것도 아니고 분명 흑자기업이고 부채도 없는 건실한 기업인데 누가 보더라도 노조 와해시키기 위한 거잖아. 이런거에 굴복할 순 없잖아요. 정치인이나 당시 집권여당 대표였던 사람이 알지도 못하면서 회사 망하게 한 파렴치한으로 몰아버릴 때 화가 나죠.”

그래도 이 지회장은 노조활동을 통해 세상을 다시 보게 됐다. “노조 하기 전엔 그냥 ‘나만 아니면 된다’고, ‘나와 내 가족만 잘 먹고 잘 살면 되지’ 라는 생각하고 살았어요. 사회 문제에 대해서 크게 신경도 안 쓰고. 그랬다가 노동조합 활동을 하면서 ‘한 40여년 살았던 인생이 잘못 산거였구나’ 생각했죠. 입으로는 더불어 사는 세상이라고 이야기 하면서 속으로는 나만 생각하는 이기주의자였다는 반성을 많이 했어요.”

■ “대한민국에서 노동자로 산다는 건 비참한 일”

이인근씨는 “대한민국에서 노동자로 산다는 건 비참한 일”이라고 한숨을 쉬었다. “왜 나는 금수저를 못 물고 태어났을까. 한국 땅에서 노동자로 산다는 것이 참 너무 힘들고 비참한 거 같아요. 쭉 지금까지 노동자들의 역사였던 거 같아 이게. 해방이 되고 이승만 정권때도 그랬고. 박정희 정권땐 더 심했고. 노동자들의 삶이 행복하고 희망을 찾는 게 아니라 단지 자본가들의 이윤 추구의 도구였을 뿐이죠. 그리고 권력유지의 도구로밖에 활용되지 못한거 같아요. 얼마 전에 교육부 나향욱이 한 얘기 있잖아요. 민중은 먹고 살게만 해주면 된다고. 개돼지라고. 노동자 민중 스스로가 그런 인식을 심어온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좀 하게 되더라고요. 예전에도 그랬고 사실상 먹고 살 수 있게만 해주면 별 탈이 없었잖아요. 박정희 때도 그랬고 그렇게 탄압을 당하면서도 뭔가 잘 살게 해준다는 믿음 하나로 자기가 본인들이 착취 당한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한채 그냥 그 말만 믿고 왔던 거잖아요. 그러나 나라에서 이야기했듯이 성실하게 일해도 나아지는 건 없는데도 이의제기를 하거나 바꾸려는 그런 것들을 노동자들 스스로가 하지 않았다는 부분이 저 위에 권력층으로 하여금 그런 생각을 더욱 더 공고하게 하지 않았나 생각해요.”

그는 이어 분배 없이 축적만 이루어지는 사회 구조를 비판했다. “많은 사람들이 알다시피 박정희 (정권) 하에서는 ‘지금은 분배의 시기가 아니다. 축적의 시기’라고 이야기 하며 민중들 착취했잖아요. 근데 여전히 분배는 이루어지지 않고 자본 축척만 계속 행해지고 있다는 거지. 그런 것들을 이 정당에서도 용인을 하고 있는 상태고. 그러다보니 자본은 더욱 비대해지고 민중들의 삶은 하나도 나아진 게 없는 거죠. 여전히 먹고 사는 걱정하고 아이들 교육 걱정 하고. 아예 젊은이들이 꿈이라는 걸 꿀 수 없는 상태 아니에요? 흔히들 이야기하는 걸 들어보면 ‘그래도 그땐 먹고는 살았다. 근데 지금은 먹고 살기조차 힘들다’라는 이야기들을 많이 하더라고요.”

콜트·콜텍 해고노동자들의 여의도 농성장 모습. / 임재춘씨 제공

콜트·콜텍 해고노동자들의 여의도 농성장 모습. / 임재춘씨 제공

■ 연대하는 이유? “인간의 존엄성 회복하기 위한 투쟁이니까요”

