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항부터 현대까지···서울 속 외국인의 공간은 어떻게 변했나읽음

김보미 기자
서울 종로구 혜화동이 ‘리틀 마닐라’로 불리게 된 계기는 조선 후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천주교 비밀 모임이 열린 성균관 반촌에 1909년 독일 베네딕토회가 백동수도원을 설립한 것을 계기로 혜화동 부근은 ‘독일인 마을’로 불렸다. 독일인이 떠난 자리에 생긴 혜화동성당은 필리핀 신자들을 위한 미사 장소가 됐다. 종교가 구심점이 돼 향수를 치유하려는 외국인들의 커뮤니티가 형성된 것이다. 혜화동에서 필리핀 상점이 열린 모습. | 서울역사편찬원 제공

서울 종로구 혜화동이 ‘리틀 마닐라’로 불리게 된 계기는 조선 후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천주교 비밀 모임이 열린 성균관 반촌에 1909년 독일 베네딕토회가 백동수도원을 설립한 것을 계기로 혜화동 부근은 ‘독일인 마을’로 불렸다. 독일인이 떠난 자리에 생긴 혜화동성당은 필리핀 신자들을 위한 미사 장소가 됐다. 종교가 구심점이 돼 향수를 치유하려는 외국인들의 커뮤니티가 형성된 것이다. 혜화동에서 필리핀 상점이 열린 모습. | 서울역사편찬원 제공

조선시대 개항 이후 일제강점기를 거쳐 근대화를 이루기까지 수도 서울에는 많은 외국인들이 들고났다. 출신지에 따라 모여 살며 집단 거주지를 만들기도 하고, 역사 변화에 따라 집단촌이 해체되기도 한다.

서울역사편찬원은 이 같은 역사 흐름을 담은 6편의 연구논문을 엮어 ‘서울 내 외국인 집단활동지의 역사’를 발간했다고 15일 밝혔다. 책에는 20세기 이후 중구 정동과 소공동, 용산구 미군기지 일대와 인근 한남동, 동부이촌동 등지에서 서양인, 화교, 미군, 일본인이 활동한 공간을 추적하고 있다.

우선 서양인들은 개항 초창기 주로 경운궁 부근 정동 일대에 자리를 잡았다. 정동길 주변으로 영국, 프랑스, 러시아, 독일, 미국 공사관 등이 설치됐고 학교, 병원, 교회도 들어섰다. 그러다 1904년 러일전쟁, 1905년 을사조약 이후 많은 서양인들이 조선을 떠났다. 일제강점기 서양인들은 땅값이 저렴한 서대문 밖으로 거주지를 옮겨 냉천정(냉천동), 죽첨정(충정로 일대)에서 경성부 밖인 연희면(연희동)까지 활동 공간을 확대했다. 연희전문학교 캠퍼스에는 새로운 도로, 상수도 시스템을 구축하고 다양한 주택을 건설해 선교사들이 이상향으로 삼았던 서양식 대학촌과 마을의 모습을 보여준다.

일제강점기 서울은 주로 청계천을 경계로 북촌의 조선인과 남촌의 일본인의 공간으로 분리됐다는 ‘이중도시론’으로 설명돼 왔다. 그러나 이번 연구에서는 서울 안에서 조선인과 일본인이 섞여 살 수밖에 없었던 접촉 지대를 강조한다. 토막민과 하녀가 일본인과 함께 살았던 대표적인 조선인으로, 일본인의 ‘보이지 않는 이웃’이면서 ‘타자화됐던 존재’라는 설명이다.

‘토막민’은 도심 외곽에 일본인들이 문화주택지를 개발한 공간에 원래 살던 주민들이다. ‘토막’(土幕)은 땅을 판 단면을 벽으로 삼거나 땅 위에 기둥을 세우고, 양철이나 판자로 지붕을 만든 원시 주택이다. 일제 때 처음 나타난 주거 형태다.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온 농촌 빈민들이 공동묘지나 공유림에서 군락을 이뤄 이 같은 토막촌을 형성했다. 남촌의 중·상류층 일본인 집에는 조선인 하녀의 방이 별도로 설치돼 있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1929년 일본인 또는 조선인 가정의 하녀는 1만6000명, 1940년에는 4만8051명에 달했다.

일제강점기 이전부터 군사기지가 위치했던 용산은 광복 이후에도 미군기지로 선정돼 오늘날에 이른다. 이번 연구에서는 기지 안팎의 미군 거주지 변화를 통해 생활 공간으로서의 용산을 조명했다.

