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 김현식의 4집 앨범이 재생 중인 턴테이블 옆으로 포크 그룹 시인과촌장의 앨범 <숲>과 록밴드 신촌블루스의 5집이 놓여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LP판을 보더니 잠시 멈춰 헤드폰을 쓴다. 음악을 들은 후 자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가사가 적힌 카드를 하나씩 골랐다. 김광석의 ‘편지’, 조용필의 ‘바람의 노래’ 등 1980~1990년대 감성이 담긴 구절들이다.
주말인 지난 27일 서울 서대문구 창천문화공원은 신촌이 가장 부흥했던 시절의 음악으로 가득 찼다.
같은 시각 바로 옆 스타광장에서는 (여자)아이들의 신곡 ‘클락션’이 나오자 50여명이 일제히 춤을 추기 시작했다. 간혹 굵은 빗줄기가 내렸지만 외국인·10대 청소년 등의 참가자들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K팝의 안무를 바로 떠올려 추는데 여념이 없었다.
창천공원~스타광장 골목에서는 매달 신촌의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축제 ‘신촌 랩소디’가 열린다. 블루스를 주제로 한 이날은 LP를 매개로 옛 신촌의 문화를 소개했다. 지난달에는 신촌을 아지트로 활동한 윤동주·기형도·최인호 등 문인들의 서적을 볼 수 있는 작가의 책장과 중고서점이 골목길에 마련됐다.
서울에서 가장 많은 대학이 밀집한 신촌은 음악다방부터 라이브클럽, 주점까지 청년 문화를 주도했던 공간이다. 들국화 등 지역에서 태동한 예술가도 많았다. 하지만 2000년대 초반 홍대 등 인근 상권으로 소비축이 이동하면서 활기가 꺾였다. 이후 먹자골목으로만 인식돼 젊은층 유입이 현격히 줄었다.
창천공원 주변으로 여전히 6~7개의 LP바(Bar)·주점, 10여개의 음악·춤연습실이 있지만 한번 줄어든 유동인구는 회복되는 못하고 있다. 서대문구가 최근 원인 찾기에 나선 결과 ‘신촌다움’이 사라졌다는 지적을 가장 많이 받았다.
서대문구에 따르면 이날 현장을 찾은 이성헌 구청장과 만난 신촌블루스의 보컬 엄인호씨는 “신촌에서 다시 블루스를 들으니 눈물이 날 것 같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에 서울시는 30~40년 자리를 지킨 역사가 남아 있는 상점과 랜덤 댄스·버스킹 등 자생적으로 생겨난 새로운 문화를 접목해 즐길거리가 있는 골목을 만들기로 했다.
특히 서울시가 지난해 지역 특성을 살려 로컬 브랜드 상권을 강화할 5곳을 선정했는데 서촌·이태원·수유동·천호동 자전거거리와 함께 신촌이 포함되면서 3년간 최대 15억원이 투입된다. ‘신촌뮤직’이라는 장르로 불린 역사적 예술 자원, 넓은 공간을 찾아 매주 광장에서 열리는 랜덤 댄스 경연 등 과거와 현재를 결합해 신촌의 색깔을 만드는 것이 핵심이다.
서울시 관계자는 “예를 들어 신촌의 유서 깊은 라이브 역사는 참여자가 주인공이 돼 즐기는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만들 것”이라며 “지역 역사·문화 자원을 재구성해 신촌 브랜드를 만들 수 있도록 지원하겠다”고 설명했다.
오는 9월 스타광장에서는 연세대 어학당 학생을 비롯한 외국인 대상 원데이 클래스를 연다. 숏폼을 찍을 수 있는 공간도 골목에 만든다. 해외에 ‘춤을 추는 공간’으로 신촌을 알리려는 계획이다. 인근 대학 밴드 동아리 공연과 버스킹도 주말마다 기획 중이다.
10~11월에는 신촌에서 시작돼 프랜차이즈로 확장한 식당의 메뉴를 맛볼 수 있는 거리가 만들어진다. 연세로11길의 치킨과 곱창, 연세로9길 주점 등 50년이 넘은 가게들이 주축이 된다. 연말에는 신촌에 뿌리를 둔 헌책방·중고서점을 중심으로 ‘신촌 글씨체’를 개발해 지역에 걸리는 현수막 등에 사용할 예정이다.
이 같은 움직임에 신촌·이대상가번영회도 적극 동참하고 있다. 공씨책방 장화민 대표는 “최근 소설·시집의 초판을 구하거나 문고본을 처음 접하고 신기해 구매하는 젊은층이 늘었다”고 했다.
이 서점은 1972년 경희대 앞에서 시작해 청계천·광화문을 거쳐 1991년부터 30여년간 창천동을 지키고 있다. 장 대표는 “지역 전체 유동인구가 많아져야 신촌의 문화를 알릴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