콜트·콜텍 해고노동자들의 연대 활동은 투쟁사업장에 머물지 않는다. 제주강정마을과 밀양송전탑 등 노동문제가 아닌 사회 문제에도 적극적으로 나선다. 그 이유가 궁금했다. “저는 노동자들 투쟁, 송전탑 투쟁, 강정 투쟁. 이런 것들이 어떻게 보면 각각의 투쟁일 수 있지만 크게 보면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하기 위한 투쟁이라고 보거든요 이미 자본주의 때문에 인간의 존엄이 자본에 잠식되어버린 그런 상황인거잖아요. 인간 존엄성보다 물질이 우선인 그런 사회에서 계속 민중들은 탄압받고 산거잖아요. 그런 측면에서 보면 하나의 인간성 회복하기 위한 투쟁이죠. 다같이 연대해서 인간 존엄성 찾고 잘못된 체제도 바꿀 수 있지 않나 생각해요. 노동자들 투쟁 역시도 연대 할 수밖에 없는게, 우리 봐서 알겠지만 나 혼자 싸워서는 자본을 이길수가 없어요. 이미 법도 자본 밑에 있는 게 여실히 드러난 이런 시점에서 각개전투로는 돌파하기 어렵다고 봐요. 투쟁하는 노동자들만이라도 같이 모여서 싸우자 해서 공동투쟁도 하는거고요.”

그에게서 각개전투라는 말이 나온 김에 ‘각자도생’이 유행어가 된 현실에 대해 물었다. “비참한거죠. 복불복 마냥‘나만 아니면 되’ 이런거잖아. 너무 슬픈 우리 현실이 아닐까 싶어요. 왜냐면 나 살자고 내 옆 동료를 밟아야 하고 이런 비정한 사회에 우리가 살고 있는 건데 결국 그렇게 되면 언젠가는 나도 살 수 없다는 거지. 이기주의가 심해지는 게 많이 안타까워요. 나도 애들한테 항상 말하지만 사람이랑 더불어 사는거에요. 나 혼자 살 수 없어요. 같이 뭔가를 살기 위해 노력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결코 어느 누구 하나도 살아날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하지요. 권력과 자본은 계속 뭉치질 못하게 하는 거잖아요 우리를. 그렇게 되지 않도록 투쟁하는 노동자들이 호소를 해야되는 거고. 지금 노조 파괴 일어나고 있잖아요? 지금은 부품 위주인데 이걸 놔두면 어디로 가겠어요? 완성차로 간다는거죠. 그러니까 이건 당사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사업 전반의 문제라는 거에요.” 그는 정부에서 추진하고 있는 노동법 등이 각자도생을 부추기고 있다고 보았다. “나향욱도 이야기 하잖아요. ‘나도 99%에 속해있다’고. ‘하지만 나는 1%가 되기 위해 노력한다’고. 그런것처럼 ‘계속 같이 뭉쳐있으면 개돼지가 될 수 밖에 없다’, ‘아부를 해서라도 올라가야된다’ 뭐 이렇게 생각하는 거겠죠. 노동법 개악문제도 그런 거잖아요. 저성과자가 안 되기 위해서는 사장한테 아부를 하든지 찍소리 않고 시키면 시키는대로 일할 수 밖에 없는. 그런 것들이 단결을 해치고 개인이기주의·기회주의를 부추기고 있어요.”

2015년 1월 정리해고 비정규직법 전면폐기를 위한 오체투지 행진단이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쌍용차 해고자 복직과 정리해고 철폐를 요구하고 있다. 이날 오체투지 행진에는 콜트-콜텍 해고노동자와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스타케미칼 정리해고 노동자 등이 참여했다. /강윤중 기자

2015년 1월 정리해고 비정규직법 전면폐기를 위한 오체투지 행진단이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쌍용차 해고자 복직과 정리해고 철폐를 요구하고 있다. 이날 오체투지 행진에는 콜트-콜텍 해고노동자와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스타케미칼 정리해고 노동자 등이 참여했다. /강윤중 기자

■ “회사가 문을 닫는다는 걸 아침에 출근해서야 알았어요”

이인근 지회장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도 아니고 법치국가도 아니다. 권력을 가진 부류들에 의해 움직이는 독재국가”라고 말했다. “국민들은 사실상 국민으로서 지켜야 할 의무를 다했어요. 다했고 다하고 있고. 그런데 국가는 국가로서의 의무를 사실상 방기하고 있는거죠. 국가는 국민들의 행복할 권리를 보장해줘야 하잖아. 근데 과연 대한민국 국민이 행복하냐? 그렇지 않다는 거죠. 국민은 의무를 다 수행하고 있어. 국방의 의무 납세의 의무 교육의 의무. 근데 국가는 아니라는 거지. 국가로서 의무를 상실한 국가. 이 국가가 과연 민주공화국이고 주권이 국민한테 있다고 할 수 있는건가? 투표권 하나 행사한다고 해서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고 할 순 없는 거잖아. 철저히 거대 자본과 권력자들만을 옹호하는 국가라고 생각해요. 그런 국가 안에서 국민은 개돼지가 될 수 밖에 없는거지. 국민 위에 군림하니까.”