유엔군사령부, 주한미군사령부, 미8군사령부가 용산기지에 함께 운영되면서 당시 한국 정부는 미군들의 숙소를 해결하는 것이 큰 숙제였다. 연구에 따르면 유엔군, 경제조정관, 외교사절 인사들이 가족을 일본에 거주시키며 주말마다 다녀오는 일이 늘어나자 이승만 대통령이 1956년 국무회의에서 “외인주택 단지를 시급하게 조성하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일본에서 이뤄지는 달러 소비를 한국으로 유도하기 위한 것이다. 이에 서울시 국민주택 건설 자금을 유용하면서까지 외인주택 건설은 무리하게 추진됐다. 한남동, 이태원, 이촌동을 중심으로 생긴 외인주택은 한남동 11번지 2대지에 위치한 현 유엔빌리지 등이 대표적이다.

이에 따라 미군의 거주공간은 일제 때와 달리 기지 밖까지 확대돼 용산에 사는 외국인들은 이전보다 더 많이 한국인과 생활 반경을 공유했다.

개항부터 현대까지···서울 속 외국인의 공간은 어떻게 변했나

조선 후기 천주교 비밀 모임이 열린 성균관 반촌에 1909년 독일 베네딕토회가 백동수도원을 설립했다. 이후 성당과 학교, 기숙사, 과수원 등 생활에 필요한 것을 갖춘 마을을 이뤘는데 당시 사람들은 이곳을 ‘독일인 마을’로 불렸다. 지금의 혜화동 부근이다. 독일인이 떠난 자리에 혜화동 성당이 들어서고 필리핀 천주교 신자들을 위한 미사 장소가 됐다. 종교가 구심점이 돼 향수를 치유하려는 외국인들의 커뮤니티가 형성되면서 지금은 ‘리틀 마닐라’가 됐다.

동부이촌동으로 대표되는 일본인 주거지는 의외로 역사가 길지 않다. 1945년 16만명에 달했던 서울 내 일본인(전국 70만명)은 해방 후 급감해 1965년 한일협정이 체결된 후에야 다시 늘었다. 1970년대 서울 외국인 인구의 17%까지 차지했다가 2010년 이후 7000~8000명(등록외국인 기준) 정도를 유지하고 있다. 이때 일본인들이 편리성과 보안을 이유로 선호한 동부이촌동, 한남동, 이태원 등지를 과거 ‘재팬타운’으로 불렀는데 일본인이 많아서라기보다 일본 식료품 상점이나 일본어가 가능한 점포가 많은 생활 환경이었기 때문이라고 책은 설명하고 있다. 최근 일본인 거주지는 마포구 상암동 등지로 넓어지고 있다.

화교들은 19세기 말 이래로 서울 소공동 일대에 가장 많이 모여 살았지만 해방 후 근대화 흐름에 따른 재개발과 함께 존재 자체가 축소됐다. 이 지역에서의 오랜 거주 역사를 인정받지 못한 채 1960년대 후반 일부 화교 지구로 축소되고, 결국 재벌들에게 자리를 내주며 소멸됐다.

이상배 서울역사편찬원장은 “2022년 서울에서 활동하는 생활 인구의 약 4.6%가 외국인”이라며 “이번에 출간된 책을 계기로 서울 속 외국인들의 활동 공간에 대한 역사적 시각이 확장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책은 서울시청 지하 1층 시민청 서울책방과 온라인 서울책방(https://store.seoul.go.kr)을 통해 구매할 수 있고, 서울 소재 공공도서관과 서울역사편찬원 홈페이지(https://history.seoul.go.kr)에서 전자책으로도 열람이 가능하다.


경향티비 배너
Today`s HOT
젖소 복장으로 시위하는 동물보호단체 회원 독일 고속도로에서 전복된 버스 아르헨티나 성모 기리는 종교 행렬 크로아티아에 전시된 초대형 부활절 달걀
훈련 지시하는 황선홍 임시 감독 불덩이 터지는 가자지구 라파
라마단 성월에 죽 나눠주는 봉사자들 코코넛 따는 원숭이 노동 착취 반대 시위
선박 충돌로 무너진 미국 볼티모어 다리 이스라엘 인질 석방 촉구하는 사람들 이강인·손흥민 합작골로 태국 3-0 완승 모스크바 테러 희생자 애도하는 시민들
경향신문 회원을 위한 서비스입니다

경향신문 회원이 되시면 다양하고 풍부한 콘텐츠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 퀴즈
    풀기
  • 뉴스플리
  • 기사
    응원하기
  • 인스피아
    전문읽기
  • 회원
    혜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