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 ‘과거사 재판’ 속도 낸다… 대법원장 임기 내 ‘정리’ 뜻

이범준 기자

‘아람회 간첩단’ 등 국가배상 사건 일제 판결

‘조봉암 재심’ ‘안기부 X파일’ 20일 선고키로

요즘 서울 서초동 대법원 청사 11~14층에는 한밤까지 불이 꺼지지 않는다. 부장판사급 재판연구관들이 보고서 작성에 몰두하느라 퇴근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13일 점심시간, 구내식당에 가기 위해 승강기에 오른 연구관들이 벌건 얼굴로 한숨을 토했다. “대법관들 합의가 완전히 확정되기 전까지는 검토를 계속하라는 지시야.” 이들은 점심을 마치고 곧바로 13층 회의실에 모여 쟁점 토론을 이어갔다.

‘이용훈호 대법원’이 과거사 정리에 속도를 내고 있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오는 20일 ‘조봉암 사건 재심’과 ‘안기부 X파일’ 사건을 선고하기로 했다. 지난달 공개변론을 연 뒤 불과 한 달 만이다. 대법원은 지난달 긴급조치 위헌 판결 직후부터 이들 사건에 대한 ‘조기 선고’를 계획한 것으로 전해졌다.

대법원 ‘과거사 재판’ 속도 낸다… 대법원장 임기 내 ‘정리’ 뜻

조봉암 사건은 1959년 대법원이 간첩 혐의로 기소된 조봉암에게 원심을 깨고 직접 사형을 선고한 사건이다. X파일 사건은 2005년 MBC 기자가 안기부의 불법녹취를 보도해 통신비밀보호법 위반으로 기소된 사건이다.

대법원이 이처럼 과거사 정리에 속도를 내는 것은 이용훈 대법원장이 오는 9월 임기 만료를 앞두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 대법원장은 2005년 인사청문회에서 “재심 사건이 하급심에서 끝나버리고 마는데, 대법원에 올라와 대법원이 사법의 과거에 대해 한마디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렇지 못해 참 섭섭하다”고 말했다. 긴급조치 사건이 헌법재판소에 걸려 있는데도 대법원이 지난달 보안을 유지해가며 서둘러 위헌을 선고한 것도 과거사 정리와 무관하지 않다는 관측이 나온다.

이뿐만이 아니다. 13일 대법원은 지난해 재심을 통해 무죄를 선고받고 이후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한 위자료 사건을 일제히 선고했다. 민족일보 조용수 사건, 울릉도 간첩단 사건, 아람회 간첩단 사건, 납북어부 사건의 재심 무죄에 따른 손배 소송이다.

대법원은 “정부는 국가의 불법 체포·구금·형집행으로 입은 원고의 정신적 손해를 배상할 의무가 있다”고 밝혔다. 손해배상 청구시효 5년이 소멸했다는 법무부 주장에 대해선 “당시 잘못된 판결을 취소하는 재심 판결을 기대하기 어려웠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다만 대법원은 “하급심의 손해배상액 계산법에 문제가 있다”며 사건들을 파기해 직접 판단하거나 항소심에 돌려보냈다. 위자료의 지연손해금(이자) 발생시점을 불법행위 당시가 아닌 손배소송 사실심(2심) 변론종결일을 기준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대법원 관계자는 “현재 위자료 원금이 물가 상승·인권의식 고취·세월의 고통을 상당 부분 반영한 금액으로 보이는데도, 다른 사건처럼 지연손해금 발생 시점을 과거로 잡으니 20년 만에 곱절이 되는 문제가 있었다”면서 “이번 판결은 과거사 손해배상의 기준을 마련한 데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이범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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