그는 회사가 문을 닫는다는 사실을 당일 아침 출근하고나서야 알았다. “저희는 몰랐어요 회사가 문을 닫는지도 몰랐고. 아침에 출근했다가 공고문 보고 알게 된 상황이었다는 거죠. 그런데도 이런 것들이 법에서는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거죠. 노조와 충실한 협의해야 한다는 근기법(근로기준법) 조항이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았어요. 긴박한 경영상 사유가 있어야 되는데 법원 판결은 아니었죠. 법관 스스로가 법조항을 인정 안 하는 꼴이 된거잖아요. 앞으로 기업이 적자가 날 지 흑자가 날지 누가 알겠어요. 그렇지 못하다는 거지. 그러한 것들이 자꾸 기업인들로 하여금 안하무인이 되게 하는 하나의 발판이 된다는 거죠. 그리고 그렇게 법을 지키지 않는 기업인들에 대한 처벌이 너무 미약하고.”

■해고노동자의 주말

농성장에도 주말은 찾아온다. 이인근씨를 비롯한 4명의 콜트·콜텍 해고노동자들은 주말이 되면 각자 집으로 간다. 이인근 지회장의 주말은 어떤지 궁금했다. “다른 분들은 집에 가는데 저는 이혼했고 해서 원룸 하나 얻어서 있는데 인천 연수동에. 가면 그냥 안 나와요 밖에. 주말 내내 그냥 방 안에 틀어박혀서 자다가 티비 보다가 그것만 하고 있어요. 그러다 간혹 애들보러 한번씩 대전 내려가고. 애들 만나며 그냥 밥 한끼 먹고 그동안 지낸 얘기 하고 헤어지고요.”

이 지회장이 마지막으로 딸과 아들을 만난 것은 지난 4월. 못 만난지 벌써 4개월째였다. 그의 딸은 여전히 취업준비중이고 아들은 방위산업체에 다니고 있다.

일주일에 단 이틀이지만 아스팔트 바닥이 아니라 제대로 갖춰진 집에서 잠을 잔다는 건 큰 위안이다. 그는 “적어도 농성장을 떠나있는 동안만큼은 이 문제를 생각을 안 할 수도 있어 심적으로도 편안하다”며 “이후에 대한 것도 쉬면서 생각을 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나름의 취미생활도 한다. 이 지회장은 짬짬히 책을 읽는다. 농성장 한구석에 놓여 있던 ‘덕혜옹주’는 최근 이 지회장이 읽기 시작한 책이다. 가끔은 영화를 보러 가기도 한다. 그는 “며칠 전에 ‘비거스플래쉬’라는 영화를 봤는데 아리까리 하더라”며 줄거리를 설명했다. 농성자들은 주말도 없이 투쟁만 할 것이라는 편견이 와장창 깨지는 순간이었다. 그는 투쟁을 시작하며 오히려 책을 더 많이 읽게 됐다고 말했다. “책을 많이 읽은 거 같아요. 그거 하난 좋아. 이거 하면서 ‘모방범’ , ‘화차’ 같은 일본 추리 소설 거의 다 읽었고요. 지금은 책 읽는 게 유일한 낙이죠. 조정래씨 ‘풀꽃도 꽃이다’ 읽었고. 최근엔 조정래씨 책 많이 읽었어요. ‘한강’도 읽었고요.”

◇ 임재춘 조합원

임재춘씨(54)를 다시 만난 건 다음날인 11일 오후 3시 서울 여의도 산업은행 본점 건물 옆 벤치에서였다. 햇볕이 가장 강한 오후, 농성장 사람들은 더위를 피해 각자의 ‘명당’으로 이동한다. 이 벤치가 재춘씨가 자주 찾는 피서지인 셈이다. 만나자마자 재춘씨는 노란색 책 한 권을 내밀었다. 그가 오마이뉴스에 연재한 글을 엮어 올 봄 출간한 책 ‘우리에겐 내일이 있다’였다. 책 첫 페이지에는 “최민지 기자님께. 새로운 한국 기사을 위하여. 콜트·콜텍 투쟁 3479일. 막말 여의도 농성 311일. 앞으로 아픈 사람 아픈 기사 쓰기 끝까지 함께. 2016년 8월 10일 임재춘”이라고 쓰여져 있었다. 그는 “어제 주려고 했는데 못 줬다”며 “친구들한테 많이 사라고 광고 좀 해달라”고 웃으며 말했다.

임재춘씨는 콜트·콜텍 해고노동자들의 복직투쟁기를 엮어만든  책 ‘우리에겐 내일이 있다’ 를 기자에게 선물했다. / 최민지 기자

임재춘씨는 콜트·콜텍 해고노동자들의 복직투쟁기를 엮어만든 책 ‘우리에겐 내일이 있다’ 를 기자에게 선물했다. / 최민지 기자

■ 투쟁 10년…“솔직히 지겨울 때도 있죠”

안부부터 물었다. 재춘씨는 “일상이 똑같다”고 말했다. 그는 아침에 일어나 아침시위를 하고 점심에는 중식시위를 한다. 저녁 연대가 있으면 연대를 다니고 문화제에도 간다. 재춘씨는 “솔직히 지겨울 때도 있다”고 고백했다. “지겹단 생각 할 때도 있지. 10년 하다보면. 힘든 일 계속 반복하니까. 힘들어. 짜증도 나고 날씨도 더운데. 사람이나 많으면 괜찮은데 찾아주는 사람도 없으니까. 그래도 연대 때문에 나름 활력을 많이 얻어.”

그의 삶은 해고를 당한 뒤 180도 달라졌다. 그는 “일할 땐 힘들어도 좋았어. 노동자로 산다는 게 그래. 아침에 일찍 출근해서 저녁에 늦게 퇴근하니까 일은 힘들지. 그래도 ‘일만 하면 먹고 살겠다’, ‘가족들 먹고 살겠다’ 생각하면서 살았지. 밥 세끼 먹는 게 지장 없으니까 편했어. 관리자로 있을 땐 ‘저 사람들이 왜 일을 늦게 할까?’ 그런 생각도 했었고. 아까도 말했지만 단순하거든, 노동자들은. 시키면 시키는대로 하고. 월급날 돈만 받고 그냥 쉬면 돼. 순진하게 안 따지니까 사장들이 악용을 하는 거지. 법 같은 거 필요없다고. 옛날부터 습관이 됐나봐. 우리 세대는. 노동법을 어릴 때부터 가르쳐야 돼. 어른들은 안 배우고 무식하니까 군대식으로 시키는 대로 했겠지만 애들한테는 가르쳐야 된다고. 옛날에 해고 당하기 전에는 이런 거 신경 하나도 안 썼거든. 아침에 출근해서 일만 하고 친구들이랑 술 한잔 먹고 들어가서 잠만 자고 그런 생활의 연속이었어. 투쟁하면서 사회에 대해 많이 알려고 하고 ‘노동법이 뭔가’ 또 ‘사회가 뭐가 잘못됐나’ 이런 생각도 하고. 그런 게 행복이라면 행복인거지. 우리가 알린다는 거. 옛날에는 그런 거 전혀 없었어.”

그는 이제 예전처럼 ‘정’을 느끼긴 쉽지 않다고 말했다. “내가 해고 당하면서 느꼈어. 사실 시골에는 공장이 없잖아 노동법이 필요가 없어. 주말에 왜 쉬어야 하는지 몰라. 시키면 시키는대로 하고 주면 주는대로 받고. 회사 다니면서 안 잘리고 잘 다니는 애들 있잖아. 그런 애들은 사회를 좋게 봐. 당한 게 없으니까. 노동법에 대해 아는지 모르겠지만 내색을 안 하지. 잘릴 수도 있으니까. 나만 해고 안 당하면 되고 나만 월급 많이 받아서 우리 식구 잘 먹고 살면 되지. 이렇게 생각해서. 옛날 같지 않아. 정이 없어져. 옛날엔 물도 나눠마시고 했는데 지금은 그런 거 하나도 없잖아. 어딜 가나 다 똑같아.”

콜트콜텍 해고노동자들도 마찬가지다. 10년이나 이어진 투쟁에 많은 동료들이 떠났다. “서로들 먹고 살기 힘들다보니까 (공동체 문화)가 거의 없다 보면 돼. 지금은 너무 오래되고 힘들다보니까 못하고 있는 거지. 한 달에 한 번 하는 해고노동자 모임엔 적으면 5~6명에서 많으면 10명 정도의 인원이 참가한다. 여의도에서 농성하는 네 사람을 빼면 사실 거의 없는 셈이다. ”그래도 서로 미안해 해. 우리는 그 사람들한테 미안하고 그 사람들도 우리한테 미안해하고. 다 이해하지.” 옛 동료 대부분은 비정규직으로 일을 것이라고 했다. “자세한 건 모르지만 여자면 식당같은 데서 일할 것이고. 시골은 다 비정규직이지 정규직이 별로 없어. 정규직 되려면 투쟁하는 게 너무 힘들기 때문에 눈치보고 있지 않을까. 사회가 자꾸 비정규직을 양산하잖아.”

■ 아이들도 자랐다

재춘씨에겐 딸이 둘 있다. 그가 해고됐을 때 큰딸은 고2였다. 재춘씨는 “큰딸이 학자금 대출을 받으며 대학을 졸업한 후 알바를 하다가 또 신협 다니다가 계약 해지돼서 글 쓸려고 준비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그는 “딸이 계약직으로 2년 일하다가 해지됐다”며 “은행도 비정규직 있다는 걸 그 때 안 거야. 은행은 다 정규직인 줄 알았다”고 말했다. “작은 애는 여상 나와서 천안 공단에서 일 하다가 3교대 하다가. 그만두고 건설회사 회계하고 총무일 하고 있어. 어떻게 생각하면 작은 애가 더 학교는 안 다녔어도 더 잘됐지. 지금 방송통신대 다니고 있고.”

다른 해고노동자들과 마찬가지로 재춘씨 또한 주말에는 집에 간다. 그의 주말은 여느 평범한 사람들과 다르지 않다. “딸래미들이랑 밥 같이 먹을 때도 있고. 밀린 빨래하고 살림하고 반찬 해놓고. 친구들 만나러 다니고. 사회생활 하는 거지. 가족도 만나고 친구들 만나고. 나름 바빠. 봄하고 가을 되면 결혼식도 찾아다녀야 되고. 사실 몇 년 동안 못갔어, 돈 때문에. 그래도 요즘엔 좀 가려고 해. 물론 부담 가는 건 사실이야. 빚만 늘어. 근데 안 갈 순 없는 거야. 냉정하게 사회하고 연결 다 끊고 살 순 없는 거 아니야?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하는 사람 있을 거고 아닌 사람 있을 거고. 나는 안 빼놓고 다니려고는 해. 집안 행사는 필히 찾아다녀야 하고. 장남이다 보니까.”

■ 왜 연대하냐고? “약자들의 반란이니까”

이때 임재춘씨의 스마트폰이 울렸다. 재춘씨는 “내일 아니면 모레 갈거야”라는 말을 남긴 뒤 전화를 끊었다. 어딘가 갈 계획이 있는 듯해 슬쩍 물었다. 그는 “갑을 오토텍 집회에 간다”고 했다. 충남 아산에 위치한 갑을 오토텍은 수년간 노사갈등이 이어진 곳으로 지난 7월 직장폐쇄 이후 노사가 대치중이다. “내일 대전 내려가는 길이니까 들려 볼라고. 가는 길이라. 그렇게 계속 연대를 해야 우리 상황도 알리고 거기서도 연대 오고 하는 거니까. 투쟁사업장이 안 생기면 상관이 없어. 근데 생기잖아. 사회약자들 위해 연대하는 거야. 약자들의 반란이라고 생각하면 돼. 사람이 많이 모이면 아무래도 이슈화되고 인터넷에서도 떠들고 하니까. 강정(마을)만 해도 미군 해군 기지가 과연 정당한 걸까? 우리는 다 알고 있지만 모르는 사람이 더 많아. 그러니까 알려야 해.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이 보게 하려고 모이는 거야. 경찰은 1000명 모이면 200명 밖에 안 모였다고 하거든. 거의 3분의 1로 만들어. 1000명 모여도 200명 250명만 왔다고 해.”

지난 2013년 콜트콜텍악기 해고노동자들이 인천 부평의 한 연습실에서 다음달 대학로 소극장 무대에 올릴 연극 ‘햄릿’을 연습하는 모습. 카키색 ‘노 콜트’ 티셔츠를 입은 사람이 임재춘씨다. /정지윤기자

지난 2013년 콜트콜텍악기 해고노동자들이 인천 부평의 한 연습실에서 다음달 대학로 소극장 무대에 올릴 연극 ‘햄릿’을 연습하는 모습. 카키색 ‘노 콜트’ 티셔츠를 입은 사람이 임재춘씨다. /정지윤기자

그는 “일이 하고 싶어 죽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일자리를 만드는 것이야말로 권력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일자리 창출. 좋은 기업이 해외로 안 나가도록 막아주는 것. 그게 정치인이나 권력자들이 해야 하는 일인거지. 이건 우리 일이 아니잖아.”

“언제쯤 이 싸움이 끝날까”하는 질문을 던지자 “기자들이 맨날 물어보는 거야”라는 답이 되돌아왔다. “우리가 대한민국에서 가장 오래된 투쟁인데, 정치인들이 나와서 사장 압박하던가 그런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해. 그래야 끝나. 해결 방법은 있지. 박영호가 공장 다시 설치해서 돌리는 거지. 그걸 안 하려고 하니까 문제고. 나라에서도 공장 라인 까는 게 이익일걸. 일자리 창출이 얼마나 되는 건데. 우리야 빨리 일하고 싶은게 사실이고. 정리해고 시키는 법을 없애야 해. 아니면 해고시키면 일자리를 만들어 주던가. 사실 적자 때문에 해고시키는 게 아니거든. 해고가 정당한 해고는 하나도 없어. 다 부적절하게 이루어지니까 그걸 없어야 한다고 생각해. 일자리 만들어주는 게 나라야. 그게 역할이라고.” 지금은 그 역할을 전혀 못하고 있다고 했다. “오히려 노조 못하게 막고. 회사를 들어가야 국민연금 내고 4대 보험 들고 하는 건데. 월차도 받아가면서. 근데 지금 젊은 애들 알바만 하고 있잖아. 멀쩡한 공장 다 없애려고 하니까 문제가 되는 거 아니야.”

노동자로서 대한민국에서 산다는 것이 어떤지 묻자 임씨는 “참 힘들다”를 세 번 반복했다. “시간이 없고 문화생활도 못하게 하고. 돈이 없기 때문에 야간(근무) 잔업 안 하면 안 되게 만들어놨고. 주말에 시간도 없어서 가족들이랑 놀지도 못하게 만들어 놨고. 월급이 그만큼 작단 얘기지. 내가 월급받을 때 안 받을 때 차이를 이야기 하자면, 월급 받을 땐 가족들 행복하게 해줄 수가 있지만 해고 당하고 보니까 완전히 나라가 빨갱이로 몰아붙이고 생활을 못 하게끔 만들어버렸어. 민주주의 국가인데 말을 못 하게 만들고. 자유가 너무 없어. 그리고 세금도 어느 정도 떼는 건 좋은데 해고 시키고 나서 국민연금 없어지지 가족이 파탄나지 세금 내고 싶어도 돈을 못 버니까 세금 못 내고. 가족끼리 밥 먹는 것도 못 먹고. 세금이 안 걷힐 수밖에 없잖아.”

대법원 판결이 끝난 상황에서도 투쟁을 계속하는 이유를 들어봤다. “법은 법이고 사회 정의는 정의고. 법이 끝났다고 안 싸우면 계속 그런 판결 내릴 거 아냐. 분명 잘못됐다는 걸 우린 알잖아. 도와주는 사람들도 많이 있고. 그런 것 때문에 더 악착같이 하는 거 같아. 아무도 안 싸우면 사회는 똑같아져. 변하는 거 없고. 조금이라도 정의가 살아 있다면 누구라도 나서서 고쳐주지 않을까. 조금이라도 바꿔나가는 게 우리들 할 일인 것 같고.”

헌법 1조를 아는 지 물었다. 그러자 재춘씨는 망설임없이 1조 1항을 읊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이 명제에 동의하냐 묻자 그는 이번에도 망설임없이 대답을 쏟아냈다. “우리한테 물어보면 대답은 하나야. 하나도 안 되고 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 아니고 독재국가다. 부정부패의 나라이다. 그렇게 바꿔야 되는 거야. 권력, 경제인 돈으로 좌우되잖아. 돈이면 판사도 사고 검사도 사고 다 사잖아. 다 돈이야 돈에 눈 뒤집혔어 다들. 민주공화국이 아니지 우리는.”

■ 1년만에 받아낸 사과… 그러나 투쟁은 계속된다

지난 8월 26일, 김무성 전 새누리당 대표가 국회 정론관에서 “콜트 강경노조 발언”에 대해 사과하고 있다./ 김창길 기자

지난 8월 26일, 김무성 전 새누리당 대표가 국회 정론관에서 “콜트 강경노조 발언”에 대해 사과하고 있다./ 김창길 기자

김무성 전 새누리당 대표의 사과 기자회견 자리에서 해고노동자 임재춘씨가 김 전 대표의 가슴에 콜트 뱃지를 달아주는 모습 / 김창길 기자

김무성 전 새누리당 대표의 사과 기자회견 자리에서 해고노동자 임재춘씨가 김 전 대표의 가슴에 콜트 뱃지를 달아주는 모습 / 김창길 기자

▶ [관련기사] 김무성, "콜트 노조에 공개 사과하겠다" ▶ 김무성, "콜트 강경노조 발언은 잘못" 법원 강제 조정따라 결국 사과

지난 8월 26일 김무성 새누리당 전 대표가 국회 정론관 마이크 앞에 섰다. 콜트·콜텍 여의도 농성의 계기가 된 “콜트 강경노조” 발언을 사과하기 위해서였다. 김 전 대표 옆에는 방종운 콜트 노조지회장과 이인근 콜텍 노조지회장이 나란히 섰다. 김 전 대표는 이 자리에서 “지난해 9월3일 당 최고위원회의에서‘기업이 어려울 때 고통을 분담하기는커녕 강경한 노조가 제 밥그릇 늘리기에만 골몰한 결과 건실한 회사가 아예 문을 닫은 사례가 많다’고 하면서 콜트악기와 콜텍을 언급했다”면서 “신중하게 사실관계를 확인했어야 하나 그렇게 하지 못한 잘못이 있다”고 말했다. 이어 김 전 대표는 “이 발언은 전날 모 언론의 기사에 상세히 보도된 내용을 보고 이를 기초로 발언한 것”이라면서 “콜트악기와 콜텍의 폐업이 노조 때문이라는 잘못된 발언으로 부당 해고를 당하고 거리에서 수많은 시간 동안 고통을 받으면 살아가는 노동자에게 큰 상처를 준 점 사과한다”고 말했다.

콜트·콜텍 해고노동자들은 그리도 바라던 김 전 대표의 사과를 받아냈다. 그러나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농성자들은 사태가 완전히 해결될 때까지 노숙농성을 이어가기로 결정했다. 이들은 말한다. “포기하지 않는 한 우리에겐 내일이 있다”고.

다음은 김무성 전 대표의 사과문 전문이다.

■ 김무성 전 대표의 사과문

저는 2015년 9월 3일 국회에서 열린 새누리당 최고위원회의에서 노동개혁과 관련해 “기업이 어려울 때 고통을 분담하기는커녕 강경한 노조가 제 밥그릇 늘리기에만 골몰한 결과 건실한 회사가 아예 문을 닫은 사례가 많다”며 여러 사례를 들면서 “콜트악기와 콜텍”도 언급했습니다.

이러한 발언은 그 전날인 2015년 9월2일자 모 언론의 기사에 상세히 보도된 내용을 보고 이를 기초로 발언한 것인데, 당해 언론이 사실 관계를 잘못파악해 보도함으로써 나중에 정정보도를 했습니다. 그 언론의 보도가 있었다 하더라도 제가 공식석상에서 발언할 때는 미리 신중하게 사실관계를 확인했어야 하나 그렇게 하지 못한 잘못이 있습니다.

당해 언론의 정정보도가 있고 나서 사실관계를 확인해보니, 콜트악기와 콜텍의 폐업이 노조 때문이라는 잘못된 사실의 발언으로 인하여 두 회사에서 부당한 부당한 해고를 당하고 거리에서 수많은 시간 동안 고통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는 노동자들에게 큰 상처를 준 점에 대해 사과합니다.

당해 언론의 보도 내용과 이에 기초한 본인의 발언으로 최근 콜트콜텍 기타 노동자들에 대하여 잘못된 사실들이 유포되고 있는 점에 대해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저는 평소 소신인 노동개혁을 얘기할 때마다 늘 노동계와 함께 하는 개혁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해 왔습니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저도 새누리당과 국회를 통해 현재 우리 사회에서 가장 오랫동안 부당해고 때문에 고통 받고 있는 콜트콜텍기타 노동자들의 문제가 해결될 수 있도록 관심을 가지고 노력할 것임을 밝혀두는 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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